SF 미스터리 / 감성 드라마 · 연재 중 (제49화)
레테(Lethe)의 로비는 언제나 조용했다.
소음이 없다는 뜻이 아니었다. 로비에는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안내 데스크 직원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으며, 자동문이 열릴 때마다 바깥 도시의 소음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럼에도 조용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하는 대신 꼭 쥔 손을, 숙인 고개를, 창밖을 멍하니 보는 눈빛을 들고 왔다.
이세하는 그 광경에 익숙했다.
3년째였다. 매일 아침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성수역에서 내려, 유리와 콘크리트로 지어진 레테 빌딩 6층으로 올라와, 흰 가운을 걸치고, 의뢰인들이 맡긴 기억 캡슐을 분류하고 보정하는 일을 했다. 기억을 만지는 직업. 정식 명칭은 '기억 정제 기술자(Memory Refinement Technician)'였지만, 사내에서는 그냥 '기술자'라고 불렸다.
2061년의 서울에서 기억 추출은 더 이상 공상과학이 아니었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의료 분야에 보편화된 이후, 기억을 데이터로 변환해 외부 저장 장치에 보관하는 기술이 상용화됐다. 레테는 그 기술을 이용해 사람들의 '지우고 싶은 기억'을 추출, 암호화하여 본인 외에는 접근할 수 없는 보안 서버에 보관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기억은 지우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맡아둡니다."
― 레테 공식 슬로건
세하는 그 슬로건을 처음 봤을 때 약간 우습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맡긴다'는 표현은 마치 세탁소나 보관함 같았다. 하지만 의뢰인들은 그 말을 좋아했다. 영원히 지우는 게 아니라, 잠깐 치워두는 것이라는 위안. 언젠가 다시 찾아볼 수도 있다는 가능성. 실제로 기억을 되찾아 가는 의뢰인은 전체의 3%에 불과했지만.
그날도 세하는 평소처럼 오전 열 시에 작업실로 들어섰다. 길쭉한 직사각형 방, 양쪽 벽을 따라 늘어선 은색 캐비닛, 그리고 중앙의 작업 테이블. 테이블 위에는 오늘 처리해야 할 캡슐들이 놓여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크기의 반투명 실린더들. 각각 누군가의 기억이 압축된 채 잠들어 있었다.
세하는 장갑을 끼고 첫 번째 캡슐을 집었다. 라벨을 확인했다. 의뢰인 코드, 기억 유형 분류(감정적 트라우마 / 관계 / 상실 등), 추출 날짜. 이 정도가 기술자에게 허용된 정보의 전부였다. 의뢰인의 실명은 알 수 없고, 기억의 내용은 재생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기술자의 역할은 단순했다. 캡슐의 데이터 무결성을 확인하고, 손상이 있으면 보정하고, 보안 서버에 업로드한다. 기억의 내용을 보는 건 금지였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니라, 윤리적 이유에서 잠금이 걸려 있었다. 그 잠금을 해제하려면 의뢰인 본인의 생체 인증이 필요했다.
적어도, 그렇게 되어 있어야 했다.
세하가 열두 번째 캡슐을 집었을 때, 뭔가 달랐다.
라벨에 의뢰인 코드가 없었다. 기억 유형 분류도 없었다. 추출 날짜도. 캡슐은 다른 것들과 똑같이 생겼는데, 거기에 적힌 거라고는 다섯 자의 한글뿐이었다.
— 이세하에게.
세하는 잠시 멈췄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실수라고 생각했다. 다른 직원의 사물이 잘못 섞였거나, 아니면 누군가 장난을 친 것이라고. 하지만 캡슐을 작업 테이블의 스캐너에 올려놓자, 화면에 오류 메시지 대신 다른 문구가 떴다.
생체 인증 없이 재생 가능 상태입니다.
세하는 화면을 한 번, 캡슐을 한 번 번갈아 봤다. 잠금이 해제되어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칙대로라면 즉시 상관에게 보고해야 했다. 구민재 수석에게 연락해 비정상 캡슐 접수 절차를 밟으면 됐다.
세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구민재의 이름을 찾았다. 통화 버튼 위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 누르지 않았다.
대신 캡슐을 재생 슬롯에 끼웠다.
왜 그랬는지 세하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3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면서 한 번도 그 안을 들여다보지 못한 데 대한, 묵은 호기심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깊은 어딘가에서 오는 감각이었을 것이다.
이걸 봐야 한다는.
뷰어가 켜졌다. 화면이 흰빛으로 가득 찼다가, 천천히 한 장면을 불러왔다.
어떤 병원 복도. 형광등 빛. 누군가 울고 있는 소리. 그리고 그 복도 끝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뒷모습.
세하는 숨을 멈췄다.
그 뒷모습은 세하 자신이었다. 분명히. 머리 모양도, 어깨의 기울기도, 낡은 초록색 점퍼도. 전부 세하의 것이었다.
그런데 세하는 저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다.
병원에 간 적이 없었다. 저 복도를 걸은 적이 없었다. 저렇게 운 적이 — 아니, 저 울음소리가 자신의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뷰어가 저절로 꺼졌다. 재생 시간 4초. 캡슐이 슬롯에서 튀어나왔다.
작업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세하는 한동안 그 캡슐을 손에 쥔 채 앉아 있었다. 창밖에서 2061년의 서울이 느리게 흘러갔다. 드론이 지나갔고, 고가 철로 위의 열차가 반짝였고, 누군가의 하루가 계속됐다.
세하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질문만이 남아 있었다.
저 기억은 누가 맡긴 것인가.
그리고 왜, 자신이 그 안에 있는가.
세하는 그날 오후 내내 일을 했다. 남은 캡슐들을 스캔하고, 데이터 무결성을 확인하고, 보안 서버에 업로드했다. 손은 움직였고 눈은 화면을 봤으며 절차는 하나도 빠짐없이 이행됐다. 그러나 머릿속은 계속 같은 장면을 재생했다.
형광등 빛. 병원 복도. 울음소리. 그리고 초록색 점퍼를 입은 자신의 뒷모습.
4초였다. 뷰어가 꺼지기 전까지 세하가 본 건 고작 4초 분량의 장면이었다. 기억 캡슐은 보통 수십 분에서 수 시간 분량의 데이터를 담는다. 캡슐이 자동으로 재생을 차단한 건지, 아니면 원래 그 4초가 전부인 건지 알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됐다. 세하는 흰 가운을 벗어 걸었다. 그리고 문제의 캡슐을 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보고하지 않았다. 절차를 어겼다. 세하는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캡슐을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았다.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걸 구민재 수석에게 넘기는 순간, 두 번 다시 이 캡슐을 볼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세하가 먼저 한 일은 레테의 내부 접수 시스템에 접속하는 것이었다.
기술자들은 재택 접속 권한이 제한적으로 허용됐다. 자신이 당일 처리한 캡슐 목록과 업로드 이력을 확인하는 정도. 세하는 오늘 날짜의 작업 내역을 열었다. 스물다섯 개의 캡슐 목록이 떴다. 의뢰인 코드, 분류 태그, 처리 시각, 업로드 완료 여부.
열두 번째 항목이 없었다.
목록은 열한 번째 캡슐에서 열세 번째 캡슐로 바로 넘어갔다. 순번이 건너뛴 것도 아니었다. 그냥,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세하는 화면을 스크롤하고 또 스크롤했다. 혹시 분류 오류로 다른 날짜에 기록됐나 싶어 전날, 그 전날 목록도 확인했다. 없었다. 접수 대기 목록도 뒤졌다. 없었다. 시스템 어디에도 그 캡슐의 흔적은 없었다.
기록에 없는 캡슐.
세하는 노트북을 닫고 안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냈다. 형광등 아래에서 보니 다른 캡슐들과 재질이 미묘하게 달랐다. 보통 레테 캡슐의 반투명 실린더는 옅은 푸른빛을 띠는데, 이것은 완전히 투명했다. 라벨의 글씨도 레테 공식 폰트가 아니라 손으로 직접 눌러 새긴 것처럼 불규칙했다.
— 이세하에게.
세하는 그 글자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캡슐의 표면이 차가웠다.
이걸 작업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사람이 있다. 레테 직원이거나,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레테 내부에 접근할 수 있는 누군가. 기술자 작업실은 직원 출입증이 있어야 들어올 수 있고, 방문 기록이 모두 로그에 남는다. 세하는 오늘 자신이 첫 번째로 작업실에 들어섰다. 그 전에는 누가 들어왔을까.
내일 출근하면 출입 로그를 확인할 수 있을지 생각했다. 기술자에게 그 권한이 있는지는 불분명했다. 총무팀에 문의하면 되겠지만,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면 캡슐의 존재를 밝혀야 했다. 다시 원점이었다.
세하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2061년의 서울 밤은 드론 항법 신호등으로 인해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았다. 천장에 옅은 붉은빛과 초록빛이 교차하며 스쳤다.
저 기억은 누구의 것인가.
의뢰인의 기억이라면, 그 안에 세하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의뢰인이 세하를 아는 사람이라면, 세하는 왜 그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이건 의뢰인의 기억이 아닌가. 누군가가 세하에 관한 기억을 채집해 캡슐에 담아 건넨 것인가.
그 모든 가능성 중에서 세하가 가장 오래 붙들고 싶지 않은 것은 마지막 것이었다.
저 병원 복도가 실제로 존재했다면. 저 장면이 세하의 삶 어딘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런데 세하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잊은 것인가, 아니면 지워진 것인가.
핸드폰이 울렸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화면에 뜬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것이었다. 열한 자리 숫자. 지역 코드도, 기업 번호 형식도 아니었다.
세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스팸일 가능성이 높았다. 번호를 차단하려다가 멈췄다.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곧 문자가 왔다.
4초로는 부족하죠?
세하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이 알고 있었다. 오늘 작업실에서 세하가 캡슐을 재생했다는 것을. 뷰어가 4초 만에 꺼졌다는 것을. 세하가 지금 그 캡슐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을.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칫했다. 세하는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누구십니까.
전송하고 1분도 지나지 않아 답이 왔다.
당신이 지워버린 사람이요.
세하는 그 문장을 세 번 읽었다. 네 번째에는 화면이 흐릿하게 느껴졌다. 눈이 건조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다시 답장을 보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지운 적 없습니다.
이번에는 답이 조금 늦게 왔다. 세하는 그 몇 십 초 동안 숨을 고르게 쉬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게 바로 지워진 사람의 말투예요.
그리고 또 한 줄이 이어졌다.
캡슐 버리지 마세요. 나머지를 보여줄 수 있어요. 준비가 되면 연락해요, 이세하 씨.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캡슐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투명한 실린더가 천장의 붉고 초록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나머지.
4초 너머에 무언가가 더 있다. 그리고 저 번호의 주인은 그걸 갖고 있다.
세하는 그날 밤 오래도록 잠들지 못했다. 뇌는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았다. 병원 복도, 울음소리, 초록색 점퍼. 그리고 당신이 지워버린 사람이라는 문장.
기억은 지우지 않는다. 다만 잠시 맡아둔다.
레테의 슬로건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다른 의미로 읽혔다.
다음 날 아침, 세하는 평소보다 열다섯 분 일찍 출근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잠이 일찍 깼다. 아니, 정확히는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뒤척이다 새벽 다섯 시에 포기하고 일어나 샤워를 했고, 평소에는 마시지 않는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집을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도, 성수역 출구를 나서는 내내도, 캡슐은 재킷 안주머니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세하는 의식적으로 그쪽에 손을 가져가지 않으려 했다.
레테 빌딩 로비에서 출입증을 태그하는 순간, 안내 데스크 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세하 씨, 일찍 오셨네요.”
구민재였다. 그는 안내 데스크 직원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세하를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걸어왔다. 아이보리색 셔츠, 단정하게 빗은 머리, 늘 그렇듯 온화한 표정. 레테 수석 연구원 구민재는 이 건물 안에서 가장 편안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제 일찍 퇴근하던데, 몸은 괜찮아요?”
“네. 그냥 피곤해서요.”
“요즘 처리 물량이 늘었으니까.” 구민재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제 캡슐 분류 목록 확인했어요. 스물네 개 처리했던데, 수고했어요.”
세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유지했다.
스물네 개.
구민재도 그 숫자를 알고 있었다. 시스템에 기록된 숫자대로. 열두 번째 캡슐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왔다. 두 사람이 함께 탔다. 세하는 6층 버튼을 눌렀고, 구민재는 그 옆에 섰다. 좁은 공간이 아닌데도 어딘가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세하는 텀블러를 두 손으로 쥐었다.
“오늘은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 알려줘요.” 구민재가 말했다. “요즘 외부 반입 관련 감사가 있거든요.”
아주 짧은 말이었다. 일상적인 말투였다. 그런데 세하의 심장이 한 박자 내려앉았다.
외부 반입.
“무슨 감사요?”
“분기마다 하는 거예요. 크게 신경 쓸 건 없고.” 구민재가 웃었다.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요.”
6층에 도착했다. 세하는 “네”라고 대답하고 작업실 쪽으로 걸었다. 등 뒤에서 구민재가 반대편 복도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대로.
세하는 작업실 문을 열며 그 말을 씹었다.
오전 내내 세하는 작업에 집중하려 했다. 오늘 배정된 캡슐은 열여덟 개. 라벨을 확인하고, 스캐너에 올리고, 업로드하고, 다음 것으로 넘어갔다. 손은 익숙하게 움직였다. 머리는 어제 밤의 문자를 계속 돌렸다.
캡슐 버리지 마세요. 나머지를 보여줄 수 있어요.
나머지. 4초 너머.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두 감정이 오전 내내 교대로 올라왔다.
점심시간 직전, 누군가 작업실 문을 두드렸다.
“이세하 기술자님이시죠?”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 감사팀 배지를 달고 있었다. 얼굴형이 날카로운 편이었고, 눈빛은 더 날카로웠다. 그러나 목소리는 의외로 낮고 차분했다.
“정아로라고 해요. 내부 감사팀이요. 잠깐 얘기 나눌 수 있을까요?”
세하는 장갑을 벗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팀이 기술자를 직접 찾아오는 건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구민재가 오전에 감사 얘기를 꺼낸 터였다. 자연스러운 흐름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아로는 작업실로 들어오는 대신 복도 쪽으로 턱을 까딱했다.
“여기 말고 다른 데서요.”
두 사람은 6층 끝의 작은 휴게 공간으로 이동했다. 자판기 두 대와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전부인 곳. 이 시간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아로는 창가 의자에 앉으면서 주변을 한 번 훑었다. 습관처럼 보이는 행동이었다.
“어제 작업 목록에서 이상한 점 못 느끼셨어요?”
세하는 표정을 관리했다.
“무슨 이상한 점이요?”
“처리 건수랑 실제 배정 캡슐 수가 안 맞는 경우요.” 정아로의 눈이 세하의 얼굴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에 없는 캡슐이 작업실에 있었던 적, 있지 않으셨어요?”
세하는 0.5초를 벌었다. 텀블러 뚜껑을 돌리는 척하면서.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렇군요.” 정아로는 짧게 말하고 창밖을 봤다. “저도 그냥 물어보는 거예요. 최근 몇 달 사이에 기술자 작업실에서 비정규 캡슐이 발견됐다는 제보가 두 건 있었거든요. 두 기술자 모두 구민재 수석 팀 소속이고요.”
세하의 손이 멈췄다.
“두 건.”
“네.” 정아로가 세하를 다시 봤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지금은 레테에 없어요. 한 명은 개인 사정으로 사직, 한 명은 부서 이동 후 연락 두절.”
창밖에서 드론 한 대가 유리 가까이 지나갔다가 멀어졌다. 세하는 그것을 눈으로 좇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다.
“감사팀에서 그런 제보를 받으면 구민재 수석한테 보고하는 거 아닌가요?”
“원래는 그렇죠.” 정아로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근데 제보 내용의 당사자가 수석이라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세하 씨한테 뭔가를 강요하는 게 아니에요.” 정아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다만, 만약 비정규 캡슐을 발견했는데 아직 갖고 있다면, 저한테 먼저 가져오는 게 나을 수 있어요. 구민재 수석보다.”
그리고 명함을 내밀었다. 레테 공식 명함이 아니었다. 흰 종이에 이름과 번호만 프린트된, 간소한 것이었다.
“생각해 보세요.”
정아로는 자판기에서 음료를 하나 뽑아 들고 휴게 공간을 나갔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세하는 명함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캡슐의 감촉을 확인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여전히 거기 있었다.
두 명의 기술자. 두 개의 비정규 캡슐. 그리고 지금은 모두 사라진 두 사람.
세하는 명함을 캡슐과 같은 주머니에 넣었다.
퇴근 후, 세하는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 빌딩을 나와 성수동 골목을 걸었다. 의식적으로 빠른 걸음. 사람들 사이를 지나치며 한 블록, 두 블록. 레테 빌딩의 유리 외벽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인적이 드문 골목 끝 벤치에 앉아 핸드폰을 꺼냈다. 어젯밤 문자를 보낸 번호를 열었다.
세하는 잠시 화면을 봤다.
그리고 입력했다.
나머지를 보고 싶습니다. 어디서 만날 수 있죠?
전송.
답장은 예상보다 빨리 왔다.
반응이 이틀이나 걸렸네요.
세하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다음 문자가 왔다.
내일 오후 세 시. 성수동 을지병원 맞은편 골목, 파란 철문 있는 건물이요. 혼자 오세요. 그리고 세하 씨.
세하는 다음 줄을 기다렸다.
오늘 정아로 씨 만났죠? 그 사람 말, 다 믿지는 마세요.
세하는 핸드폰을 무릎 위에 내려놨다.
골목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낙엽 몇 장이 발 앞을 굴러갔다.
이 번호의 주인은 세하가 오늘 정아로를 만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레테 안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 세하를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세하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드론 항법 신호등이 황혼 속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내일 오후 세 시.
세하는 아직 가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 가기로 결정하지도 않았다.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균열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야 했다. 세하는 언제나 그렇게 해왔다. 하지만 저 병원 복도에 서 있는 자신의 뒷모습은 어떤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기억은, 논리 이전의 문제였다.
세하는 벤치에서 일어났다.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집 방향이 아니었다.
세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한강이었다.
성수대교 북단 인도. 난간 앞에 서서 강을 내려다보는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발이 알아서 움직였고, 머리는 아직도 제자리를 맴돌았다. 강물은 2061년에도 예전과 거의 비슷하게 흘렀다. 수면 위로 수상 모빌리티 두어 대가 지나갔고, 저 멀리 올림픽대로 쪽에서 자율주행 차량들의 헤드라이트가 물결처럼 이어졌다. 세상은 그냥 굴러가고 있었다.
세하는 난간에 두 팔을 올려놓고, 찬 바람을 맞으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사실관계만 나열하기로 했다. 감정은 나중에.
첫째, 기록에 없는 캡슐이 작업실에 있었다. 둘째, 그 안에 세하 자신이 등장하는 장면이 있었다. 셋째, 그 장면을 세하는 기억하지 못한다. 넷째, 같은 팀 소속 기술자 두 명이 비정규 캡슐을 발견한 후 레테를 떠났다. 다섯째, 그 모든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파악하고 있는 누군가가 세하에게 연락해오고 있다.
여섯째. 그 누군가는 세하가 오늘 정아로를 만났다는 것도 알았다.
세하는 강바람에 눈을 가늘게 떴다. 레테 빌딩 내부에 감시 카메라가 있다는 건 직원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로비, 엘리베이터, 주요 복도. 다만 기술자 작업실과 직원 전용 휴게 공간은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카메라가 없었다.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세하는 그 '공식적으로는'이라는 단서가 마음에 걸렸다.
핸드폰을 꺼냈다. 미지의 번호로 온 마지막 문자를 다시 읽었다.
오늘 정아로 씨 만났죠? 그 사람 말, 다 믿지는 마세요.
정아로를 믿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번호의 주인은 정아로와 다른 편인가. 아니면 정아로를 경계하게 만들어 세하를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인가. 어느 쪽이든 세하는 아직 아무도 신뢰할 근거가 없었다.
강바람이 한 차례 강하게 불었다. 세하는 재킷 깃을 세웠다. 안주머니에서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일 오후 세 시.
세하는 가기로 했다.
다음 날 오전은 조용히 흘렀다. 세하는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했고, 평소와 다름없이 장갑을 끼고 캡슐을 분류했다. 구민재는 오전 중에 한 번 작업실을 지나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세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후 두 시 삼십 분, 세하는 화장실에 간다고 말하고 작업실을 나섰다. 6층에서 계단을 이용해 1층으로 내려왔다. 정문이 아닌 지하 주차장 쪽 출구. 카메라 각도를 따로 계산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그쪽을 택했다.
성수동 을지병원은 레테 빌딩에서 걸어서 팔 분 거리였다. 세하는 병원 정문이 아니라 맞은편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좁고 오래된 골목이었다. 2061년의 성수동은 젊은 건물과 낡은 건물이 뒤섞인 동네였는데, 이 골목은 확실히 후자 쪽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담벼락, 잡초가 올라온 보도블록 틈새, 그리고 골목 안쪽의 파란 철문.
색이 많이 바랬지만 분명히 파란색이었다.
세하는 주변을 한 번 살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드론 한 대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세하는 걸음을 옮겼다.
철문 앞에 서니 인터폰 버튼이 하나 있었다. 세하는 눌렀다.
잠깐의 침묵.
그리고 문이 열렸다. 인터폰 응답도 없이, 그냥 전동으로 미끄러지듯.
안쪽은 작은 마당이었다. 화분 몇 개, 접이식 의자 한 쌍, 그리고 낡은 단층 건물. 창문에 불투명 필름이 붙어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입구 문이 빼꼼히 열려 있었다.
세하는 들어갔다.
내부는 예상보다 넓었다. 원래 어떤 용도였는지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한쪽 벽에는 접이식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노트북 두 대와 외장 장비 몇 개가 연결되어 있었다. 기억 재생 뷰어처럼 생긴 장치도 있었다. 레테 공식 모델이 아닌, 외부 제작 티가 나는 것.
의자에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세하는 순간 멈칫했다. 어떤 형태로든 목소리나 텍스트로만 접촉해온 상대였다. 그런데 실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남자. 창백한 얼굴에 눈 아래 그늘이 짙었다. 체구는 작은 편이었고, 세하를 보는 눈빛은 덤덤했지만 그 안에 무언가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왔네요.”
목소리는 문자 너머에서 상상했던 것보다 낮고 조용했다.
“하율이라고 해요.”
세하는 그 이름을 어디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름을 들은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무언가가 건드려지는 느낌이 있었다. 실처럼 가느다란 감각. 설명할 수 없어서 무시했다.
“이세하입니다.”
“알아요.” 하율이 말했다. “오래 알았으니까.”
세하는 그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저는 모릅니다. 당신을.”
“그게 문제죠.”
하율은 테이블 위의 장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앉으세요. 보여드릴 게 있어요. 4초 이후.”
세하는 맞은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하율이 외장 뷰어를 켰다. 레테 공식 시스템과 달리 인터페이스가 거칠었지만 익숙한 구조였다. 재생 슬롯에 뭔가가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세하가 가져온 캡슐과 동일한 투명 실린더. 그러나 이쪽 것은 더 길었다.
“그쪽 캡슐은 일부러 4초만 재생되게 잘랐어요.” 하율이 설명했다. “처음부터 전부 보여주면 거부감이 올 수 있으니까. 레테가 기억을 지울 때 쓰는 방식이에요. 조금씩, 나눠서.”
“레테가 기억을 지운다고요.”
“보관만 하는 척하면서요.” 하율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사실을 읽어내리는 것 같았다. “레테에는 두 가지 서비스가 있어요. 공식적인 것, 그리고 비공식적인 것. 공식 서비스는 세하 씨가 아는 것과 같아요. 기억 추출, 암호화 보관. 하지만 비공식 서비스는 추출에서 끝나지 않아요. 원본 자체를 삭제해요. 뇌 신경 기록에서. 흔적 없이.”
세하는 잠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게 가능해요?”
“세하 씨가 3년간 다뤄온 캡슐 중 일부는 그 비공식 서비스의 결과물이에요. 단순 보관이 아니라, 삭제 전 최종 단계 데이터. 세하 씨는 알고 있었을 수도 있고,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어요.”
“저는 그런 절차를 밟은 적 없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거겠죠.”
하율이 재생 버튼에 손을 올렸다.
“이 영상은 세하 씨가 직접 찍은 거예요. 찍었다는 사실을 잊기 전에. 병원 복도, 기억나지 않죠? 그날 세하 씨가 거기 있었던 이유가 담겨 있어요. 전부.”
세하는 화면을 봤다. 아직 재생되지 않은 정지 화면. 흰 복도의 끝.
“왜 당신이 이걸 갖고 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의 무언가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왜냐면.” 짧은 침묵. “그날 복도에서 세하 씨 옆에 있던 사람이 저니까요.”
세하의 심장이 한 번, 느리게 뛰었다.
“그리고 세하 씨가 지운 기억은 저에 관한 거예요. 전부.”
하율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켜졌다.
형광등 빛. 병원 복도. 그리고 이번에는 4초가 아니었다.
화면이 켜진 순간, 세하는 숨을 참았다는 것을 몰랐다.
형광등 빛. 병원 복도. 처음 4초와 동일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멈추지 않았다.
화면 속의 세하는 복도 끝에 서 있었다. 초록색 점퍼. 구부정한 어깨. 그리고 그 옆에,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다. 작은 체구. 창백한 얼굴. 세하보다 머리 하나쯤 작았고, 세하의 팔 안에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세하의 팔이 그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다.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박였다. 그러다 세하가 움직였다. 천천히, 팔을 거두었다. 감싸안고 있던 것을 풀었다. 상대방의 어깨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화면 속의 세하가 입을 열었다. 음성은 낮고 평탄했다. 세하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미안해.”
그리고 돌아섰다. 걸어갔다. 복도의 반대편 끝을 향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남겨진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세하가 막 떠난 쪽을 보면서. 그 얼굴이 카메라 각도에 잡혔다.
하율이었다.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린 얼굴. 그러나 분명히 지금의 하율이었다. 그리고 그 눈이, 세하는 그 눈빛의 이름을 알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그 표정을 지어본 적이 있을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믿지 않으려 했던 것을 끝내 확인하는 순간의 얼굴.
영상이 끊겼다.
정지 화면. 흰 복도.
세하는 얼마나 오래 그 화면을 보고 있었는지 몰랐다. 하율이 장치를 끄는 소리가 들렸을 때에야 시선을 거뒀다.
방 안이 조용했다. 하율은 테이블 위에 두 손을 내려놓은 채 세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배려인지 회피인지 세하는 구분할 수 없었다.
“얼마나 됐어요.”
세하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생각보다 고르게 나왔다.
“세하 씨가 기억을 지운 게요?” 하율이 물었다.
“네.”
“이 년 전이에요.”
세하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서 반복했다. 이 년. 레테에 입사한 건 삼 년 전이었다. 그러니까, 세하는 레테에서 일한 지 일 년째에 그 병원에 있었고, 그 직후 무언가를 지웠다.
“저는 그때 레테 직원이었는데, 레테에 기억 삭제를 의뢰했다는 거예요?”
“직원이었으니까 가능했겠죠.” 하율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탄했다. “외부인은 비공식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워요. 공식 경로를 통해 의뢰하면 기록이 남으니까. 하지만 내부 직원이라면, 특히 수석과 가까운 사이라면.”
“구민재 수석.”
“그 사람이 도왔을 가능성이 높아요. 아니면 직접 주도했거나.”
세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두 손이 차가웠다. 장갑을 벗고 나서도 오후 내내 이 손이 차가웠다는 걸, 지금에서야 알아챘다.
“당신은 어떻게 알았어요. 이 모든 걸.”
“기다렸으니까요.”
하율이 처음으로 세하를 똑바로 봤다. 눈 아래 그늘이 더 짙어 보였다. 이 년이라는 시간이 그 얼굴 위에 다 쌓여 있는 것 같았다.
“세하 씨가 사라진 다음에 저는 레테를 찾아갔어요. 기억 삭제 서비스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세하 씨가 무엇을 지웠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물론 접근할 수 없었죠. 그래서 다른 방법을 썼어요. 시간이 걸렸어요.”
“어떤 방법이요.”
“레테 내부 직원들을 통해서요. 비공식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 돈을 쓰거나, 다른 걸 거래하거나.” 잠깐의 침묵. “그러다 비정규 캡슐 두 개가 이미 삭제됐다는 걸 알게 됐어요. 기술자들이 발견하기 전에. 그 사람들이 사라진 건 그 이후예요.”
세하의 등이 서늘해졌다.
“사라진 게 아니라 사라지게 된 거군요.”
“확인할 수 없어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솔직한 대답이었다. 세하는 그게 오히려 더 무거웠다.
“세하 씨한테 캡슐을 보낸 건,” 하율이 계속했다. “세하 씨만이 자신의 기억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비공식 삭제라도, 원본 데이터 복구 권한은 당사자한테 있어요. 기술적으로는. 레테가 그 허점을 아직 막지 못했거나, 아니면 당사자가 스스로 동의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그냥 둔 거거나.”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제가 원본을 복구하면, 지워진 기억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전부가 아닐 수도 있어요. 삭제 방식에 따라 손상이 있을 수 있고, 이 년이라는 시간도 변수예요. 하지만 핵심적인 것들은.” 하율이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저는 세하 씨가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알고 싶어요. 왜 지웠는지. 그게 이 년 동안 제가 멈추지 못한 이유예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자판기도 없고 창문 너머 차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공간이었다. 세하는 그 조용함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당신하고 저는.” 세하가 말을 꺼냈다. “어떤 사이였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빛 안에서 또다시 무언가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세하 씨가 그걸 저한테 묻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낮고 천천히. “하지만 말하자면— 저한테는 전부였어요.”
그 말이 공기 속에 놓였다. 세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 가슴 어딘가가 묵직해지는 감각이 있었다. 슬픔인지, 공포인지, 아니면 두 가지가 뒤섞인 것인지 이름 붙일 수가 없었다. 세하는 원래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3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면서도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밖에서 소리가 났다. 철문 쪽에서 무언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 세하와 하율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하율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나가야 해요.” 낮고 빠른 목소리. “뒤쪽 창문으로요.”
“무슨—”
“이 장소가 노출됐어요.” 하율이 이미 노트북을 닫으면서 말했다. “저는 정리하고 나갈게요. 세하 씨는 먼저 나가요. 창문 열면 바로 골목이에요.”
세하는 일어섰다. 반사적으로. 논리가 따라오기 전에 몸이 먼저였다.
“잠깐.” 세하가 말했다. “복구. 어떻게 해요.”
하율이 멈췄다. 짧은 순간.
“세하 씨가 레테 보안 서버에 직접 접근해야 해요. 기술자 권한으로. 비공식 삭제 파일은 공식 서버와 분리된 로컬 스토리지에 있어요. 건물 지하 2층.”
“그게 가능하다는 걸 어떻게 알아요.”
“전 직원한테서 들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세하 씨가 기억을 지우기 전에 누군가한테 설명해뒀어요. 혹시라도 나중에 찾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세하는 그 말의 무게를 잠시 감당하지 못했다.
기억을 지우면서도, 언젠가 되찾고 싶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뒀다. 그 세하는 지금의 세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 결정의 이유를, 지금의 세하는 모른다.
철문 쪽에서 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더 또렷하게.
세하는 창문으로 갔다. 불투명 필름 아래쪽을 젖히니 잠금장치가 보였다. 레버를 올렸다. 창이 열렸다. 저녁 공기가 들어왔다.
뛰어내리기 전에 세하는 한 번 돌아봤다.
하율이 장비를 가방에 넣으면서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아까 영상 속 복도에서 남겨진 사람의 눈빛과 달랐다. 지금은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이 년을 기다린 사람의.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창밖으로 나갔다.
골목은 어두웠다. 발이 바닥에 닿는 순간 세하는 걷기 시작했다. 빠르게. 골목 끝의 불빛을 향해.
가슴 안주머니에 캡슐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세하는 알고 있었다. 지하 2층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자신이 기억을 지우기 전의 자신이 남겨둔 무언가가.
되찾을 것인가, 아닌가.
그 질문은 아직 대답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골목 끝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봤다.
구민재였다.
구민재였다.
세하는 골목 끝에 서서 화면을 봤다. 진동이 손바닥 안에서 규칙적으로 울렸다. 첫 번째, 두 번째. 전화는 끊기지 않고 계속됐다.
받을까, 말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형태를 갖추기도 전에 손가락이 움직였다.
“네, 수석님.”
“세하 씨, 지금 어디예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낮고 온화하고, 약간 느린 속도. 그러나 세하는 그 평온함의 질감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다. 아주 얇게. 표면 바로 아래에 무언가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잠깐 바람 쐬러 나왔어요. 머리가 좀 아파서요.”
“오늘 오후에 자리 비운 거 알고 있어요.”
세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인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골목 끝에서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황혼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는 중이었다.
“잠깐 나갔다 왔어요. 몸이 안 좋아서.”
“어디 갔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질문의 형태였지만, 세하는 그것이 질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알고 있거나, 아니면 알아가고 있는 사람의 말투.
“병원 근처 카페요. 두통약 먹고 좀 쉬다 왔어요.”
짧은 침묵. 구민재가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가늠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이었다.
“세하 씨.”
“네.”
“요즘 이상한 거 없어요? 작업실에서든, 아니면 다른 데서든.”
세하는 왼손으로 재킷 안주머니를 가볍게 짚었다. 캡슐의 감촉.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그게 거기 있다는 것이 확인됐다.
“없어요.”
또 침묵. 이번에는 조금 더 길었다.
“내일 오전에 잠깐 얘기 나눕시다. 업무 관련해서요.”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세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이 미세하게 차가웠다. 두통약이라고 했다. 병원 근처 카페라고 했다. 두 문장 모두 거짓말이었고, 세하는 살면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아니,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억하지 못할 뿐.
세하는 걷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온 건 밤 여덟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세하는 재킷을 벗지 않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캡슐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투명한 실린더가 형광등 아래에서 아무 빛도 내지 않았다. 그냥 작은 유리 조각처럼.
오늘 본 것들을 정리하려 했다.
영상 속의 자신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하율을 남겨두고. 그 얼굴은 분명히 지금의 하율이었다. 이 년 전의, 조금 더 어린 얼굴. 그러나 같은 사람.
세하는 그 장면을 기억하지 못했다. 병원도, 그 복도도, 미안하다는 말을 했던 것도. 그런데 아까 그 영상을 보면서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건드려졌다. 기억이 아닌 감각. 설명할 수 없는 무게.
기억은 지워도 감각까지 지울 수 있는 건 아닌 걸까.
세하는 생각을 거기서 멈췄다. 그 방향으로 계속 가다 보면 논리가 무너질 것 같았다. 지금은 논리가 필요했다.
사실관계. 다시 한 번.
레테 지하 2층에 비공식 삭제 파일이 보관된 로컬 스토리지가 있다. 거기에 세하 자신의 기억 원본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기술자 권한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하율은 말했다. 하율은 그 정보를 레테 전직 직원에게서 들었고, 세하 자신이 기억을 지우기 전에 그 경로를 누군가에게 알려뒀다고 했다.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는 아직 모른다.
구민재는 내일 오전에 얘기를 하자고 했다. 그 대화가 어디로 향할지도 모른다.
정아로는 구민재를 믿지 말라고 했고, 하율은 정아로를 다 믿지 말라고 했다.
세하는 잠시 두 눈을 감았다.
3년간 기억 기술자로 일하면서 세하가 배운 것이 하나 있었다.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의뢰인들이 맡기는 기억들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었다. 실제 사건보다 감정이 증폭되어 있거나, 특정 부분이 흐릿하게 압축되어 있거나, 전혀 관련 없는 두 장면이 하나로 이어져 있거나. 뇌는 진실을 기록하는 기관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세하가 접근하려는 것도,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었다.
되찾는다는 것이 무조건 나은 선택인지,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오전 열 시, 구민재가 세하를 불렀다.
장소는 6층 끝의 소회의실이었다. 유리 파티션이 있지만 블라인드를 내리면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방. 구민재가 미리 와 있었고, 블라인드는 내려져 있었다.
“앉아요.”
세하는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는데, 화면이 세하 쪽을 향하고 있지 않아서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다행이에요.” 구민재가 노트북 화면을 살짝 내렸다. “세하 씨, 요즘 외부 연락 받은 거 있어요?”
세하는 한 박자를 벌었다. 물컵을 집는 척하면서.
“무슨 연락이요?”
“모르는 번호라든가, 익명의 접촉이라든가. 레테 관련해서요.”
구민재의 눈이 세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은 여전히 온화했다. 그러나 온화함이란 게, 세하는 이제 알았다, 때로는 정밀한 거리 유지의 다른 이름일 수 있었다.
“없어요.”
“정아로 씨가 접근하지 않던가요?”
세하는 이번에는 박자를 벌지 않았다. 벌면 오히려 이상했다.
“분기 감사 때문에 잠깐 얘기는 했어요. 작업 물량 관련해서요.”
“그것뿐이에요?”
“네.”
구민재가 잠시 세하를 봤다. 세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는 사람처럼 보여야 했다. 3년간 타인의 감정을 데이터로 다뤄온 사람이 이 정도 표정 관리를 못 할 리 없었다.
“정아로 씨는 감사팀 직원이 맞는데,” 구민재가 말했다. “요즘 권한 밖의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어요. 기술자들한테 불필요한 정보를 흘리는 것도 포함해서.”
“어떤 정보요?”
“레테 내부 운영에 관한 것들이요. 확인되지 않은 것들.”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가 이었다. “세하 씨가 혹시 뭔가 들었다면, 저한테 먼저 얘기해줬으면 해요. 괜한 오해로 세하 씨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안 되니까.”
과보호. 세하는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꺼냈다. 3년간 느껴왔던 것. 구민재는 항상 이랬다. 세하를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세하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을 부드럽게 막아왔다.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구민재가 노트북을 세하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레테 내부 출입 로그가 열려 있었다. 어제 날짜. 기술자 작업실 출입 기록. 세하의 코드가 오후 두 시 삼십오 분에 퇴실로 찍혀 있었고, 다시 입실 기록은 세 시 오십이 분이었다.
한 시간 십칠 분.
“화장실 가기엔 좀 긴 시간이죠.” 구민재의 목소리에서 처음으로 온화함이 한 겹 벗겨졌다. 아주 얇게. 그러나 세하는 그 차이를 알아챘다. “세하 씨, 저는 세하 씨를 걱정하는 거예요. 진심으로.”
그 말이 공기 속에 놓였다. 세하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었다. 걱정과 통제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 때, 그 둘을 구분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다음에는 외출하면 말하고 나가요.”
“네.”
회의실을 나오면서 세하는 등 뒤로 블라인드가 다시 올라가는 소리를 들었다. 복도가 넓게 펼쳐졌다. 형광등 빛이 바닥 위에 고르게 깔렸다.
세하는 잠시 멈췄다.
복도. 형광등 빛.
영상 속의 장면과 같은 구도였다. 물론 여기는 레테 빌딩 6층이고, 저기는 어딘가의 병원이었다. 그러나 형광등 아래에 서 있는 자신이라는 사실은 같았다.
세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작업실 쪽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쪽. 버튼을 눌렀다. 지하 2층.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문자를 보냈다.
— 지하 2층 로컬 스토리지. 기술자 권한으로 접근하는 방법 알려줄 수 있어요?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지하 2층은 서버 관리 구역이었다. 세하가 올 일이 거의 없는 곳. 서늘한 공기와 함께 서버 냉각 시스템의 저음이 깔려 있었다. 긴 복도 양쪽으로 잠긴 철제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하는 복도 끝까지 천천히 걸었다. 기술자 권한 카드를 어디서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하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실제로는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읽고 있었다. 카메라 위치. 문 잠금 방식. 어느 구역에 사람이 있고 없는지.
복도 막다른 곳에서 세하는 멈췄다. 다른 문들과 다른 문이 하나 있었다. 번호 자물쇠와 출입증 리더기가 동시에 달린 이중 잠금 구조. 라벨이 없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율의 답장이었다.
— 번호 자물쇠 네 자리, 0914예요. 출입증은 세하 씨 걸로 돼 있을 거예요. 이미 거기 있는 거예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가, 문을 봤다가, 다시 화면을 봤다.
0914. 날짜처럼 보이는 숫자였다. 9월 14일. 세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날짜인지, 지금의 세하는 알지 못했다.
세하는 손을 뻗어 번호 자물쇠 위에 올렸다.
0. 9. 1.
그 순간,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세하는 손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몸을 돌렸다. 복도 입구 쪽에서 서버 관리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세하를 보더니 짧게 목례를 했다. 세하도 목례로 받았다. 그 직원이 옆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발소리가 사라졌다.
세하는 다시 문 앞에 섰다. 손을 들었다.
0. 9. 1. 4.
딸깍. 번호 잠금이 풀렸다.
출입증을 리더기에 댔다. 짧은 전자음.
초록불.
문이 열렸다.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안쪽은 어두웠고, 세하가 한 발 들어서자 동작 감지 조명이 켜졌다. 좁은 공간이었다. 한쪽 벽에 소형 서버 랙 두 개. 그리고 그 앞에 작업용 터미널 하나.
세하는 터미널 앞에 섰다. 화면이 대기 상태로 켜져 있었다. 로그인 창이 떴다.
세하는 자신의 기술자 ID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잠깐의 로딩. 그리고 화면이 열렸다.
파일 목록이 나타났다. 암호화된 이름들. 숫자와 문자의 조합. 날짜 태그가 붙은 것들. 세하는 스크롤했다. 리스트는 수백 개였다. 각각 누군가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기억들.
그리고 그 중 하나에, 세하의 기술자 ID가 파일명으로 붙어 있었다.
세하의 손이 마우스 위에서 멈췄다.
파일 크기는 컸다. 수십 분 분량. 4초짜리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
열면 된다. 클릭 한 번.
세하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되찾는다는 것이 나은 선택인지, 어젯밤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하의 손가락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혹은 오래전 어떤 결정을 기억하는 것처럼, 천천히 마우스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클릭하기 0.5초 전.
문 쪽에서 소리가 났다.
“세하 씨.”
구민재였다.
세하는 몸을 돌리지 않은 채로 그 목소리를 들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구민재가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이번에는 온화함이 없었다. 처음으로.
세하는 몸을 돌렸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논리적으로, 지금 이 상황에서 서두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구민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흰 셔츠, 단정한 머리, 익숙한 얼굴. 그러나 세하가 3년간 알아온 그 얼굴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온화함이라는 층위가, 처음으로 완전히 걷혀 있었다.
발소리가 없었다. 세하는 그 사실을 뒤늦게 다시 짚었다. 구민재가 복도를 걸어왔다면 소리가 났어야 했다. 문이 열릴 때도 소리가 났어야 했다. 그런데 세하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처음부터 이 방에 와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서버 냉각 시스템의 저음이 발소리를 삼켜버린 것인가.
세하는 그 질문들을 머릿속에 넣어두고 입을 열었다.
“서버 점검이 있다고 해서요. 기술자 구역 확인 절차 아닌가요?”
목소리는 고르게 나왔다. 세하 자신도 놀랄 만큼.
구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한 걸음 안으로 들어왔다. 문이 등 뒤에서 다시 닫혔다. 좁은 공간이 더 좁아지는 느낌이었다.
“이 방에 서버 점검 일정 없어요.”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다. 화가 난 것도 아니고, 다그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더 무거웠다.
“세하 씨, 출입증 로그는 실시간으로 올라와요. 이 방 문이 열리는 순간 제 화면에 알림이 왔어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0.3초가 걸렸다. 실시간 알림. 이 방에 대해서만. 구민재가 특별히 이 방의 출입 알림을 켜두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 방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수석님도 이 방에 대해 알고 계셨군요.”
세하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구민재가 잠시 세하를 봤다. 그 눈빛 안에서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 같았다. 얼마나 말할 것인가,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
“앉아요.”
그가 말했다.
“여기서요?”
“터미널 앞 의자요. 저도 앉을게요.”
구민재가 벽 쪽에 접혀 있던 보조 의자를 꺼냈다. 세하는 터미널 앞 의자에 그대로 앉았다. 화면은 아직 켜져 있었다. 파일 목록. 세하의 기술자 ID가 붙은 파일이 목록 한가운데에 있었다.
구민재는 그 화면을 봤다.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가 먼저 물었다.
“무엇을요.”
“이 방이 있다는 것.”
세하는 잠시 말을 고랐다. 거짓말과 침묵 사이. 이번에는 완전한 거짓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구민재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있었다.
“어제 알았어요.”
“누구한테서요.”
“그건 답하기 어렵습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긴 침묵이 흘렀다. 서버 냉각 시스템의 저음이 그 침묵을 채웠다.
“세하 씨.”
처음으로 구민재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다른 것이 섞였다. 피로함이었다. 아니면 그와 비슷한 것.
“저는 세하 씨가 이 방을 찾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언젠가는. 그래서 알림을 켜뒀던 거고요.”
“막으려고요?”
“대화하려고요.”
세하는 그 말의 무게를 가늠했다. 대화. 막는다는 말 대신 대화라는 말을 선택한 것.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그럼 대화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한 번 숨을 들이쉬었다. 그것도 처음 보는 행동이었다. 3년간 구민재는 항상 준비된 사람처럼 보였다. 숨을 고를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세하 씨가 기억 삭제를 의뢰한 건 이 년 전이에요. 직접요. 저한테 왔고, 저는 처리했어요.”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온도가 변한 게 아닌데도, 세하는 목 뒤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하 씨가 원했어요. 강요한 적 없어요.”
“이유를 알고 있어요?”
“알아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리고 더 하지 않았다.
세하는 그 침묵이 의도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하가 물어야 한다. 그 구조였다. 구민재는 기다리고 있었다.
세하는 물었다.
“왜요.”
“그걸 지금 제 입에서 듣고 싶어요?”
구민재가 화면을 가리켰다. 파일 목록. 세하의 ID가 붙은 파일.
“아니면 직접 열어서 볼 거예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파일 크기가 눈에 들어왔다. 수십 분 분량. 4초짜리 조각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 그 안에 이 년 전의 자신이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돌아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이유가 있었다.
“두 가지 다 할 수도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처음으로 작게 웃었다. 예전의 온화한 웃음이 아닌, 어딘가 쓴 것이 섞인 표정이었다.
“세하 씨, 그 기억을 되찾으면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거예요.”
“무슨 뜻이에요.”
“이 년 전에 세하 씨가 그걸 지운 이유가 있어요.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이유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어요. 기억만 없을 뿐, 상황은 그대로예요.”
세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게 세하 씨를 보호하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생각했고, 세하 씨도 그렇게 결정했어요. 직접.”
“하지만 저는 지금 기억이 없어요.”
“그게 보호예요.”
“저한테는 없는 두 해예요.”
세하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조금 달라졌다. 감정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무언가였다. 논리 이전의 것.
“없는 두 해 동안, 누군가는 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균열 같은 것이 지나갔다. 아주 빠르게. 그러나 세하는 봤다.
“하율 씨를 만났군요.”
구민재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네.”
“그 사람이 세하 씨한테 뭐라고 했어요?”
“제가 지운 기억의 중심에 자기가 있다고요. 그리고 이 년을 기다렸다고요.”
구민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버 냉각음이 공간을 채웠다.
“세하 씨.”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율 씨가 세하 씨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어요.”
세하의 시선이 구민재에게 고정됐다.
“세하 씨가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 날, 하율 씨도 거기 있었어요. 그리고 하율 씨는 세하 씨를 막지 않았어요.”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두 번 읽었다. 세 번 읽었다.
하율은 이 년을 기다렸다고 했다. 저한테는 전부였다고 했다. 그러나.
막지 않았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파일이 거기 있었다. 클릭 한 번이면 됐다.
구민재가 말했다.
“열기 전에 한 가지만 생각해요. 이 년 전의 세하 씨는 전부 알고 있는 상태에서 지우기로 했어요. 지금의 세하 씨는 절반만 알고 있어요. 절반을 가지고 파일을 열면, 그 안의 것이 세하 씨가 감당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읽히지 않을 수 있어요.”
세하는 그 말의 논리적 구조를 따라가면서 동시에 다른 것을 생각했다.
구민재는 지금 세하를 보호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파일을 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그 둘은 같은 말이 될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율. 막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하율은 세하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세하는 마우스를 쥐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으로, 세하는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논리가 두 방향으로 동시에 당겨지고 있었다. 구민재를 믿는다면 열지 않는 것이 맞다. 하율을 믿는다면 열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쪽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년 전의 세하는 두 사람이 모두 있는 자리에서 지우기를 선택했다.
그 이유가 이 파일 안에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구민재가 그것을 봤지만 말하지 않았다.
세하는 하율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당신이 막지 않았다는 게 사실이에요?
전송.
방 안에서 구민재와 세하는 서로를 보지 않고 각자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서버 냉각음이 계속 울렸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하율의 답장이었다.
— 사실이에요.
짧은 침묵. 그리고 다음 줄이 왔다.
— 세하 씨가 부탁했으니까요. 지켜봐 달라고. 도망가지 말고. 끝까지.
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
—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전부였어요. 그때는.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가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기억이 아닌 것. 감각도 아닌 것. 그보다 더 오래된, 이름 붙이기 전의 무언가.
세하는 마우스 위에 손을 올렸다.
“세하 씨.”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클릭했다.
화면이 로딩됐다. 재생 바가 나타났다. 수십 분 분량. 그리고 첫 프레임이 정지 화면으로 떴다.
병원이 아니었다.
어떤 방이었다. 창문으로 저녁 빛이 들어오는, 작고 낡은 방. 그리고 그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세하와 하율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하가 뒤를 돌고 있지 않았다. 하율의 맞은편에 앉아서, 하율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세하는 화면 속 자신의 눈빛을 봤다.
3년간 수백 개의 기억 캡슐을 다뤄온 세하였다. 사람의 얼굴에 담기는 감정의 종류를 데이터처럼 읽어온 세하였다.
그런데 지금 화면 속 자신의 눈빛에 담긴 것의 이름을, 세하는 단번에 알았다.
재생 버튼 위에 커서가 놓여 있었다.
구민재가 조용히 일어섰다. 세하는 그것을 시야 끝으로 감지했다.
“막지 않을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처음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계산도, 보호도, 온화함도. 그냥 피로한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세하 씨. 다 보고 나서도,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 이유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재생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민재가 방을 나갔는지 아닌지, 세하는 확인하지 않았다. 발소리가 들렸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화면만 봤다. 재생 바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정지 화면이었던 첫 프레임이 숨을 들이쉬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고 낡은 방이었다. 창문 너머로 저녁 빛이 비스듬하게 들어왔다. 황혼의 주황빛이 바닥을 가로질러 놓여 있었고, 그 빛 안에 먼지 몇 점이 천천히 떠다녔다. 세하가 알지 못하는 방이었다. 그러나 화면을 보는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아주 작은 것이 건드려졌다. 그 방의 공기를 안다는 듯한, 설명할 수 없는 감각.
화면 속에 두 사람이 있었다.
하율은 창가 쪽 바닥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우고, 등을 벽에 기댄 채. 세하는 그 맞은편, 낡은 나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초록색 점퍼가 아니었다. 회색 후드티.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하율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래 같은 공간에 있어온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종류의 침묵이었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 세하는 그런 침묵을 삼 년간 기억 캡슐 속에서 여러 번 봐왔다. 대부분은 상실 직전이거나 상실 직후의 장면들이었다.
하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울 거야?"
목소리가 낮고 고요했다. 판단도, 설득도 없었다. 그냥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이미 알고 있는데 그래도 한 번은 물어야 하는 사람처럼.
화면 속의 세하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의 저녁 빛이 조금 더 기울었다.
"응."
짧았다. 그러나 그 한 글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세하는 화면을 보면서 숨을 조금 멈췄다.
"왜."
하율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낮았지만, 그 안에서 무언가가 조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니까."
화면 속 세하가 말했다. 고르게. 그러나 고른 목소리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세하는 기억 기술자로서 알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게 나 때문이야? 아니면 너 때문이야?"
하율이 물었다. 화면 속 세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 자체가 대답이었다.
하율이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렸다. 황혼빛이 그 옆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세하는 화면 속 하율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그 각도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기억 지우면 내가 없어지는 거 아니잖아."
"알아."
"그럼 무슨 의미야."
"모르는 편이 낫다는 거잖아." 화면 속 세하가 말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시선을 무릎 위로 내렸다. "하율아. 나는 지금 이걸 알고 있는 채로는 못 살아."
지하 2층 서버실의 공기가 차가웠다. 세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손이 차가운 것도, 등이 의자 등받이에서 앞으로 기울어진 것도.
화면 속 하율이 다시 세하를 봤다.
"이걸 알고 있는 게 뭔데."
짧은 침묵.
화면 속 세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아프다는 거."
세하는 그 다음 장면에서 화면이 잠깐 흔들리는 것을 봤다. 카메라가 고정되지 않은 탓이었다. 아니면 찍고 있던 사람의 손이 떨린 것이었다. 누가 찍고 있었는지,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하율의 얼굴이 화면 중앙으로 들어왔다. 눈 아래 그늘이 지금보다 더 짙었다. 더 젊었지만 더 지쳐 보이는 얼굴.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가 멈췄다.
"그러니까 잊으면 낫는다고?"
"내가 낫는 게 아니라." 화면 속 세하가 천천히 말했다.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재생 바가 멈췄다.
세하는 자신이 스페이스바를 누른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손가락이 먼저였다. 화면이 정지됐다. 하율의 얼굴이 그 자리에 고정됐다.
세하는 한동안 그 화면을 봤다.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 문장을 이 년 전의 자신이 말했다. 전부 알고 있는 상태에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구민재는 말했다. 맞았다. 그러나 구민재가 말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었다. 하율의 미안함이었다.
세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하율이 아팠다. 그 사실을 세하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율은 그것 때문에 세하에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아프다는 것이 세하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했겠지. 이 년 전의 세하는 그 무게를 없애려 했다. 하율의 미안함이 쌓이지 않도록. 모르는 편이 낫다고 했다. 기억을 지우면 짐도 사라진다고. 하율이 덜 미안해질 수 있다고.
그러나.
세하는 눈을 떴다. 화면 속 하율의 얼굴을 다시 봤다.
그건 세하가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그 생각이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올라왔다. 하율이 얼마나 미안해할지, 그 무게가 하율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건 하율이 감당할 몫이었다. 세하가 없애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없앤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하율은 이 년 동안 기다렸다. 기억이 없어진 뒤에도, 미안함은 하율 쪽에만 남아서 이 년 내내 그 사람을 지탱하거나 혹은 무너뜨리고 있었을 것이다.
지우는 것이 보호라고 구민재는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이 절반만 맞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 보호였다. 그러나 하율을 향한 보호가 아니라, 하율의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년 전의 세하는 그것을 알면서도 지웠다. 알면서도 지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지금의 세하에게 가장 무거운 부분이었다.
세하는 다시 스페이스바를 눌렀다.
화면이 다시 움직였다.
화면 속 하율이 오래 말이 없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런 거 원하지 않아."
"알아."
"그래도 할 거야."
"응." 화면 속 세하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미안해."
그리고 일어섰다. 창가를 등지고 문 쪽으로 걸었다. 그 뒷모습은, 병원 복도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초록색 점퍼 대신 회색 후드티였지만, 구부정한 어깨와 멈추지 않는 발걸음은 같았다.
하율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무릎을 세운 채. 세하가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면서. 막지 않았다. 끝까지 보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화면이 어두워졌다. 재생이 끝나지 않았는데, 화면 속 방이 어두워진 것이었다. 저녁 빛이 완전히 기울어 방 안이 어두워지는 동안, 하율은 그 자리에 혼자 앉아 있었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다.
그 장면이 삼십 초쯤 이어지다가, 재생 바가 끝에 닿았다.
화면이 꺼졌다.
서버실이 조용했다. 냉각 시스템의 저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세하는 터미널 앞에 앉은 채로 한동안 꺼진 화면을 봤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상을 봤지만, 그 방의 공기를 실제로 마셨던 감각은 여전히 없었다. 하율의 목소리를 귀로 들었던 감각도. 일어서서 문을 향해 걷던 그 발바닥의 감각도. 다 보고 나서도, 세하는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왜인지를.
세하는 핸드폰을 집었다. 하율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다 봤어요.
잠깐 기다렸다. 답이 왔다.
— 어때요.
세하는 그 두 글자를 봤다. 어때요. 기억이 돌아왔냐고 묻지 않았다. 괜찮냐고도 묻지 않았다. 그냥 어떠냐고. 그 질문이 오히려 정직했다.
세하는 입력했다.
—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요. 직접.
전송하고 나서 세하는 화면에서 파일 목록으로 돌아갔다. 세하의 기술자 ID가 붙은 파일. 재생이 끝났지만 파일은 여전히 거기 있었다. 삭제되지 않았고, 잠기지도 않았다.
세하는 그 파일을 닫았다. 지우지는 않았다.
터미널 로그아웃을 하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서버실 문을 열었다. 복도의 형광등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서늘하고 익숙한 빛이었다.
복도에 구민재는 없었다.
세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걸으면서 핸드폰 화면을 봤다. 하율의 답장이 와 있었다.
— 어디서요.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입력했다.
— 파란 철문 말고 다른 곳이요. 당신이 정해요.
전송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기 직전, 핸드폰이 한 번 더 진동했다. 하율이 아니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문자였다.
— 이세하 기술자님, 저 정아로예요. 오늘 세하 씨가 지하 2층에 들어간 거 알아요. 저도 알고 싶은 게 있어요. 구민재 수석이 세하 씨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오늘 안으로 연락해줄 수 있어요?
세하는 그 문자를 읽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세하는 들어가면서 버튼을 눌렀다. 1층. 지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세하는 정아로의 문자도, 하율의 약속도, 구민재가 방을 나가면서 한 마지막 말도 전부 머릿속에 올려놓고 가만히 바라봤다.
다 보고 나서도,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민재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세하는 그것을 아직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영상을 다 봤지만, 세하가 기억을 지운 이유의 한 층은 확인했다. 그러나 구민재가 말한 것,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다른 층에 있었다. 하율이 아팠다는 것.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멈췄다.
문이 열렸다. 레테 로비가 펼쳐졌다. 안내 데스크, 낮은 음악, 그리고 오늘도 입을 다물고 들어오는 사람들.
세하는 그 한가운데를 걸어 나갔다.
하율이 장소를 정했다.
성수동 뚝섬 방면 골목 안쪽, 낮은 간판도 없이 계단 몇 개를 내려가야 하는 지하 카페였다. 레테에서 걸어서 십오 분 거리. 세하는 퇴근 후 곧장 그리로 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공기가 달라졌다. 지상보다 서늘하고 조금 더 축축했다. 원두 볶는 냄새가 깔려 있었다. 세하는 그 냄새를 맡는 순간 잠깐 멈췄다. 기억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냄새가 익숙하다는 감각, 언제가 됐든 이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다는 감각이 몸 어딘가에서 아주 조용히 올라왔다. 세하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율은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도 눈 아래 그늘이 짙었다. 테이블 위에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는데, 거의 식은 것처럼 보였다. 세하가 오기 전부터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세하가 맞은편에 앉았다.
하율이 먼저 말하지 않았다. 세하도 바로 말하지 않았다. 잠시 그 침묵이 흘렀는데, 이상하게 견딜 만한 침묵이었다. 어색하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꺼내기 전에 필요한 종류의 시간 같았다.
세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영상 봤어요.”
“알아요.”
“다 봤어요. 당신이 혼자 남겨지는 부분까지.”
하율의 손이 커피잔 옆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잖아요.” 하율이 말했다. 낮고 고른 목소리였다. 그러나 세하는 이제 그 고름이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미안하다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에요. 영상을 봤지만, 그 방의 공기가 기억나지는 않아요. 당신 목소리를 귀로 들었던 감각도요.” 세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이 년 전 제가 왜 그랬는지는 알게 됐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틀렸다고 생각해요.”
하율의 표정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세하는 계속했다.
“당신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기억을 지웠다고 했잖아요. 저한테서 들은 거예요, 영상으로. 그리고 아마 저는 그게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당신 짐을 없애주는 거라고.”
“맞아요.” 하율이 작게 말했다.
“근데 저는 이 년 동안 없는 사람이었어요. 당신 옆에서.”
하율이 시선을 내렸다.
“그게 당신 짐을 없앤 건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다른 종류의 짐을 얹은 거였을 수도 있어요. 이 년이라는 시간만큼의.”
세하가 말하는 동안 하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부정인지 인정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반박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세하가 다시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 년 전에도 한 번 했으니까요.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거 알아요. 그냥 지금 제가 알게 된 것을, 당신한테 말하고 싶었어요.”
하율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눌려 있다가 처음으로 표면 가까이 올라온 것 같았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율이 물었다.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정직하게.
“모르겠어요. 괜찮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안 괜찮다고 말하면 정확하지 않아요. 지금은 그냥, 돌아오지 않아도 당신이 이 년 동안 기다렸다는 건 알아요. 그게 먼저인 것 같아서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리고 작게 웃었다. 슬프거나 따뜻하거나, 그 경계에 있는 얼굴이었다.
“세하 씨.”
“네.”
“구민재가 뭔가 말했죠. 돌아갈 수 없다고.”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유 알아요?” 하율이 물었다.
“아직요.”
하율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그것은 숨기려는 표정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결정하려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럼 저도 말해야 할 게 있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 씨한테 처음부터 말하지 않은 것.”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을 준비가 된 사람처럼.
“제가 아팠다고 했잖아요. 세하 씨가 그걸 알고 있었다고.”
“영상에서 봤어요.”
“지금도 아파요.”
하율이 말했다. 담담하게. 고통을 전시하는 것도, 숨기는 것도 아닌, 그냥 사실을 읽어내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이 년 전이랑 같은 병이에요. 나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아니고. 그냥 있어요. 계속.”
세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가만히 있었다.
“구민재가 말한 이유가 그거예요.” 하율이 이어갔다. “세하 씨가 기억을 되찾아도, 제 상황은 이 년 전이랑 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 입장에서는, 세하 씨가 또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거겠죠. 알면서 버텨야 하는 자리.”
세하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펼쳐봤다.
구민재의 말이 맞았다. 절반은. 이 년 전의 세하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 그것이었다면, 지금 다시 그 사실을 아는 세하도 같은 무게를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기억은 없어도 상황은 그대로라고 구민재는 말했다. 사실이었다.
그러나.
“왜 이제 말해요.” 세하가 물었다.
“세하 씨가 먼저 말했으니까요.” 하율이 말했다. “틀렸다고. 이 년 전 결정이.”
세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세하 씨한테 아무것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하율이 계속했다. 여전히 담담하게. “기억이 돌아오길 바라는 것도, 다시 그 자리로 와달라는 것도. 그냥 세하 씨가 알고 있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모른 채로 결정하지 않도록.”
세하는 하율을 봤다.
이 년 전의 자신이 그 사람 앞에서 일어서며 미안하다고 했을 때, 하율은 막지 않았다. 끝까지 보고 있었다.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으니까. 그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고 했다.
지금 이 사람도, 세하를 붙잡으려 하지 않고 있었다. 그냥 알려주고 있었다. 알고 선택하라고.
그 방식이, 세하는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불편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다.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람의 방식이라는 감각이 몸 어딘가에서 아주 조용히 울렸다.
기억이 아닌 것. 그러나 기억보다 먼저 있는 것.
세하는 입을 열었다.
“정아로 씨한테 연락이 왔어요.”
하율의 표정이 바뀌었다. 조금 더 긴장된 쪽으로.
“구민재 수석이 저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다고요. 오늘 안으로.”
“뭐라고 답할 거예요.”
“아직 결정 못 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구민재 수석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두 사람 사이에 제가 어떻게 놓여 있는지. 아직 전체가 안 보여요.”
“조심해요.” 하율이 말했다. 짧고 빠르게. “정아로는 세하 씨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닐 수 있어요. 레테 안에서 원하는 게 따로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은 알아요, 그게 뭔지.”
하율이 잠깐 멈췄다.
“추측이에요. 확인은 못 했어요.”
“말해줄 수 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짧게 계산됐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정아로는 비공식 삭제 파일 목록 전체를 원하는 것 같아요. 특정 한 사람의 것이 거기 있거든요. 레테 외부의 누군가한테 넘기려는 건지, 아니면 직접 쓰려는 건지는 몰라요. 하지만 세하 씨를 통로로 쓰려 한다면, 세하 씨 기술자 권한이 필요한 거예요.”
세하는 그 말을 천천히 정리했다.
비공식 삭제 파일 목록. 기술자 권한. 그리고 특정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누구예요.”
하율이 대답하기 직전이었다.
세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봤다. 구민재였다. 문자였다.
— 세하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오늘 퇴근 후 행적 확인이 필요해요. 내일 아침 전에 연락 줘요.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하율이 그것을 봤다.
“구민재예요?”
“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의 다른 소리들이 그 침묵을 채웠다. 커피 머신 소리, 낮은 음악, 누군가의 대화.
세하는 뒤집어 놓은 핸드폰을 봤다.
구민재는 오늘 세하가 영상을 다 본 것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 다음에 세하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싶어하고 있었다. 내일 아침 전이라는 시한이 붙어 있었다.
정아로는 구민재가 세하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어했다. 오늘 안으로라는 시한이 붙어 있었다.
두 개의 시한이 같은 밤 위에 놓여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그 한 사람이 누구예요.” 다시 물었다.
하율이 세하의 눈을 한동안 봤다. 그리고 말했다.
“구민재예요.”
세하는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자리를 바꾸는 느낌이 있었다. 퍼즐이 한 칸 맞춰지는 것과 비슷했지만, 그보다 더 무거웠다.
“구민재 수석도 레테에 기억을 지웠어요?”
“그게 아니라.” 하율이 말했다. “구민재가 지운 기억이 있어요. 다른 사람의.”
세하는 한 박자 늦게 그 말의 의미를 잡았다.
지하 2층 로컬 스토리지에는 비공식 삭제 파일들이 있었다. 수백 개의 암호화된 이름들. 각각 누군가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진 기억들. 그 중에 구민재의 이름이 붙은 파일이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구민재가, 누군가의 기억을 지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파일이 거기 있다는 것이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집었다. 뒤집어 놓았던 것을 다시 들었다. 구민재의 문자가 화면에 있었다.
내일 아침 전.
세하는 카페 천장을 잠깐 봤다. 낮은 천장이었다. 형광등이 아니라 따뜻한 노란빛이었다. 지하 2층 서버실과도, 레테 복도와도 다른 종류의 빛이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대답하기 전에 잠시 세하를 봤다.
“알아요.”
그리고 덧붙였다.
“세하 씨도 알던 사람이에요. 기억을 지우기 전에는.”
세하의 손이 멈췄다.
핸드폰 화면 위에서. 구민재의 문자 위에서.
카페 안의 소리들이 계속 흘렀다. 커피 머신, 낮은 음악, 누군가의 웃음소리. 세상은 그냥 굴러가고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은 피하지 않고 세하를 보고 있었다.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얼굴로.
“말해줘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카페 안의 소리들이 계속 흘렀다. 커피 머신, 낮은 음악, 누군가의 웃음소리. 세하는 그 모든 것을 듣고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도 듣지 않고 있었다. 귀가 하율의 입 쪽에만 열려 있었다.
하율이 말했다.
“최도현이에요.”
세하는 그 이름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어떤 장면도. 그냥 두 글자였다. 최도현. 아무런 무게도 없이 공기 속에 놓인 이름.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가슴 어딘가에서 아주 희미한 것이 건드려졌다는 것이었다.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고 형태가 없었다. 그러나 완전히 낯설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이 이름을 발음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근거 없는 감각.
세하는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에요.”
“세하 씨 친구예요.” 하율이 말했다. “이 년 전에는. 레테 입사 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이에요. 저도 알았고요.”
세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레테 입사 전. 삼 년 전보다 더 이전의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세하가 기억을 지운 것은 이 년 전이고, 지운 것은 하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최도현이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세하의 삶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의 기억을 구민재가 지웠다는 거예요.”
“네.”
“이유는요.”
하율이 커피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미 식은 커피였다. 온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손을 어딘가에 두어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도현 씨가 레테의 비공식 서비스를 알게 됐어요. 세하 씨를 통해서. 세하 씨가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하던 그 시기에, 도현 씨도 같이 있었거든요. 셋이서.”
셋이서.
세하는 그 단어를 머릿속에서 가만히 눌렀다. 영상 속에는 두 사람이었다. 세하와 하율. 그런데 셋이었다.
“영상에 없었어요.”
“찍은 사람이 도현 씨예요.”
세하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찍은 사람. 영상을 찍은 사람이 있었다. 세하와 하율이 그 방에 있을 때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잠깐 흔들렸던 것은, 그 사람의 손이 떨린 것이었다.
“세하 씨가 부탁했어요.” 하율이 계속했다. “기억을 지우러 가기 전에, 도현 씨한테요. 찍어달라고. 혹시 나중에 찾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자신이 왜 지우는지를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천천히 따라갔다.
자신이 기억을 지우기 전 경로를 누군가에게 알려뒀다고 하율이 말했었다. 그 누군가가 최도현이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세하가 처음 재생한 4초짜리 캡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작업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사람도.
“캡슐을 제 작업실에 가져다 놓은 게 최도현 씨예요.”
질문이 아니었다.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 씨가 세하 씨를 찾아왔어요. 몇 달 전에. 레테에 기억을 지운 사람이 세하 씨 말고 또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그 사람이 구민재라고.”
“구민재가 자신의 기억을 지운 게 아니라, 도현 씨의 기억을 지웠다는 거죠.”
“맞아요.”
세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논리적으로 정리하려 했다.
구민재는 이 년 전 세하의 기억 삭제를 도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또는 그 전후 어느 시점에, 최도현의 기억도 지웠다. 구민재가 직접 주도해서. 그리고 최도현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기억이 없는데 뭔가 있었다는 것을 감지하는 방식으로, 또는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도현 씨가 지금 어디 있어요.”
하율이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았다. 그러나 세하는 그 침묵이 특정한 종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방식을 고르는 것.
“지금은 레테 외부에 있어요. 안전한 곳이에요. 구민재가 찾기 어려운.”
“그게 정확한 대답이에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모르는 게 있으면 모른다고 해요.” 세하가 말했다. 딱딱하게가 아니라, 그냥 사실대로. “저는 절반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보다 불완전한 전체가 낫거든요.”
하율이 잠깐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확하게는, 도현 씨가 어디 있는지 제가 알아요. 하지만 도현 씨 쪽에서 세하 씨를 아직 만날 준비가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세하 씨가 기억이 없는 상태로 마주치는 게 도현 씨한테 쉬운 일이 아닐 수 있어서.”
세하는 그 말을 이해했다.
최도현 입장에서는, 세하는 기억이 없다. 함께 있었던 시간이 세하 쪽에만 없다. 그 비대칭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세하는 하율과 마주 앉으며 이미 조금은 알고 있었다.
“정아로가 원하는 게 최도현 씨 파일이에요?”
“아마도요. 구민재가 도현 씨의 어떤 기억을 지웠는지, 그 내용을 원하는 거겠죠. 레테 외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 파일은 구민재를 흔들 수 있는 레버가 될 수 있어요.”
“구민재가 숨기고 싶은 것이 그 파일 안에 있다.”
“그렇게 보고 있어요.”
세하는 핸드폰을 집었다. 뒤집어 놓았던 것을 다시 들었다. 구민재의 문자가 화면에 있었다.
내일 아침 전에 연락 줘요.
그 아래 정아로의 문자도 있었다.
오늘 안으로 연락해줄 수 있어요?
세하는 두 문자를 번갈아 읽었다. 두 개의 시한. 두 개의 요구.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하율이 말해준 것들.
세하가 알게 된 것들을 다시 정리했다. 구민재는 세하의 기억 삭제를 도왔다. 그리고 최도현의 기억도 지웠다. 강제로, 혹은 어떤 압력 아래에서. 정아로는 그 파일을 원한다. 하율은 정아로가 세하를 통로로 쓰려 한다고 했다. 기술자 권한이 필요하기 때문에.
세하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놓여 있는지를 봤다.
구민재와 정아로 사이. 레테 안과 밖의 경계. 기억이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의 사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세하의 기술자 권한이 있었다.
“저한테 부탁이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고개를 들었다.
“최도현 씨한테 연락해줄 수 있어요? 직접 만나고 싶다고. 제가 기억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요.”
“이유를요?”
“그 사람이 그 방에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카메라를 들고. 제가 부탁해서. 기억이 없는 쪽은 저지만,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은 도현 씨예요. 그 무게가 어떤 건지 저는 모르지만, 적어도 모른 채로 넘어가고 싶지는 않아요.”
하율이 세하를 한동안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전달할게요.” 하율이 말했다. “결정은 도현 씨가 해요.”
“알아요.”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 안의 소리들이 계속됐다. 아까와 같은 소리들이었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게 들렸다. 배경으로 들렸다. 방해가 아니라, 그냥 세상이 계속 있다는 표시.
세하가 핸드폰 화면을 다시 봤다.
구민재에게 답장을 써야 했다. 내일 아침 전이라는 시한이 있었다. 무슨 말을 써야 하는지 세하는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고 있었다.
이제 모른 척이 불가능한 것들이 있었다.
세하는 입력하기 시작했다.
수석님, 퇴근 후 개인 용무가 있었습니다. 내일 오전에 말씀드릴 수 있어요.
전송했다. 그리고 정아로의 문자로 이동했다. 잠깐 화면을 봤다가, 아직 쓰지 않고 닫았다.
정아로에게는 오늘 안으로 답하지 않기로 했다. 오늘 안으로 답해야 한다는 것이 정아로의 요구였지, 세하의 필요가 아니었다.
하율이 그것을 봤다.
“정아로한테는요?”
“아직이에요.” 세하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원하는 게 최도현 씨 파일이라면, 제 기술자 권한이 필요하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제가 그 파일을 열기 전에, 먼저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 해요. 정아로가 알려주기 전에.”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해요? 지하 2층에 다시 내려가는 거예요?”
“구민재가 실시간 알림을 켜두고 있어요. 그 방에 출입하면 바로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 방이 아닌 방법이 필요해요.”
하율이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레테 내부에 아는 사람 있어요? 서버 쪽에 접근할 수 있는.”
“없어요. 적어도 지금 제가 기억하는 범위에서는.”
세하는 그 말을 하면서 잠깐 멈췄다. 기억하는 범위에서는. 그 단서가 매번 따라붙었다. 이 년이 없다. 그 이 년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직 다 모른다.
“도현 씨가 알 수 있어요.” 하율이 조용히 말했다. “레테 내부 구조를, 도현 씨가 오래 조사했으니까요. 그 사람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모아둔 자료가 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였다.
최도현. 그 이름이 이제 단순한 두 글자가 아니었다. 그 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 기억이 지워진 사람. 그리고 지워지기 전에 무언가를 모아둔 사람.
세하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연락 기다릴게요.”
하율도 일어섰다. 두 사람은 잠깐 마주 섰다. 테이블 하나 사이의 거리였다.
“세하 씨.”
“네.”
“조심해요.” 하율이 말했다. 이번에는 구민재를 조심하라는 것인지, 정아로를 조심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 두 사람 사이를 걷는 세하 자신을 조심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어쩌면 전부였을 것이다.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카페를 나섰다. 계단을 올라가자 밤 공기가 닿았다. 서늘했다. 하늘에는 드론 항법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세하는 걸으면서 핸드폰 화면을 한 번 봤다.
구민재에게 보낸 문자는 읽혔다. 답장은 없었다.
정아로의 문자는 아직 열지 않은 채였다.
그리고 하율에게서 문자 하나가 와 있었다.
도현 씨한테 전달했어요. 답은 내일 알 것 같아요.
세하는 그 문자를 읽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내일이 어떤 하루가 될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구민재의 소회의실이 다시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정아로의 시한은 이미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세하가 기억을 지우던 날 카메라를 들고 그 방에 있었던 사람이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성수동의 밤이 천천히 깊어지고 있었다.
세하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특별히 뒤척인 것은 아니었다. 그냥 누워 있었다. 천장을 보면서. 드론 항법 신호등의 붉은빛과 초록빛이 교차하며 천장을 스쳐갔다. 예전에도 이 빛을 보며 잠들지 못한 밤이 있었다는 것을, 세하는 지금의 기억 안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 년이 없었다. 그 이 년 안에 몇 번이나 이랬을지 알 수 없었다.
최도현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서 굴렸다.
형태가 없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어떤 장면도. 그런데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해보면 혀의 어딘가에서 익숙한 것이 스쳤다. 기억이 아닌 것. 그렇지만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닌 것. 세하는 그 감각을 붙들려 할수록 더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두었다.
핸드폰을 집었다. 새벽 두 시 십칠 분이었다. 구민재에게 보낸 문자는 여전히 읽혔지만 답장이 없었다. 정아로의 문자는 아직 열지 않은 채로 있었다. 하율에게서는 어제 밤 이후 연락이 없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내일 아침 구민재가 소회의실로 부를 것이었다. 어제 퇴근 후 행적. 개인 용무라고 답했지만, 구민재는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었다. 실시간 알림을 켜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세하가 지하 2층 서버실에서 영상을 다 본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다음에 세하가 어디로 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얼마나 알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세하는 눈을 감았다. 정리했다.
구민재는 세하의 기억 삭제를 도왔다. 그것은 세하가 원했고, 구민재는 처리했다. 그 사실만 놓고 보면 구민재는 세하의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구민재는 최도현의 기억도 지웠다. 강제로. 그 이유가 무엇인지 세하는 아직 모른다. 구민재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이 그 파일 안에 있다고 하율은 말했다. 그렇다면 최도현의 기억에는 구민재에게 불리한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구민재는 말했다. 다 보고 나서도, 그 방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하율이 아직 아프다는 사실. 그것이 이유라고 했다. 그러나 세하는 그 말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았다. 구민재가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에, 최도현이 있었다. 세하가 기억을 지우던 그 시점에 셋이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또는 그 전후 어느 시점에, 구민재는 최도현의 기억을 지웠다.
세하가 기억을 지우기로 결정한 것과, 최도현의 기억이 지워진 것. 그 두 사건이 같은 시간대에 있었다.
우연인가.
세하는 눈을 떴다. 천장의 신호등 빛이 다시 스쳤다.
우연이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았다.
아침이 됐다. 세하는 샤워를 하고, 밥을 먹지 않고, 커피만 텀블러에 담아 집을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을 봤다. 하율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 도현 씨가 연락왔어요. 오늘 저녁에 볼 수 있대요. 장소는 제가 잡을게요. 구민재 면담 잘 넘기세요.
세하는 그 문자를 읽고 잠깐 눈을 감았다. 오늘 저녁. 그리고 그 전에 구민재가 있었다.
레테 빌딩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안내 데스크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이세하 기술자님, 구민재 수석님께서 먼저 6층 소회의실로 오시래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소회의실 문은 닫혀 있었다. 세하는 노크했다.
“들어와요.”
구민재가 먼저 와 있었다. 블라인드는 이미 내려져 있었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 대신 종이 몇 장이 놓여 있었다. 세하는 맞은편에 앉았다.
구민재는 한동안 세하를 보지 않았다. 창 쪽도 아니고, 종이 쪽도 아닌, 테이블의 어느 지점을 보고 있었다. 세하는 그 침묵을 먼저 깨지 않았다.
“어제 퇴근하고 하율 씨 만났죠.”
질문이 아니었다. 구민재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세하는 잠시 두 가지를 저울질했다. 부인하는 것과, 인정하는 것. 부인하면 구민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숨기는 셈이 됐다. 그러면 세하가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인정하면 적어도 이 자리에서 거짓이 쌓이지 않았다.
“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아무것도 읽히지 않았다. 온화함도, 피로함도, 어제 서버실에서 잠깐 보였던 균열도.
“무슨 얘기 들었어요.”
“최도현이라는 이름을 들었어요.”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온도가 변한 게 아닌데도, 세하는 그것을 피부로 알아챘다. 구민재가 아주 짧은 순간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아주 미세하게 접혔다가 펴졌다.
3년간 구민재를 봐왔다. 그 3년 동안 세하는 구민재가 멈추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하율 씨가 그 이름을 말했어요.”
“네.”
“그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이번에는 세하가 잠시 멈췄다. 구민재의 질문 방식이 달라져 있었다. 어젯밤처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확인이 아니었다. 진짜로 모르는 것을 묻는 사람의 말투였다.
그것이 세하를 더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구민재 수석님이 최도현 씨의 기억을 지웠다고 했어요.”
구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제로요.”
침묵이 길어졌다. 세하는 그 침묵이 부인인지, 인정인지, 아니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세하 씨.”
구민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처음 듣는 톤이었다.
“도현이가 레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있었어요. 비공식 서비스. 세하 씨를 통해서 알게 된 거였어요. 세하 씨가 기억을 지우겠다고 결정했을 때, 도현이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 과정을 전부 봤어요.”
세하는 듣고 있었다.
“그 이후에 도현이가 그 정보를 갖고 레테 외부와 접촉하려 했어요. 비공식 서비스를 외부에 폭로하려고요. 세하 씨 이름이 그 과정에 들어가게 돼 있었어요. 세하 씨가 기억을 지운 당사자로서.”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따라갔다.
“세하 씨는 이미 기억을 지운 상태였어요. 자신이 그 서비스를 이용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상태. 그런데 도현이가 그 이름을 끌어들이면, 세하 씨는 기억도 없이 연루되는 거예요.”
“그래서 막으려 했다는 거예요.”
“막아야 했어요.”
구민재가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말했다. 방어도, 변명도 아닌 것 같았다. 오래 혼자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사람의 말투였다.
“도현이 기억에서 레테 관련 부분만 지웠어요. 전부가 아니라. 폭로에 필요한 정보들, 세하 씨 이름이 들어가는 부분들. 그것만.”
“그게 강제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도현이는 동의하지 않았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블라인드 사이로 아침 빛이 가늘게 들어오고 있었다. 세하는 그 빛이 바닥 위에 놓이는 것을 시야 끝으로 보면서, 구민재의 말을 머릿속에서 천천히 펼쳐봤다.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웠다. 세하를 보호하려고.
그리고 구민재는 이것을 지금 세하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제는 말하지 않은 것을.
“왜 지금 말해요.”
“어제는 세하 씨가 아직 반쪽만 알고 있었으니까요.”
세하는 그 대답을 받아들이는 데 잠깐이 걸렸다.
“그리고.” 구민재가 종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아로가 움직이고 있어요. 도현이 파일을 원한다는 것, 저도 알고 있어요. 세하 씨한테 접근한 것도요. 그 사람이 그 파일을 가져가면, 도현이 기억에서 지워진 부분이 다시 세상에 나오는 거예요. 세하 씨 이름과 함께.”
세하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차가웠다.
구민재는 세하를 보호하려 했다. 이 년 전에도, 지금도. 그 방식이 최도현의 동의 없는 삭제였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구민재의 논리 안에서 그것은 더 큰 피해를 막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렇다면 정아로가 그 파일을 원하는 이유는, 구민재를 겨냥한 것인가. 아니면 세하를 겨냥한 것인가.
“수석님.”
“네.”
“최도현 씨가 폭로하려 했던 게 레테 비공식 서비스였다면, 그 서비스를 운영한 사람이 누구예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완전히 무너지는 것이 지나갔다. 아주 빠르게. 그러나 세하는 놓치지 않았다.
“지금 그걸 묻는 거예요?”
“네.”
침묵이 흘렀다. 밖에서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들렸다가 멀어졌다.
구민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놀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놀라움이 어딘가에서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감각이 있었다. 퍼즐의 마지막 칸이 맞춰지는 것과 비슷했다. 다 맞춰지고 나면 오히려 조용해지는 것.
구민재가 비공식 삭제 서비스의 운영자였다.
그는 세하의 기억 삭제를 도운 것이 아니라, 세하의 기억을 지운 사람이었다. 자신이 만든 서비스를 이용해서. 그리고 같은 서비스로, 최도현의 기억도 지웠다. 그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세하 씨가 자발적으로 원한 건 사실이에요.” 구민재가 말을 이었다. 서두르지 않고. “강요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세하 씨한테 그 선택지를 준 것도 저예요. 그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세하 씨가 레테에서 일하면서였으니까.”
세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돌아갈 수 없는 이유가 이거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가 기억을 되찾고, 하율 씨한테 돌아가고, 최도현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그 모든 것이 다시 이어지면. 저는 그 자리에서 서 있을 수 없어요.”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3년간 알아온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얼굴은 세하가 3년간 본 것과 달랐다. 온화함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온화함 아래에 있던 것이 처음으로 밖으로 나온 얼굴이었다.
피로함.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
세하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오늘 저녁에 최도현 씨를 만날 거예요.”
구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막을 거예요?” 세하가 물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블라인드 사이의 빛이 조금 더 들어와 있었다. 아침이 깊어지고 있었다.
“아니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판단도, 만류도. 그냥 한 사람이 한 가지를 내려놓는 소리였다.
세하는 소회의실 문을 열었다. 복도가 펼쳐졌다. 형광등 빛이 바닥 위에 고르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걸었다. 작업실 쪽이 아니라 엘리베이터 쪽으로.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러갈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저녁에 최도현을 만날 것이었다. 그 방에 카메라를 들고 있었던 사람. 기억이 지워진 사람. 그리고 지워지기 전에, 세하가 부탁해서 그 장면을 끝까지 지켜본 사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봤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문자였다.
— 이세하 씨. 저 최도현이에요. 오늘 저녁, 나올 수 있어요?
세하는 그 문자를 읽었다. 두 번 읽었다.
최도현. 두 글자. 형태 없는 이름.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 이름을 직접 보내온 사람이 있었다. 화면 너머에 있는, 실제 사람이.
세하는 답장을 입력했다.
네. 어디로 가면 돼요.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세하는 들어갔다.
장소는 하율이 정했다. 성수동에서 조금 벗어난 곳, 뚝섬유원지 방면의 작은 공원 입구였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었고, 늦은 저녁이라 사람이 거의 없었다. 세하는 약속 시간보다 오 분 일찍 도착했다.
벤치에 먼저 와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서른 살 안팎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체구는 보통이었고, 짙은 남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세하를 향해 고개를 드는 순간, 세하는 그 얼굴을 봤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굴을 보면 무언가가 다를 줄 알았다. 하율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또는 그 카페에서 원두 볶는 냄새를 맡았을 때처럼. 아주 작고 형태 없는 감각이라도 건드려질 줄 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남자가 일어섰다.
“이세하 씨.”
목소리는 낮고 조금 쉰 편이었다. 세하를 부르는 방식이 이상했다. 이름을 부르는데 어떤 높낮이도 없었다. 반갑다거나, 어색하다거나, 그 어느 쪽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그게 냉담하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세하는 알았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있어서 어느 하나도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최도현 씨.”
세하가 답했다. 두 사람은 잠깐 마주 섰다.
먼저 앉은 것은 도현이었다. 세하가 그 옆 벤치에 앉았다. 하율이 올 것인지 묻지 않았다. 문자로 장소만 알려줬을 뿐, 하율이 함께 온다는 말은 없었다.
둘이었다.
“기억은 없는 거죠.”
도현이 먼저 말했다. 질문인지 확인인지 경계가 없었다.
“없어요.”
“하율한테 들었어요. 영상 봤다고.”
“네.”
도현이 발 앞의 바닥을 봤다. 공원 바닥에 낙엽이 몇 장 붙어 있었다.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이미 눌려버린 것들이었다.
“찍어줬어요, 제가.”
“알아요.”
“세하 씨가 부탁했어요. 혹시 나중에 찾고 싶어질 수도 있다고. 왜 지웠는지를 기록으로 남겨달라고.” 도현이 잠깐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그날 손이 많이 떨렸어요. 그래서 화면이 흔들렸을 거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영상 속 장면을 떠올렸다. 화면이 잠깐 흔들렸던 것. 카메라를 들고 있던 사람의 손이 떨린 것이었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도현이 말했다. “세하 씨가 나가고 나서, 하율이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저는 카메라 들고 서 있었고. 끊어야 하는데 못 끊었어요.”
세하는 그 장면을 알고 있었다. 영상에서 봤다. 재생이 끝나지 않았는데 방이 어두워지도록, 카메라는 계속 돌아갔다. 하율이 혼자 남겨진 그 장면이 삼십 초쯤 이어지다가 끝났다.
“그 삼십 초가 도현 씨가 끊지 못한 거였군요.”
도현이 세하를 봤다. 처음으로 직접.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빠르게 지나갔다. 슬픔인지, 낯섦인지, 아니면 그 둘이 섞인 것인지 세하는 정확히 읽을 수 없었다.
“세하 씨, 저를 알아보지 못하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확인이 세하에게는 이상하게 무거웠다.
“맞아요.”
“그런데 왜 만나자고 했어요.”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정직하게 답해야 했다. 적당한 말이 아니라.
“당신이 그 방에 있었으니까요.” 세하가 말했다. “카메라를 들고. 제가 부탁했기 때문에. 그 무게가 어떤 건지 저는 기억이 없어서 모르지만, 그걸 모른 채로 넘어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세하는 잠깐 멈췄다.
“구민재 수석이 당신 기억을 지웠어요. 동의 없이. 저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도현의 표정이 달라졌다. 굳은 것이 아니었다. 오래 혼자 알고 있던 것을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들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어느 시점부터는요.” 도현이 말했다. “기억이 없는데 있었다는 감각이 남아 있어요. 기억은 지워져도 그 주변 맥락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으니까.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 그게 이 년 가까이 됐어요.”
“이 년.”
“구민재가 지운 건 레테 관련된 것들이었어요. 비공식 서비스를 알게 된 경위, 거기서 본 것들. 그리고 세하 씨 이름이 거기 들어가는 부분들.” 도현이 말했다. “하지만 세하 씨 자체가 지워진 건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상했어요. 세하 씨는 기억하는데, 세하 씨와 함께 알게 됐던 것들이 없었으니까.”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따라갔다.
사람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과 공유했던 특정 시간이 잘려 있었다. 그 경계가 만들어내는 이상함. 세하는 하율과 마주 앉았을 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기억이 없는데 낯설지 않은 것. 그 반대편에서 도현이 경험했던 것은, 기억이 있는데 그 안이 비어 있는 것이었다.
같은 공백이었다. 그러나 놓인 방향이 달랐다.
“정아로 씨가 당신 파일을 원한다고 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지하 2층 로컬 스토리지에 있는 것. 구민재가 지운 부분이 담긴 것.”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정아로가 저한테도 접근했어요. 몇 달 전에.”
세하는 그것이 예상 밖이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뭘 원했어요.”
“같은 거예요.” 도현이 말했다. “제 파일. 그걸 꺼내는 데 협력해달라고. 대신 레테 비공식 서비스를 외부에 공개해서 구민재를 끌어내리겠다고 했어요.”
“거절했어요?”
“했어요.” 도현이 짧게 말했다. “정아로가 원하는 게 구민재를 끌어내리는 게 아니에요. 그 파일 안에 들어 있는 다른 것을 원하는 거예요.”
세하는 도현을 봤다.
“다른 것이요.”
도현이 잠시 말이 없었다. 벤치 위에 올려놓은 두 손이 가만히 있었다. 세하는 그 침묵을 재촉하지 않았다. 도현이 말하는 방식을 고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테 비공식 삭제 서비스 의뢰인 목록이 있어요.” 도현이 말했다. “구민재가 처리한 것들 전부. 세하 씨처럼 자발적으로 온 사람도 있고, 저처럼 강제로 지워진 사람도 있어요. 그 목록에 특정 이름이 들어 있어요. 정아로가 원하는 건 그 이름이에요.”
“누구예요.”
도현이 세하를 봤다.
“레테 외부예요. 레테한테 기억을 삭제당한 사람인데,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정아로가 구민재한테 뭘 요구할 수 있는지가 달라지는 거예요.”
세하는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펼쳐봤다. 의뢰인 목록. 강제 삭제. 레테 외부의 누군가.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 구민재를 압박하려는 정아로.
구민재가 운영한 서비스의 범위가 세하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었다.
“그 목록에 접근하려면 제 기술자 권한이 필요한 거예요.”
“아마도요.” 도현이 말했다. “아니면 세하 씨를 통해서 다른 방법을 만들려는 거거나.”
공원 안을 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낙엽이 굴렀다. 멀리서 드론 하나가 저공으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세하는 생각했다. 구민재는 오늘 아침 소회의실에서 모든 것을 말했다. 자신이 비공식 서비스의 운영자라는 것을. 도현의 기억을 강제로 지웠다는 것을. 그리고 막지 않겠다고 했다. 세하가 도현을 만나는 것을.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더 멀리 내다보는 계산인지 세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도현 씨.”
“네.”
“그 파일, 직접 보고 싶어요? 당신 기억이 지워진 부분.”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지나갔다. 오래된 것. 이 년 가까이 쌓여온 것.
“보고 싶어요.” 도현이 말했다. 망설임이 없었다. “그런데 정아로한테 이용당하는 방식으로는 싫어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꺼낼게요.”
도현이 멈췄다.
“구민재가 모르는 방법으로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개입하기 전에. 당신 기억이니까, 당신이 먼저 봐야 해요.”
도현이 한동안 세하를 봤다. 세하는 그 시선이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기억이 없는 사람이 왜 이 일을 하려는가. 어떤 이유로.
“세하 씨가 부탁했잖아요.” 세하가 먼저 말했다. “이 년 전에. 기록을 남겨달라고. 혹시 나중에 찾고 싶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짧은 간격.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이 당신이에요.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당신 기억이 지워진 거예요. 제가 관계없는 게 아니에요.”
도현이 고개를 내렸다. 낙엽이 붙은 바닥을 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편한 침묵도 아니었다. 아직 이름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방법이 있어요?” 도현이 물었다.
“아직은요. 하지만 구민재가 실시간 알림을 켜둔 건 지하 2층 그 방뿐이에요. 서버 구조를 알면 다른 경로가 있을 수 있어요.”
“있어요.” 도현이 말했다. 짧고 또렷하게. “기억 지워지기 전에 조사해둔 게 있어요. 오래된 기술자 권한 중에 원격 백업 접속이 있었어요. 구민재도 모를 가능성이 높아요. 레테가 초창기에 만들어둔 거라, 현재 시스템 문서에는 없거든요.”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여전히 거기 있었다.
“구체적인 건 하율도 함께 있는 자리에서 얘기해요.” 세하가 말했다. “셋이서.”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달라졌다. 굳어 있던 것이 한 층 얇아지는 것 같은.
“세하 씨.”
“네.”
“그날.” 도현이 말했다. 천천히. “세하 씨가 그 방에서 나가고 나서, 하율이 한참 있다가 저한테 말했어요. 잘 보내줬다고. 세하 씨한테 하고 싶었던 말을 못 했다고.”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는 그게 뭔지 물어보지 않았어요. 물어볼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아서.” 도현이 말했다. “그리고 그 기억도 지워졌어요. 하율이 그 말을 했다는 것만 남고, 그 앞뒤가 다.”
세하는 도현을 봤다.
이 년 전, 세 사람이 같은 방에 있었다. 세하는 나갔고, 하율은 남았고, 도현은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지워졌거나 비어 있었다.
그 공백들이 지금 이 벤치 위에 함께 놓여 있었다.
세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봤다. 하율이었다.
― 둘이서 잘 얘기하고 있어요?
세하는 잠깐 화면을 봤다. 그리고 입력했다.
― 합류해요. 셋이 해야 할 얘기가 있어요.
전송했다. 도현이 옆에서 그것을 보지 않았지만, 세하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었다.
“오고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하율을 기다렸다. 공원의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했다. 세하는 그 빛이 내려앉는 것을 보면서, 오늘 아침 구민재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저는 그 자리에서 서 있을 수 없어요.
그 말의 무게를 세하는 아직 다 알지 못했다. 구민재가 말한 것이 두려움인지, 죄책감인지, 아니면 그 두 가지가 오래 뒤섞여 더 이상 구분이 되지 않는 무언가인지.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구민재가 막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오늘 밤 이 세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달려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공원 입구 쪽에서. 세하는 그쪽을 봤다.
하율이 걸어오고 있었다.
눈 아래 그늘이 짙은 얼굴. 그러나 걷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세하와 도현이 앉아 있는 벤치를 보면서, 무언가를 잠깐 확인하듯 멈췄다가 다시 걸어왔다.
도현이 하율을 봤다. 하율이 도현을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이 년이 들어 있었다.
하율이 벤치 옆에 섰다. 앉지 않고.
“셋이 해야 할 얘기가 있다고 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네.”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움직이기 전에, 우리가 먼저 움직여야 해요. 도현 씨 파일. 구민재가 모르는 경로로 꺼낼 수 있어요. 도현 씨가 아는 방법이 있고, 제 기술자 권한이 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물었다. 확실해요? 라고.
세하는 대답했다. 말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하율이 천천히 벤치 옆에 앉았다. 도현과 세하 사이에. 세 사람이 같은 방향을 보게 되는 자리였다.
이 년 전 그 방에서와는 달랐다. 그때는 세하가 나갔다. 그러나 지금은 셋이 여기 있었다.
세하는 입을 열었다.
“방법 설명해줘요, 도현 씨.”
도현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목소리는 낮고 일정했다. 감정을 실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래 혼자 정리해온 것을 꺼내는 방식이었다. 세하는 들으면서 머릿속에 구조를 그렸다. 하율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가끔 도현을 봤다가 세하를 봤다가 했지만, 끼어들지 않았다.
레테가 처음 기억 추출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시스템은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다. 캡슐에서 데이터를 추출해 서버에 업로드하는 것이 전부였고, 보안 체계도 지금처럼 정교하지 않았다. 그 시절 개발 과정에서 기술자들이 원격으로 서버 백업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접속 경로가 만들어졌다. 물리적으로 서버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기술자 ID와 특정 코드 조합으로 백업 스냅샷에 접근할 수 있었다. 보안 업데이트가 반복되면서 그 경로는 현재 문서에서 삭제됐다. 그러나 경로 자체가 막힌 것은 아니었다.
“레테 초창기 개발팀이 남긴 거예요.” 도현이 말했다. “구민재가 지금 시스템을 설계할 때 이 경로를 알았는지 모르겠어요. 알았다면 막았을 테니, 아마 모를 거예요.”
“그 접속 코드를 어떻게 알아요.” 세하가 물었다.
“레테 초창기 기술자 중 한 명을 찾아갔어요. 지금은 레테를 나온 사람이에요. 직접 만나서 들었고, 그 사람도 이 경로가 아직 살아 있는지 몰랐어요. 제가 테스트했을 때 됐어요. 한 번만.”
“한 번만?”
“두 번째 접속 시도에서 시스템이 이상 징후를 감지할 수 있어요. 그게 구민재한테 올라가는 알림인지는 확인 못 했어요. 그래서 테스트 한 번 하고 멈췄어요.”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한 번의 기회. 실시간 알림이 뜨기 전에 파일을 찾고, 꺼내고, 나와야 한다.
“백업 스냅샷에 지하 2층 로컬 스토리지 파일도 포함돼요?”
“포함돼야 해요. 백업이 전체 서버 대상이라면. 근데 비공식 로컬 스토리지가 백업 범위에 들어가 있는지는 직접 들어가봐야 알아요.”
세하는 그 조건들을 하나씩 눌러봤다. 불확실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백업에 그 파일이 있는지. 접속이 한 번에 성공할지. 그리고 그 접속이 구민재에게 감지되지 않을지.
불확실한 것들을 안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접속하는 건 제가 해요.” 세하가 말했다. “기술자 ID가 필요하니까. 코드는 도현 씨가 알려줘요.”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요.” 하율이 처음으로 말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빠를수록 좋겠죠. 정아로가 다음에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까.”
“내일이요.” 세하가 말했다. “레테 안에서 하는 게 아니에요. 원격이면 밖에서도 되는 거죠.”
도현이 세하를 봤다. “이론적으로는요. 근데 레테 외부 네트워크에서 시도하면 추적 가능성이 있어요. 레테 내부 IP에서 접속하는 게 더 자연스러울 수 있어요.”
“그럼 건물 안에서.”
“작업실 말고 다른 곳이면요. 카메라가 없는 구역.”
세하는 레테 6층의 구조를 머릿속에서 펼쳐봤다. 작업실, 소회의실, 복도, 그리고 6층 끝의 직원 전용 휴게 공간. 카메라가 없는 곳. 정아로가 처음 말을 걸었던 자리였다.
“내일 점심시간에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 수석 점심 일정 알아요?”
“외부 미팅 있는 날이 있어요.” 하율이 말했다. “레테 외부 파트너사랑 격주 화요일에.”
“내일이 화요일이에요.”
세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세하는 그것이 동의라는 것을 알았다. 말로 하지 않는 종류의 것.
하율이 입을 열었다. “파일을 꺼내면 어떻게 할 거예요.”
“도현 씨가 먼저 봐요.” 세하가 말했다. 도현을 봤다. “당신 기억이니까.”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눌려 있다가 아주 조금 올라오는 것 같았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그리고 그 안에 의뢰인 목록이 있으면.” 세하가 이어갔다. “정아로한테 넘기지 않아요. 그 목록에 담긴 사람들은 강제 삭제당한 사람들이에요. 그 기억을 다음에 어떻게 할지는, 목록이 뭔지 본 다음에 판단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잠깐이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확인되는 것 같았다.
“구민재는요.” 하율이 물었다. “알게 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구민재가 오늘 아침 소회의실에서 말한 것들. 막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파일을 꺼낸다는 것을 알면, 그 말이 그대로일지 알 수 없었다.
“모르게 할 거예요, 내일은.” 세하가 말했다. “그 다음은 그 다음에 생각해요.”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이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몇 번 두드리더니 세하를 봤다. “코드 보내줄게요. 접속 순서도요. 받으면 외우고 삭제해요. 기록 남기지 않는 게 나으니까.”
“알겠어요.”
세하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화면을 봤다. 숫자와 문자가 섞인 코드, 그리고 짧은 접속 순서. 세하는 그것을 한 번 읽고, 다시 읽었다. 구조는 단순했다. 기술자 ID로 백업 서버에 진입하고, 코드로 스냅샷 레이어를 열고, 로컬 스토리지 경로를 수동으로 입력한다. 레테 공식 시스템과 달리 인터페이스가 없었다. 커맨드 입력 방식이었다. 기술자라면 익숙한 구조였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렸다. 도현을 봤다.
“한 가지만요.” 세하가 말했다. “접속이 실패하거나, 파일이 없거나, 아니면 중간에 감지되거나. 그 경우에도 이 방법을 정아로한테 넘기지 않아요.”
도현이 잠시 세하를 봤다.
“넘기면 정아로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는 거예요.” 세하가 이어갔다. “그렇게 되면 그 목록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기억이 어떻게 쓰일지 선택할 수 없어요. 다시 강제가 되는 거예요. 다른 방향으로.”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이 없었다.
하율이 조용히 말했다. “알겠어요.”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벤치 위로 내려앉아 있었다. 먼 곳에서 드론 하나가 저공으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가 사라졌다.
세하는 핸드폰 화면에서 코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그리고 삭제했다. 머릿속에 남은 것은 충분했다. 기술자로 삼 년을 일한 손이, 내일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도현이 말했다.
“세하 씨.”
세하가 도현을 봤다.
“그날.” 도현이 말했다. 천천히. “카메라 끊지 못했다고 했잖아요.”
“네.”
“그게.” 도현이 잠깐 멈췄다. “세하 씨가 나가고 나서 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저는 하율 옆에 앉았어요. 카메라를 내려놓고. 그 부분은 찍히지 않았어요. 카메라를 껐으니까.”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영상에서 보지 못한 삼십 초 이후. 카메라가 꺼진 다음에도 도현은 거기 있었다.
“말해줘서 고마워요.” 세하가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한 것 같았다.
세하는 일어섰다. 하율도 일어섰다. 도현은 잠시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 사람이 벤치에서 나란히 섰다. 같은 방향을 보게 되는 자리가 아니었다. 각자 조금씩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있었다.
도현이 먼저 걸었다. 공원 출구 쪽이 아닌, 안쪽 방향이었다. 잠시 걷다가 멈추지 않고 사라졌다.
세하와 하율이 남았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내일 점심, 잘 될 거예요.”
“모르죠.” 세하가 말했다. 거짓 확신을 말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하율이 말했다. “세하 씨가 하는 거니까.”
세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몰랐다. 그냥 봤다. 하율의 얼굴을. 눈 아래 그늘이 짙은 얼굴을. 이 년을 기다린 사람의 얼굴을.
“아직 아파요?” 세하가 물었다. 우회 없이.
하율이 잠깐 멈췄다. “아직요.”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하게 움직였다.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읽지 않았다. 읽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읽는 것이 지금 해야 할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없다. 그 사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세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공원 출구 쪽으로 걸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멈추지 않고 화면을 봤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문자였다.
정아로였다.
― 이세하 씨, 어젯밤에 답 안 줬네요. 오늘 구민재 수석 만난 거 알아요. 무슨 얘기 나눴는지, 내일 오전까지예요. 그리고 한 가지 더. 오늘 저녁 뚝섬 쪽에서 누구 만났는지도 알고 있어요.
세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문자를 읽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정아로가 보고 있었다.
공원 출구에서 밤거리가 펼쳐졌다. 드론 항법 신호등이 하늘 위에서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내일 점심시간까지 남은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 정아로가 먼저 움직일 수도 있었다.
세하는 걸음을 조금 빠르게 했다.
세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밤거리를 걸으면서 정아로의 문자를 다시 머릿속에서 읽었다. 오늘 저녁 뚝섬 쪽에서 누구 만났는지도 알고 있어요. 그 문장이 무겁게 남았다. 공원 입구까지 따라왔거나, 아니면 세하나 도현이나 하율 중 누군가의 동선을 파악하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쪽이든, 정아로가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있었다.
내일 오전까지라고 했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정아로가 오늘 저녁 뚝섬 쪽 알고 있다고 했어요. 도현 씨한테도 알려요.
전송했다. 그리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 세하는 정아로에게 뭔가를 줘야 하는지 생각했다. 일부만. 구민재가 세하에게 말한 것 중에서, 정아로가 이미 알 만한 것들. 새로운 정보가 아니라 확인 정도에 해당하는 것. 그것을 흘리면 정아로는 만족할까, 아니면 더 조여올까.
아마 더 조여올 것이었다.
정아로는 도현의 파일을 원한다. 그 파일 안의 목록을 원한다. 세하가 아는 것을 물어보는 것은, 그 목표를 향해 세하를 얼마나 더 당길 수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줄수록 더 요구하는 구조였다.
세하는 오늘 밤 정아로에게 답하지 않기로 했다. 어제처럼.
다만 이번에는 이유가 달랐다. 내일 점심, 접속이 성공하면 정아로가 움직이기 전에 파일이 이미 꺼내진 것이었다. 그 다음에는 정아로에게 줄 것도, 정아로가 빼앗아갈 것도 없었다.
성공한다면.
다음 날 아침 레테에 들어서는 순간, 세하는 평소와 같은 속도로 걸었다. 안내 데스크를 지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기술자 작업실에 들어갔다. 자리에 앉아 장비를 켰다. 캡슐 대기 목록을 확인하는 척 화면을 열었다. 손은 고요했다.
구민재는 오전에 복도에서 세하와 마주쳤다. 눈이 잠깐 맞았다. 구민재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도 끄덕였다. 그게 전부였다. 구민재는 자신의 사무실 쪽으로 걸어갔고, 세하는 작업실로 돌아왔다.
오전 내내 세하는 일을 했다. 실제로. 의뢰 캡슐 두 개를 처리했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는 동안 손이 멈추는 것이 싫었다. 기술자로서 삼 년간 훈련된 것이었다. 감정이 일어도 손이 하는 일은 계속됐다.
열두 시 십 분, 구민재가 외투를 들고 작업실 앞 복도를 지나갔다. 세하는 그것을 시야 끝으로 확인했다. 외부 미팅. 격주 화요일.
세하는 오 분을 더 기다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6층 끝 직원 전용 휴게 공간은 점심시간에 사람이 드물었다. 대부분은 식당이나 외부로 나갔다. 소파 두 개와 낮은 테이블이 있고, 한쪽 벽에 창문이 있었다. 카메라가 없는 곳이었다. 정아로가 처음 세하에게 말을 걸었던 자리.
세하는 소파에 앉았다. 노트북이 아니라 작업용 태블릿을 들고 왔다. 레테 기술자 전원에게 지급된 것이었다. 내부 시스템 접속 권한이 기술자 ID와 연동되어 있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도현이 보낸 코드와 접속 순서를 기억에서 꺼냈다. 삭제하기 전에 두 번 읽었던 것. 구조는 단순했다. 손이 어디로 움직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태블릿 화면을 열었다. 기술자 ID로 로그인. 공식 작업 인터페이스가 열렸다. 세하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커맨드 입력 창을 불러왔다. 기술자라면 쓸 수 있는 창이었다. 일상적인 진단 명령어를 쓰는 곳이었다.
세하는 입력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동안 세하는 숨을 고르게 유지했다. 타이핑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오타를 내면 안 됐다. 코드 한 자리가 달라지면 접속 자체가 실패할 수 있었다.
엔터.
화면이 잠깐 멈췄다.
로딩 커서가 돌았다. 일 초. 이 초. 세하는 그 시간을 세지 않으려 했다. 세면 더 길어졌다.
화면이 바뀌었다.
텍스트 기반의 새 레이어였다. 백업 서버 접속 성공. 스냅샷 목록이 나열됐다. 날짜 순이었다. 세하는 스크롤하지 않았다. 다음 코드를 입력했다. 로컬 스토리지 경로를 수동으로 지정하는 명령어.
엔터.
로딩.
디렉터리가 열렸다. 파일 목록. 암호화된 이름들. 숫자와 문자의 조합. 지하 2층 서버실에서 봤던 것과 같은 목록이었다.
있었다.
세하는 검색어를 입력했다. 도현의 이름이 아니었다. 도현이 알려준 파일 태그였다. 특정 날짜와 처리 코드의 조합.
결과가 하나 나왔다.
세하는 그 파일명을 봤다. 그리고 그 옆에 붙은 다른 태그를 봤다. 파일 하나가 아니었다. 하위 항목이 있었다. 도현의 기억 파일과, 그것과 같은 날짜로 묶인 다른 항목.
의뢰인 처리 로그였다. 날짜별로 묶인 것. 그 날짜에 처리된 건이 도현 하나가 아니었다.
세하는 하위 항목을 펼쳤다.
이름들이 나왔다. 암호화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내부 처리 로그라서 그런지, 실명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다섯 개. 세하는 그 이름들을 위에서 아래로 읽었다.
첫 번째. 낯선 이름.
두 번째. 낯선 이름.
세 번째.
세하는 멈췄다.
세 번째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기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화면에서 보는 순간, 몸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건드려졌다. 형태 없는 것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선명했다. 이름이 혀에 걸리는 감각 같은 것.
세하는 그 이름 옆의 처리 날짜를 봤다.
이 년 전이었다. 세하가 기억을 지운 것과 같은 달이었다.
그리고 처리 유형 코드가 세하 자신의 것과 달랐다. 자발적 의뢰가 아니었다. 강제 삭제 코드였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세하는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파일 목록 전체를 캡처하는 명령어를 입력했다. 작업 기기 내부 임시 저장소. 네트워크와 연결되지 않는 곳. 엔터.
저장됨.
세하는 커맨드 창을 닫았다. 공식 작업 인터페이스만 화면에 남겼다. 태블릿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문 앞에서 멈췄다.
정아로였다.
검은 재킷, 단정하게 묶은 머리.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세하를 보는 눈이 평소와 달랐다. 탐문하는 눈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눈이었다.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정아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세하는 태블릿 화면이 자신 쪽을 향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다. 자연스럽게.
“점심 안 먹어요?” 세하가 물었다.
“먹었어요.” 정아로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어젯밤에 답 안 줬네요.”
“오늘 오전까지라고 했잖아요.”
“오전이 다 됐어요.”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 하면서도, 뭔가에 쫓기는 것이 정아로의 눈 안에 있었다. 시한이 있는 사람의 눈. 세하 쪽에서 오는 압박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것.
“구민재 수석이 어제 뭐라고 했는지 물었잖아요.”
“네.”
“비공식 서비스를 자기가 운영했다고 했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그것만이에요?”
“최도현 씨 기억을 강제로 지웠다는 것도요.”
“왜 말했을까요.” 정아로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하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혼자 생각하는 것 같았다. “자기 입으로.”
“글쎄요.”
“세하 씨.”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지하 2층 파일. 저한테 꺼내줄 수 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물컵을 찾는 척하면서. 없었다. 그냥 버텼다.
“왜 저한테 부탁해요.”
“기술자 권한이 필요하니까요.”
“저 말고 다른 기술자도 있어요.”
“세하 씨가 이미 그 방에 들어간 사람이잖아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리고 세하 씨는 그 파일에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있어요. 구민재가 한 일을 세하 씨도 알아야 할 이유가 있고요.”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논리는 맞았다. 그러나 논리가 맞다는 것이 동기가 맞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파일을 꺼내면 어떻게 할 거예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한 일을 외부에 알릴 거예요. 레테가 비공식으로 기억을 조작했다는 것. 증거로요.”
“의뢰인 목록도 포함해서요?”
정아로가 잠깐 멈췄다.
세하는 그 멈춤을 놓치지 않았다. 짧았지만 충분했다.
“목록은 증거에 필요한 부분만요.”
“그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동의해요?”
“그 사람들은 피해자예요.”
“피해자라도 본인 기억이 어떻게 쓰이는지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계산됐다. 세하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세하 씨, 구민재 편이에요?”
“아니에요.”
“그럼 왜요.”
세하는 대답하기 전에 잠깐 정아로를 봤다. 쫓기는 눈. 시한이 있는 사람. 그리고 세하를 설득하려는 것이 아니라 밀어붙이려는 것.
“정아로 씨가 원하는 게 구민재를 끌어내리는 것만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그 목록에 특정 이름이 있어요. 그 이름을 원하는 거잖아요.”
정아로의 표정이 처음으로 달라졌다. 굳은 것이 아니었다. 준비되지 않은 방향에서 말이 들어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이름이 누구예요.” 세하가 이어갔다.
정아로가 잠시 세하를 봤다. 그 침묵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는 것 같았다.
“레테 외부 사람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낮게. “구민재한테 기억을 삭제당한 사람인데, 본인은 몰라요. 그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서 레테 전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단순한 비공식 서비스 폭로가 아니라.”
“왜 그 사람이어야 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리고 처음으로 잠깐 시선을 내렸다.
“그 사람이 제 사람이에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아로가 여기까지 말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동기가 불분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지금 가장 분명한 이유를 말하고 있었다.
구민재가 강제로 기억을 삭제한 사람들 중에, 정아로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 정아로 자신의 사람이.
“그 사람한테 알리려고요.” 세하가 물었다.
“알려야죠.”
“알리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할지 알아요?”
“몰라요.” 정아로가 말했다. 짧게. “그래도요.”
세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 두 글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을 알았다. 이 년 전의 자신이 하율 앞에서 말했던 것과 닮아 있었다. 이러면 안 되니까. 그런데 해야 해. 알면서도 하는 것.
세하는 눈을 떴다.
태블릿이 무릎 위에 있었다. 임시 저장소에 파일이 들어 있었다. 방금 꺼낸 것. 도현의 것, 그리고 목록 전체.
“파일.”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이미 꺼냈어요.”
정아로가 멈췄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근데.” 세하가 계속했다. “드리기 전에,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직원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는 세하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것이, 지금 이 방 안에서 어느 쪽으로 기울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채였다.
복도 발소리가 가까워지다가 멀어졌다.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소리였다.
정아로는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재정렬되는 것이 느껴졌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말이 들어온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나 무너지는 눈은 아니었다. 오래 이 일을 해온 사람의 눈이었다.
“이미 꺼냈다고요.”
확인하는 말이었다.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민재한테 알림 가지 않고요?”
“다른 경로로 접속했어요.”
정아로가 잠시 세하를 봤다. 그 침묵 안에서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이 느껴졌다. 세하가 어디서 그 방법을 알았는지, 누가 알려줬는지. 그러나 그 질문을 꺼내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조건이 뭐예요.”
세하는 태블릿을 무릎 위에서 테이블 위로 옮겼다. 화면은 꺼진 채였다.
“목록 전체를 드릴 수 없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정아로 씨가 찾는 이름. 그 이름만 확인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알리는 것도, 정아로 씨가 직접 해요. 제가 개입하지 않아요.”
“목록 전체가 필요해요.”
“왜요.”
정아로가 잠깐 멈췄다.
“구민재를 끌어내리려면 피해자가 한 명으로는 부족해요. 규모가 있어야 해요. 그래야 레테 전체가 흔들려요.”
“그 목록에 있는 사람들이 피해자가 되는 걸 원하는지 모르잖아요.” 세하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기억을 지운 사람들이에요. 원해서요. 그 사람들 이름이 외부에 나가는 건 다른 문제예요.”
“강제 삭제된 사람들만 추리면 돼요.”
“누가 추려요. 정아로 씨가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 목록을 제가 드리면, 그 다음에 어떻게 쓰이는지 저는 알 수 없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 씨가 연결된 외부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쪽에서 그 이름들을 어떻게 다룰지도 모르고.”
“구민재가 한 일을 덮어두는 게 낫다는 거예요?”
“그게 아니에요.”
세하는 잠시 말을 고랐다. 정직하게 말해야 했다. 적당한 말이 아니라.
“구민재가 한 일은 잘못됐어요. 강제 삭제는 잘못됐어요. 그걸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그것을 바로잡는 방법이, 그 사람들 기억을 또 다시 동의 없이 꺼내서 쓰는 거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방식이 같으면, 목적이 달라도 같은 일이에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정아로가 시선을 테이블 위로 내렸다.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계산이 아닌 것이 지나갔다. 무엇인지 정확히 읽을 수 없었지만, 피로함과 비슷한 것이었다. 오래 이 일을 해온 사람의 피로함.
“세하 씨.”
“네.”
“그 사람이 기억을 지워야 했던 건, 저 때문이었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듣고 있었다.
“제가 레테에 들어온 것도 그래서예요. 그 사람이 뭘 잃었는지 확인하려고. 그리고 구민재가 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알아요?”
“그 사람이 알면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저와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구민재가 레테를 지키려면 그 연결을 끊어야 했을 거예요.”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천천히 따라갔다. 정아로가 레테 외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아로와 가까운 사람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구민재는 그 연결이 레테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 사람의 기억을 지웠다.
그렇다면 정아로는 내부 고발을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 사람을 되찾으려는 것.
“그 사람이 지금 어떤 상태예요.” 세하가 물었다.
“그냥 살고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기억이 지워진 것도 모르고. 저도 모르고. 그 전에 알고 있던 것들이 사라진 채로.”
세하는 그 문장을 들으면서 잠깐 눈을 감았다.
모르고 사는 것.
기억이 없는데 없다는 것도 모르는 것.
이 년 전의 자신이 그랬다. 지금도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하는 적어도 공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공백을 찾아가고 있었다. 정아로가 말하는 사람은 공백 자체를 모른 채 살고 있었다.
눈을 떴다.
“그 이름만이에요.” 세하가 말했다. “목록 전체는 안 돼요. 그리고 그 사람한테 알리는 방법은 정아로 씨가 결정해요. 저는 관여하지 않아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게 조건이에요?”
“두 가지 더 있어요.”
정아로가 기다렸다.
“최도현 씨 파일은 도현 씨가 먼저 봐요. 그다음에 도현 씨가 결정해요, 그 기억을 어떻게 할지. 정아로 씨가 관여하지 않아요.”
정아로의 표정이 미세하게 달라졌다. 그러나 반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것이 세 번째였다. 앞의 두 가지보다 더 불확실한 것이었다.
“구민재가 한 일을 어떻게 할지, 그건 목록을 본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지금 결정하지 않아요.”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정아로는 세하를 한동안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당겨지다가,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세하 씨.”
“네.”
“구민재가 세하 씨한테 왜 말했을까요. 자기가 했다고. 어제 아침에.”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잠깐이 걸렸다.
“저도 생각했어요.”
“세하 씨가 영상을 다 봤다는 걸 알고, 하율을 만났을 거라는 걸 알고. 그래도 굳이 자기 입으로.” 정아로가 말했다. “그게 자백이 아니라 다른 것일 수 있어요. 세하 씨를 자기 편에 두려는 것일 수도 있어요. 말해줬다는 것으로.”
세하는 그 말의 방향을 알았다.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그래서 지금 바로 결정하지 않는 거예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오래.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 받을게요.”
세하는 태블릿 화면을 켰다. 임시 저장소에서 파일 목록을 불러왔다. 이름들이 나열됐다. 세하는 스크롤해서 세 번째 이름 앞에서 멈췄다.
그 이름을 정아로 쪽으로 돌렸다.
정아로가 화면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계산이 아니었다. 긴 시간 동안 찾고 있던 것을 발견했을 때의 눈이었다. 세하가 삼 년간 수백 개의 기억 캡슐을 다루며 봐온 얼굴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미 알고 있는 종류의 표정.
정아로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하는 태블릿 화면을 다시 자기 쪽으로 돌렸다.
“확인했어요?”
“네.”
정아로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그 감정은 정아로의 것이었다.
복도에서 다시 발소리가 들렸다. 점심시간이 끝난 것이었다. 세하는 태블릿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현 씨 파일은 오늘 저녁에 전달할게요.” 세하가 말했다. “직접요.”
“세하 씨.”
세하가 정아로를 봤다.
“감사해요.”
세하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 쪽으로 걸었다.
복도로 나오자 형광등 빛이 내려앉았다. 익숙한 빛이었다. 작업실 쪽으로 걸으면서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됐어요. 오늘 저녁에 도현 씨 파일 전달할 수 있어요. 셋이 다시 만나야 해요.
전송했다.
그리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
태블릿 안에 파일이 있었다. 도현의 기억. 그리고 목록. 정아로에게 하나의 이름을 확인해줬지만, 목록 안에 있는 다른 이름들은 세하의 손 안에 있었다. 그 안에 구민재에 대한 것들이 있었다. 어디까지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 세하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구민재는 오늘 오후 돌아올 것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율이었다.
― 잘 됐어요. 장소는 제가 잡을게요. 그리고 세하 씨—
한 줄이 더 왔다.
― 구민재가 지금 외부 미팅 자리에서 나왔어요. 예정보다 일찍. 도현 씨한테 연락이 갔대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다시 복도를 봤다.
엘리베이터 쪽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세하는 복도 끝에 서 있었다. 핸드폰 화면이 아직 켜진 채였다. 하율의 문자가 거기 있었다.
― 구민재가 지금 외부 미팅 자리에서 나왔어요. 예정보다 일찍.
세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걸음을 시작했다. 작업실 쪽으로. 빠르지 않게. 평소의 속도로.
복도 중간쯤에서 구민재와 마주쳤다.
외투를 아직 벗지 않은 채였다. 세하를 보는 순간, 구민재가 걸음을 멈췄다. 세하도 멈췄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복도 너비 절반쯤이었다. 형광등 빛이 그 사이에 고르게 깔려 있었다.
구민재의 눈이 세하를 봤다. 그리고 세하의 손을 봤다. 태블릿이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구민재는 거기서 시선을 오래 두지 않았다. 다시 세하의 얼굴로 올라왔다.
"점심 먹었어요?"
평소의 목소리였다. 온화하고, 낮고, 간격이 일정한 목소리. 세하는 그 목소리가 이 년 전에도 똑같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도 같았다. 그것이 편안함이 아니라 이질감으로 느껴지는 것은, 어제 소회의실에서 그 목소리 아래에 있던 것을 봤기 때문이었다.
"안 먹었어요."
"많이 바빴어요?"
"좀요."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를 지나쳐 걸을 것인가, 싶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구민재가 움직이지 않았다.
"세하 씨."
"네."
"오늘 점심시간에 휴게 공간 있었죠."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표정을 바꾸지 않으면서.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훈련된 것이었다. 감정이 일어도 얼굴이 먼저 반응하지 않도록.
"네."
"정아로 씨랑요."
확인이었다. 질문의 형식을 빌렸지만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세하는 부인하지 않았다.
"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세하는 그것이 무엇을 향해 기울지 알 수 없었다.
"어제 막지 않겠다고 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알아요."
"지금도요."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그 말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피로함인지, 계산인지, 아니면 어제 소회의실에서 내려놓은 것을 오늘도 들지 않겠다는 것인지.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요."
세하가 말했다.
"네."
"오늘 미팅을 일찍 끊고 온 건 왜예요."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이 짧았다. 그러나 이 년 전 서버실에서 처음으로 멈추는 것을 봤을 때와 같은 종류였다. 준비하지 않은 방향에서 말이 들어온 사람의 멈춤.
"도현이한테 연락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나자고요."
"왜요."
"할 말이 있어서요."
"어떤 말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완전히 정돈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세하는 삼 년간 구민재를 봐왔다. 그 삼 년 동안 구민재가 정돈되지 않은 것을 드러낸 적은 어제 소회의실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지금 또 달랐다.
"도현이가 저한테 올 이유가 없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변명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가 먼저 가야죠."
세하는 그 말의 무게를 잠시 붙들었다.
"도현 씨가 응했어요?"
"모르겠어요. 아직."
구민재의 핸드폰이 외투 주머니 안에서 진동했다. 구민재가 꺼내지 않았다. 세하를 보고 있었다.
"세하 씨."
"네."
"오늘 저녁에 도현이 만날 거죠."
세하는 그것도 부인하지 않았다.
"네."
"파일 전달하려고요?"
세하는 그 질문 앞에서 멈췄다. 구민재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이 질문이 무엇을 확인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파일을 꺼냈다는 것을 아는지. 아니면 그 파일을 도현에게 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하는 것인지.
세하는 정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 거짓을 쌓을 이유가 없었다.
"네."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무언가를 내려놓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구민재가 걸었다. 세하를 지나쳐서. 사무실 쪽으로.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복도 위에 놓였다가 사라졌다.
세하는 그 등을 봤다.
막지 않겠다고 했다. 어제도. 지금도. 그 말이 어디로 이어질지 세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구민재가 도현에게 연락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먼저 가겠다고 한 것이.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현이었다.
― 세하 씨, 구민재한테 연락 왔어요. 만나자고. 어떻게 할까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복도 끝 구민재의 사무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세하는 입력했다.
― 만나도 돼요. 혼자 가지 말고, 하율한테 먼저 연락해요. 그리고 오늘 저녁 우리 셋이 만나는 건 예정대로예요.
전송했다.
그리고 잠깐 복도를 봤다. 형광등 빛이 바닥 위에 고르게 깔려 있었다. 구민재의 사무실 문이 닫혀 있었다. 휴게 공간 쪽에 정아로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었다.
세하는 작업실로 걸었다.
태블릿이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그 안에 파일이 있었다. 도현의 기억, 그리고 목록. 구민재가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알고 있어도 막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이 오늘 복도에서 반복됐다.
그러나 구민재는 도현에게 연락했다.
오늘 저녁, 세하와 하율과 도현이 파일을 보기 전에, 구민재가 먼저 도현과 마주 앉는다면.
그 자리에서 구민재가 무슨 말을 할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작업실 문을 열었다. 자리에 앉았다. 장비 화면에 대기 중인 캡슐 목록이 떠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화면이 켜진 채였다.
도현의 답장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세하는 손을 캡슐 쪽으로 뻗었다. 그리고 멈췄다.
재킷 안주머니였다. 손이 거기로 간 것이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처음 이것을 주머니에 넣은 날부터 거기 있었다. 세하 자신의 기억이 담긴 것.
아직 열지 않은 것.
세하는 손을 내렸다. 작업 화면을 봤다. 오늘 오후의 일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있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도현이었다.
― 하율한테 연락했어요. 구민재는 오늘 오후 다섯 시에 보자고 했어요. 우리 셋은 그 이후로 잡아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다섯 시. 구민재와 도현이 먼저 만난다.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가는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도현이 그 자리에서 흔들릴지도 알 수 없었다.
세하는 입력했다.
― 알겠어요. 끝나고 바로 연락해요.
전송했다.
화면을 내려놓으면서 세하는 창 쪽을 봤다. 오후 햇빛이 유리 위에 기울어 있었다. 도현과 구민재가 만나는 시간까지 몇 시간이 남아 있었다.
세하는 작업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손이 캡슐 대기 목록 위에 놓였다. 그러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구민재가 도현에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사과인지. 설명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그리고 도현이 그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세하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알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저녁에 도현을 만나는 것이었다.
세하는 눈을 내렸다. 화면에 집중했다.
오후가 흘러갔다. 햇빛이 유리 위에서 조금씩 각도를 바꿨다. 세하는 캡슐 두 개를 더 처리했다. 보고서를 작성했다. 손이 하는 일이 있었다.
네 시 오십 분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율이었다.
― 도현 씨, 지금 출발했대요. 세하 씨, 구민재가 그 자리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한 줄이 더 왔다.
― 도현 씨가 세하 씨한테 전해달랬어요. 파일은 구민재를 만나고 나서 봐도 늦지 않는다고.
세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파일은 구민재를 만나고 나서 봐도 늦지 않는다.
도현이 그 말을 보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세하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구민재와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만남 이후에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도현도 알고 있다는 것인지.
세하는 입력했다.
― 알겠어요. 연락 기다릴게요.
전송했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작업실 창 밖으로 하늘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드론 항법 신호등이 하나씩 켜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규칙적으로 깜박였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캡슐의 감촉이 다시 느껴졌다.
구민재가 도현을 만나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갈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도현이 그 만남에 응했다는 것이. 그리고 파일을 그 이후로 미뤄도 된다고 말했다는 것이.
이 년 전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던 사람이.
세하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지 않은 채로 창 밖을 봤다.
도현이 구민재를 만나고 나서 무엇을 가지고 올지. 그리고 세하는 그것을 받아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직 몰랐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뒤집힌 화면이 테이블 위에서 빛났다. 세하는 손을 뻗었다.
도현이었다.
― 지금 구민재 앞에 있어요. 세하 씨한테 같이 오라고 해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 지금 구민재 앞에 있어요. 세하 씨한테 같이 오라고 해요.
문장이 짧았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짧지 않았다.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대로 들고 있었다.
구민재가 도현에게 세하를 데려오라고 했다.
막지 않겠다고 했다. 오늘 복도에서도 같은 말을 했다. 그런데 지금 세하를 부르고 있었다. 그것이 막는 것인지 아닌지, 세하는 한 박자 동안 따져봤다.
막는 것이라면 도현에게 연락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니면 도현을 먼저 만난 자리에서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였을 것이었다. 세하를 부른 것은, 적어도 그 자리에서 세하를 배제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구민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세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세하는 입력했다.
― 어디예요.
잠깐 뒤 도현의 답이 왔다.
― 레테 1층 로비 옆 소회의실이요.
세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킷을 여미면서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태블릿은 서랍 안에 넣었다. 잠갔다.
복도로 나왔다. 형광등 빛이 바닥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작업실에서 엘리베이터까지의 거리가 익숙했다. 세하는 그 익숙한 거리를 걸으면서 머릿속을 정리했다.
구민재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었다. 파일이 꺼내졌다는 것을. 접속 경로는 달랐지만, 구민재가 그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만큼 레테 시스템에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정아로와 세하가 휴게 공간에서 만났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위에 지금 이 호출이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세하는 들어갔다.
1층 로비 옆 소회의실은 외부 방문객 응대용으로 쓰이는 방이었다. 6층의 것보다 넓고, 창이 바깥을 향해 나 있었다. 이미 어두워진 바깥의 빛이 유리 너머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을 열었다.
도현이 먼저 보였다. 테이블 한쪽에 앉아 있었다. 세하를 보는 순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 안에서 긴장이 읽혔지만,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구민재는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외투를 벗은 채였다.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없었다. 노트북도, 종이도. 손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고, 세하가 들어오는 것을 봤다.
"왔어요."
구민재의 목소리는 낮고 평탄했다. 어제 소회의실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세하는 문을 닫고 도현 옆에 앉았다.
구민재가 세하와 도현을 번갈아 봤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었다. 먼저 깨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민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 안에 무언가가 쌓이는 것 같았다.
"부른 이유가 있을 거예요."
도현이 먼저 말했다. 목소리가 고요했다. 세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이 년 동안 구민재를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그 고요함 안에 담겨 있었다.
구민재가 도현을 봤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구민재의 얼굴을 봤다. 꾸민 것이 없었다. 어제 소회의실에서 온화함 아래에 있던 것이 바깥으로 나온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오래된 피로함이 보였다. 그러나 피로함만이 아니었다.
도현이 구민재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눌려 있다가 잠깐 들렸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 년 됐네요."
도현이 말했다. 비아냥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그래요."
구민재가 말했다.
"동의도 없이 지웠어요." 도현이 말했다. "레테에 관한 것들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게 어디서 끝나는지 몰랐어요.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이 년 동안 있었어요. 그 경계를 저는 알 수 없었어요."
구민재가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의 어느 지점으로.
"맞아요."
"세하 씨를 보호하려 했다고 했죠." 도현이 이어갔다. "저한테도 같은 말 할 거예요?"
"아니요."
구민재가 말했다.
"도현이한테는 다른 이유였어요. 세하 씨를 보호하는 것도 있었지만. 레테를 지키려는 것도 있었어요. 그게 전부 다른 것처럼 포장하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구민재와 도현 사이에 있는 것이었다. 세하가 끼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도현이 잠시 테이블 위를 봤다. 그리고 구민재를 봤다.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도현이 말했다. "받으면 끝나는 것처럼 느껴져서요. 그런데 끝이 아니잖아요. 저는 이 년치가 없어요. 지워진 부분이 레테에 관한 것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요. 경계가 어딘지 저는 모르니까."
구민재가 도현을 봤다.
"파일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두 사람이 세하를 봤다.
"도현 씨 기억이 지워진 부분. 구민재 수석이 처리한 것. 지하 2층 백업에 있는 것. 꺼냈어요."
구민재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세하가 예상한 반응이었지만, 막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도현 씨가 보면 알 수 있어요." 세하가 도현을 봤다. "경계가 어딘지."
도현이 잠시 세하를 봤다가 구민재를 봤다.
"막을 거예요?"
도현이 구민재에게 물었다.
구민재가 고개를 저었다.
"봐요."
짧은 한 마디였다. 그러나 그 안에 오래된 것을 내려놓는 무게가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삼 년간 구민재를 봐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수백 개의 기억을 다루며, 사람이 무언가를 놓는 순간의 표정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네."
"오늘 여기 도현 씨를 부른 거. 사과가 전부예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잠깐 머뭇거렸다.
"아니요."
세하는 기다렸다.
"의뢰인 목록."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 손에 있는 거 알아요. 그 목록 안에 있는 이름들 중에 제가 직접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아로가 움직이기 전에, 제가 먼저 그 사람한테 가야 해요."
세하는 그 말을 천천히 펼쳐봤다.
구민재가 먼저 가겠다고 했다. 도현에게 간 것처럼. 정아로가 그 이름을 이용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 사람에게 가서 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게 세하 씨한테 요청하는 거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이름을 알려줄 수 있는지."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창 너머 바깥의 드론 항법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에 스쳤다.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정아로가 찾는 이름을, 정아로에게 확인해줬다. 그러나 목록 전체는 주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구민재가 그 이름을 달라고 하고 있었다.
세하는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저울질하지 않았다. 저울질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운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사람한테 뭐라고 할 거예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잠시 말이 없었다.
"기억이 지워졌다고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그 사람이 알고 싶어하면, 되찾을 방법도 말해줄 거예요."
"방법이 있어요?"
"있어요. 써본 적 없지만."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삼 년간 알아온 사람이었다. 그 삼 년 안에 없었던 것들이 이틀 사이에 전부 바깥으로 나왔다. 그 얼굴이 거짓인지 아닌지, 세하는 완전히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구민재가 지금 선택을 하고 있었다. 정아로보다 먼저, 자신이 먼저 가겠다는 것이. 그것이 또 다른 계산인지, 아니면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마지막으로 내려놓으려는 것인지.
세하는 도현을 봤다.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세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태블릿이 아니었다. 기억 안에서 그 이름을 꺼냈다. 목록을 봤을 때 혀에 걸렸던 이름. 형태 없는 익숙함이 있었던 이름.
그 이름을 입력했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구민재 쪽으로.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오래된 것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한 가지만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사람이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아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오래.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핸드폰을 다시 집었다. 화면을 껐다.
창 너머 드론 신호등이 계속 깜박이고 있었다. 규칙적인 빛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 아직 열지 않은 것.
구민재가 일어서려는 순간, 세하가 말했다.
"수석님."
구민재가 멈췄다.
"이 캡슐." 세하가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표면이 형광등 빛을 받았다. "이게 어디서 온 거예요."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구민재가 캡슐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것이 지나갔다. 세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캡슐을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세하 자신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신원 미상의 의뢰인. 시스템에 기록이 없는 것.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누가 만든 것인지 세하는 아직 몰랐다.
구민재가 캡슐을 보고 있었다.
그 침묵 안에서, 세하는 답이 올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답이 무엇일지는 알 수 없었다.
구민재가 캡슐을 봤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이었다. 세하의 손이 거기서 물러나 있었다. 차가운 표면이 형광등 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났다. 도현이 그것을 봤다. 그리고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빠르게. 그러나 세하는 놓치지 않았다. 삼 년간 수백 개의 기억 캡슐을 다루며 훈련된 손이 있었다. 그 손이 알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이 무언가를 알아보는 순간의 눈이 어떤 것인지.
구민재는 알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세하는 그것을 먼저 깨지 않았다. 구민재가 어디서부터 말을 시작할 것인지 고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고름의 시간이 이미 하나의 답이었다.
“세하 씨가 처음 이 캡슐을 재생했을 때.” 구민재가 말했다. 낮고 천천히. “저한테 보고하지 않았어요.”
“시스템에 기록이 없었으니까요.” 세하가 말했다. “기록이 없는 걸 어떻게 보고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래요.”
그리고 다시 캡슐을 봤다. 그 눈 안에서 피로함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계산이 아니었다. 오래된 것이 바깥으로 나오는 얼굴이었다.
“이건 제가 만든 게 아니에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그럼 누가요.”
구민재가 손을 테이블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캡슐 쪽으로. 그러나 건드리지 않았다.
“세하 씨가 기억 삭제를 의뢰하러 왔을 때.” 구민재가 말했다. “혼자 오지 않았어요. 도현이랑 같이 왔어요. 그리고 세하 씨가 처리를 마친 다음, 도현이가 저한테 부탁한 게 있었어요.”
도현이 구민재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기억이 없는 부분이었다. 경계 너머에 있던 것이 지금 막 경계 안으로 들어오려는 것 같았다.
“세하 씨가 나중에 찾고 싶어질 수도 있다고.” 구민재가 말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기억 삭제 이전의 감각 단편을 따로 캡슐에 담아달라고요. 영상이 아니라. 냄새라든지, 소리라든지, 그런 것들.”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재킷 안주머니 쪽에 손이 가려는 것을 느꼈다. 이미 캡슐은 테이블 위에 있었다. 그러나 손이 그쪽으로 기울었다. 오래된 본능 같은 것이었다.
“도현이가 부탁했어요.” 구민재가 다시 말했다. “세하 씨가 아니라. 세하 씨는 그때 이미 처리가 끝난 상태였고, 도현이가 남아서 저한테 말했어요. 만들어줄 수 있냐고.”
세하는 도현을 봤다.
도현은 테이블 위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기억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기억이 있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의 윤곽이 돌아오는 것은 달랐다.
“제가 부탁했어요?” 도현이 말했다.
“네.”
“왜요.”
구민재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안에서 무언가를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회피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려는 것이었다.
“도현이가 그때 말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가 찾고 싶어질 때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때쯤이면 자기 말로 돌아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그러니까 말 대신 다른 걸로.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캡슐을 봤다. 테이블 위에 놓인 것을. 처음 손에 넣었을 때의 감촉이 생각났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그런데 그것이 영상이 아니라 감각 단편이라면. 냄새라든지, 소리라든지.
1화에서 그것을 재생했을 때, 사 초가 있었다. 병원 복도 장면이었다. 그런데 세하가 느꼈던 것은 영상만이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각이.
세하는 그것을 지금 다시 알았다.
그것이 도현이 심어둔 것이었다.
“수석님.”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하게 유지됐다. “이 캡슐, 시스템에 기록이 없었어요.”
“제가 넣지 않았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도현이한테 줬어요. 도현이가 어떻게 할지는 저도 몰랐어요.”
세하는 도현을 봤다.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들어 있었다. 기억이 지워진 채로, 그 이 년을 살아온 사람의 눈이.
“제가 맡겼어요.” 도현이 말했다. 천천히. “기억 안 나지만. 그렇다면 제가 맡긴 거예요. 세하 씨한테 전달하려고. 언젠가.”
“왜 지금이었어요.” 세하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도현이 말했다. “기억이 없으니까. 그런데.”
도현이 잠깐 멈췄다.
“세하 씨가 레테에 오기 전에, 저한테 어떤 경로로 맡겼을 거예요. 시스템 밖으로. 그러면 제가 직접 의뢰인으로 들어간 거예요. 신원 미상으로.”
세하는 그 구조를 머릿속에서 천천히 펼쳐봤다.
도현이 신원 미상의 의뢰인이었다. 세하의 기억 삭제 이후 어느 시점에, 레테 시스템 바깥으로 이 캡슐을 들여보냈다. 세하가 발견하도록. 언젠가.
그리고 세하가 발견했다. 삼 년이 지나서.
“도현 씨.” 세하가 말했다.
“네.”
“이걸 제가 열어봐도 돼요.”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하게 결정됐다.
“제가 만든 거잖아요.” 도현이 말했다. “세하 씨한테 주려고요. 세하 씨 거예요.”
세하는 캡슐을 집었다. 차가운 표면이 손 안에 들어왔다.
구민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하와 도현이 올려다봤다.
“저는 나갈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설명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이었다. “이건 둘이서 봐요.”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그 얼굴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완전히 정돈된 것이 보였다. 피로함도, 균열도 아닌.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마침내 다 내려놓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수석님.”
구민재가 멈췄다.
“그 이름.” 세하가 말했다. “먼저 가세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감사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세하는 정확히 읽지 않았다.
구민재가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방 안에 세하와 도현만 남았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창 너머에서 드론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였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를 스쳤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겁나요?” 도현이 물었다. 탓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물어보는 것이었다.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정직하게.
“기억이 없어도 되찾았을 때랑 달라요.” 세하가 말했다. “영상은 보는 거예요. 이건.”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러나 도현은 알아들었다.
“느끼는 거죠.” 도현이 말했다.
“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지 않았다. 강요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하율 옆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 지금 세하 옆에 앉아 있었다.
세하는 캡슐을 손 안에서 한 번 뒤집었다.
그리고 재생 단자를 찾았다. 손가락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삼 년간 기술자로 일한 손이었다.
눌렀다.
처음에 온 것은 빛이 아니었다.
냄새였다. 어떤 공간의 냄새. 오래된 나무와 먼지와 그 위에 얹힌 무언가. 익숙한 것. 그런데 어디서 맡았던 것인지 세하의 현재 기억 안에는 없었다. 그러나 몸이 알았다.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긴장이 아닌 방향으로.
그다음에 소리가 왔다. 누군가의 웃음소리였다. 낮고 짧은. 세하 자신의 것인지 다른 사람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사 초쯤 지속됐다.
그리고 끝났다.
세하는 눈을 감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눈을 뜨자 방 안의 형광등 빛이 있었다. 도현이 옆에 앉아 있었다. 창 너머 드론 신호등이 깜박이고 있었다.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기억이 열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하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눈물이 흐른 것이 아니었다. 눈 안쪽이 뜨거운 것이었다. 눈물이 되기 직전의 감각. 세하는 그 감각을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슬픔과 비슷했지만 슬픔이 아니었다. 그리움과 비슷했지만 그리움이라고 부르려면 기억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기억이 없어도, 이것이 있었다.
도현이 세하를 보지 않았다. 그냥 앞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세하를 편하게 했다.
“도현 씨.”
“네.”
“이 안에 있던 게 뭐예요.”
도현이 잠시 말이 없었다.
“저도 몰라요.” 도현이 말했다. “제가 넣었겠지만, 기억이 없으니까. 그런데.”
도현이 세하를 봤다.
“세하 씨가 느낀 게 뭔지는, 세하 씨가 아는 거예요. 저한테 말 안 해도 돼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율이었다.
― 둘이 잘 있어요? 저 지금 근처예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입력했다.
― 들어와요.
전송하고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세하는 캡슐을 다시 안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운 표면이 손끝에서 사라졌다.
도현의 파일이 아직 태블릿 서랍 안에 있었다. 구민재가 나갔고, 하율이 오고 있었다. 정아로는 이름을 확인했고, 구민재는 그 이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세하는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기억이 없어도 몸이 아는 것이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처음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율이 들어왔다.
문을 열고, 방 안을 한 번 훑었다. 세하를 봤다. 도현을 봤다. 구민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문을 닫았다.
세하 옆에 앉았다. 도현 쪽이 아닌, 세하 쪽에.
세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율이 방 안의 공기를 읽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사람을 기다려온 사람이 가진 감각이었다. 말보다 먼저 오는 것들을 읽는 것.
“구민재 갔어요?”
“네.” 세하가 말했다.
“뭐라고 했어요.”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하는지. 순서가 있었다.
“캡슐 얘기부터.”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기다렸다.
“이 년 전에 도현 씨가 구민재한테 부탁했대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 삭제 이전의 감각 단편을 따로 캡슐에 담아달라고. 영상이 아니라 냄새나 소리 같은 것으로. 제가 나중에 찾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
하율이 도현을 봤다.
“기억은 안 나요.” 도현이 말했다. “했겠지만.”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다시 세하를 봤다. “열어봤어요?”
“네.”
“어땠어요.”
세하는 그 질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어땠는지를 말로 옮기는 것이 가능한지 알 수 없었다. 냄새가 먼저 왔다는 것. 몸이 긴장을 내려놓았다는 것. 그리고 웃음소리. 기억이 아니었지만 몸이 알고 있던 것.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에요.” 세하가 말했다. “그런데.”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율은 기다렸다. 마치지 않은 말의 무게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몸이 알고 있는 게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인데. 있었어요.”
하율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하게 지나갔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하지 않았다. 읽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지금 읽는 것이 맞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봤다.
“도현 씨 파일.” 세하가 말했다. “오늘 전달할 수 있어요. 여기서 바로.”
도현이 세하를 봤다.
“태블릿 가져올게요.” 세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로 나왔다. 1층이었다. 퇴근 시간이 지난 레테 빌딩은 조용했다. 안내 데스크에 야간 직원 하나가 앉아 있었다. 세하는 그쪽을 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6층 작업실은 비어 있었다. 세하는 자기 자리로 걸었다. 서랍을 열었다. 태블릿이 거기 있었다. 집으면서 잠깐 손이 멈췄다.
도현의 파일이 안에 있었다. 그리고 목록이. 구민재에게 그 이름을 알려줬다. 정아로에게도 확인해줬다. 이제 도현이 자기 기억을 볼 차례였다.
그 다음이 무엇인지, 세하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태블릿을 들고 작업실을 나오려는 순간, 핸드폰이 진동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전화였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번호가 낯설었다. 그러나 받았다.
“이세하 씨.”
목소리를 아는 순간, 세하는 멈췄다.
정아로가 아니었다. 구민재도 아니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낯설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한 번쯤 스친 것 같은 목소리. 혀가 기억하는 종류의 것.
“누구세요.”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구민재 수석님한테 연락받았어요.” 목소리가 말했다. “오늘 저녁에요. 제 기억이 지워졌다고.”
세하는 작업실 안에 서 있었다. 형광등 불빛이 바닥 위에 고르게 깔려 있었다. 손 안의 태블릿이 차가웠다.
“지금 레테 앞에 있어요.” 목소리가 이어졌다. “들어가도 돼요?”
세하는 의뢰인 목록에서 세 번째 이름 앞에서 멈췄던 순간을 떠올렸다. 혀에 걸렸던 이름. 형태 없는 익숙함.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이 지금 레테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구민재가 먼저 갔다. 그리고 그 사람이 왔다.
“들어오세요.” 세하가 말했다. “1층 로비에서 기다려요. 제가 내려갈게요.”
전화가 끊어졌다.
세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태블릿을 옆구리에 끼웠다. 작업실 불을 끄지 않고 나왔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세하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아까 재생했을 때와 같은 온도였다. 냄새가 먼저 왔던 것. 몸이 먼저 알았던 것.
그 캡슐 안에 담긴 감각이 누구와 함께한 것인지, 세하는 아직 몰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세하는 들어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는 동안, 세하는 아래층 소회의실에 있는 하율과 도현을 생각했다. 파일을 가져간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먼저 가야 할 곳이 생겼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세하의 현재 기억 안에는 없었다. 그러나 몸이 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세하는 숨을 고르게 유지했다. 기술자로 삼 년을 일한 방식이었다. 감정이 일어도 손이 하는 일은 계속됐다.
그리고 지금 손이 해야 할 일이 있었다.
1층 도착 신호음이 울렸다. 문이 열렸다.
로비 유리문 너머로 바깥의 드론 항법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를 스쳤다.
그 빛 안에, 누군가 서 있었다.
세하는 걸었다.
로비 유리문이 열렸다.
바깥 공기가 먼저 들어왔다. 늦가을의 냄새였다. 드론 신호등 빛이 유리 위에서 규칙적으로 스쳐갔다. 붉은빛, 초록빛. 붉은빛, 초록빛.
그 빛 안에 서 있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서른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 단정한 코트.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였다. 세하를 보는 순간 멈췄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갔다. 낯섦과 낯설지 않음이 동시에 있는 눈이었다.
세하는 그 얼굴을 봤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최도현을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형태 없는 익숙함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없었다. 그냥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로비 안의 냄새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세하의 몸이 무언가를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었다. 어깨 어딘가가. 손끝 어딘가가. 방금 전 캡슐을 재생했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것이었다. 기억이 아니었다. 기억이 있던 자리가 아직 비어 있다는 것을 몸이 아는 것이었다.
야간 안내 직원이 데스크 뒤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세하가 먼저 말했다.
“들어오셨어요.”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동작이 조심스러웠다. 단단한 것 위에 발을 디디기 전에 먼저 무게를 재는 사람의 동작이었다.
“이세하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식이 이상했다. 반갑다거나, 어색하다거나, 그 어느 쪽의 감정도 실리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냉담하지 않았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있어서 어느 하나도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세하는 그 목소리를 아까 전화에서 한 번 들었다. 그런데 지금 직접 들으니 달랐다. 혀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스쳤다. 기억이 아닌 것. 그렇지만 완전히 낯선 것도 아닌 것.
“여기서 얘기하기 어려워요.” 세하가 말했다. “소회의실로 갈게요.”
여자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걸었다. 1층 로비 옆 소회의실 쪽으로. 여자가 그 뒤를 따라왔다. 발소리가 두 개였다. 세하의 것과 다른 사람의 것. 그 두 발소리가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회의실 문 앞에서 세하는 멈췄다.
하율과 도현이 안에 있었다.
세하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으면서 잠깐 생각했다. 이 사람을 하율과 도현이 있는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맞는지. 아니면 다른 공간이 필요한지.
그러나 다른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하율과 도현은 이미 이 흐름 안에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구민재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그것을 세하 혼자 먼저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문을 열었다.
하율이 고개를 들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세하가 들어오고, 그 뒤로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봤다.
하율의 눈이 달라졌다.
계산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알아보는 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알아보려 하는 눈이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얼굴이 어딘가에서 온 것임을 감지하는 것 같았다.
도현도 그 여자를 봤다. 도현의 눈 안에서는 다른 것이 지나갔다. 더 직접적인 것이었다. 기억이 지워진 부분에 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도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앉아요.”
세하가 말했다. 여자에게도,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었다.
네 사람이 테이블 주위에 앉았다. 구민재가 있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저는 이세하예요.” 세하가 말했다. “이쪽은 최도현 씨, 이쪽은 하율 씨예요.”
여자가 도현을 봤다. 그리고 하율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차례로 확인됐다가 다시 불확실해졌다.
“전화에서 말씀하셨잖아요.” 세하가 이어갔다. “구민재 수석님한테 연락받았다고. 기억이 지워졌다고.”
“네.”
“뭐라고 했어요, 구민재 수석님이.”
여자가 잠시 말이 없었다.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고르는 것 같았다.
“전화가 왔어요, 오늘 저녁에.” 여자가 말했다. “구민재라고 소개했어요. 레테 수석 연구원이라고. 그리고.” 잠깐 멈췄다. “당신이 레테를 통해 기억을 삭제당했는데, 본인 동의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했어요.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몰랐어요?”
“몰랐어요.”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런데.”
여자가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렸다.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요. 오래전부터. 뭔가가 빠진 것 같은 느낌. 어떤 사람들이나 시간들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없는 것 같은 느낌. 그런데 구체적으로 뭐가 없는지 알 수 없었어요. 없다는 것 자체를 알 수가 없으니까.”
도현이 그 말을 들으면서 시선을 테이블 위로 내렸다. 세하는 그것을 시야 끝으로 봤다.
같은 말이었다. 이 년 전 도현이 경험한 것과 같은 구조였다. 기억이 없는데 없다는 것도 모르는 것. 공백의 경계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것.
“무엇 때문에 지워진 건지 설명했어요, 구민재 수석님이?”
“했어요.” 여자가 말했다. “레테 비공식 삭제 서비스에 대해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그 정보가 외부로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따라갔다. 도현과 같은 이유였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아로 씨 아세요?” 세하가 물었다.
여자의 눈이 달라졌다. 세하를 보는 각도가 조금 달라졌다.
“알아요.” 잠깐의 침묵. “오래.”
하율이 세하를 봤다. 세하도 하율을 봤다. 그 짧은 눈빛 교환 안에서 같은 것을 확인했다.
정아로가 말했던 것이었다. 그 사람이 제 사람이에요.
“정아로 씨가 레테에 들어온 이유가 당신 때문이라는 거 알아요?” 세하가 물었다.
여자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눌려 있다가 아주 조금 들리는 것 같았다.
“몰랐어요.” 여자가 말했다. 천천히. “그 사람이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오늘 구민재한테 처음 들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태블릿이 옆구리에 끼워져 있었다. 도현의 파일이 그 안에 있었다. 그리고 목록이. 이 사람의 이름도 그 목록 안에 있었다. 세 번째 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세하가 말했다.
여자가 기다렸다.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온도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세하는 피부로 알아챘다.
여자가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싸웠다. 두 가지가. 하나는 알고 싶다는 것이었고, 하나는 알게 됐을 때가 두렵다는 것이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무게로 그 눈 안에 있었다.
“지금 바로 결정 안 해도 돼요.” 세하가 말했다.
여자가 세하를 봤다.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알려주지 않아요.” 세하가 이어갔다. “그게 조건이었어요. 구민재 수석님한테 이름을 알려줄 때.”
여자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그리고 아주 조금 부드러워졌다. 단단하게 조여 있던 것이 한 층 얇아지는 것 같았다.
“이세하 씨.” 여자가 말했다.
“네.”
“저한테 기억이 없는 것들 중에.” 여자가 잠깐 말을 멈췄다. “이세하 씨가 있어요?”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의뢰인 목록. 세 번째 이름. 강제 삭제 코드. 이 년 전, 세하가 기억을 지우던 같은 달에. 그리고 구민재가 말했다. 레테와 연결된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
세하의 기억 삭제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 도현이었다. 도현과 연결된 사람이 이 여자였다면. 이 여자가 도현을 통해서 세하를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그 연결 때문에 기억이 지워졌다면.
몸이 먼저 아는 것이 있었다. 로비에서 이 사람이 들어올 때. 어깨 어딘가가. 손끝 어딘가가.
“모르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정직하게. “제 기억도 완전하지 않아서요.”
여자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놀람이 아닌 것이 지나갔다. 예상했다는 것도 아닌 것이었다.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여자가 말했다. “둘 다 없는 거네요.”
세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없는 것. 서로에 대한 기억이 각자의 자리에서 지워진 것. 같은 공백을 다른 방향에서 갖고 있는 것.
도현이 손을 테이블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도현이 말하려다 멈추는 것을 세하는 알았다. 이것이 도현이 끼어들 자리인지 아닌지 도현도 알고 있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세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그러나 그 눈 안에 이 년이 들어 있었다. 기다려온 이 년. 그리고 지금 이 자리가 어디로 기울지를 보고 있는 이 년.
세하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이었다. 세하가 나중에 찾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냄새가 먼저 왔었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와 그 위에 얹힌 무언가. 그리고 웃음소리.
세하는 손을 주머니에서 빼지 않은 채로 여자를 봤다.
“이름이 뭐예요.” 세하가 물었다.
여자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됐다.
“강서진이에요.”
세하는 그 이름을 들었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영상이 재생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손 안의 캡슐이 조금 더 차갑게 느껴졌다.
아니, 차가워진 것이 아니었다. 세하의 손이 그것을 더 선명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을 지금에서야 제대로 쥔 것 같은 감각이었다.
방 안이 조용했다.
하율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세하만 들을 수 있는 크기로.
도현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이 가만히 있었다.
강서진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세하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캡슐이 손 안에 들려 나왔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그냥 손 안에 들고 있었다.
“구민재 수석님이 방법이 있다고 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을 되찾을 방법.”
“그랬어요.”
“도현 씨 파일도 있어요. 오늘 꺼낸 거. 지워진 부분이 담긴 것.”
강서진이 도현을 봤다. 도현이 강서진을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오래된 것이 지금 막 같은 공간에서 마주치는 종류의 것이었다.
“전부 당신이 결정해요.” 세하가 강서진에게 말했다. “파일을 볼지. 기억을 되찾을지. 정아로 씨한테 연락할지. 그 어느 것도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돼요.”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완전히 굳지 않은 채로 남았다.
“이세하 씨.”
“네.”
“그 캡슐.” 강서진이 세하의 손 안을 봤다. “뭐예요.”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 세하가 나중에 찾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
그 나중이 지금이었다.
“제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다시 쥐었다. 더 단단하게.
창 너머 드론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를 스쳤다. 세하는 그 빛을 보면서 테이블 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봤다.
도현이 거기 있었다. 기억이 지워진 채 이 년을 살아온 사람이. 하율이 거기 있었다. 이 년을 기다린 사람이. 그리고 강서진이 거기 있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공백을 몰랐던 사람이.
그리고 세하가 있었다.
기억이 없어도 몸이 아는 것이 있었다. 손 안의 캡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세하는 입을 열었다.
“도현 씨 파일부터 볼게요.”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화면을 켰다.
태블릿 화면이 켜졌다.
세하는 파일 목록을 열었다. 도현의 이름이 붙은 파일이 거기 있었다. 삭제 처리 날짜가 표시돼 있었다. 이 년 전. 세하가 하율에 대한 기억을 지운 것과 같은 달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잠깐 멈췄다. 같은 달이라는 것이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 보니 무게가 달랐다.
도현이 옆에 있었다. 강서진이 맞은편에 있었다. 하율이 세하 곁에 있었다.
“볼 준비 됐어요?”
세하가 도현에게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가라앉아 있었다.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두려움이 있는데 그것을 이유로 하지 않겠다는 사람의 눈이었다.
세하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파일은 영상이었다. 세하가 처리한 캡슐들과 같은 형식이었지만, 해상도가 달랐다. 레테 공식 처리본이 아니었다. 백업 서버에 남은 것이었다. 화면이 열리면서 처음으로 보인 것은 실내였다. 조명이 낮은 공간. 긴 테이블. 그 위에 종이 몇 장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었다.
도현이 화면 속에 있었다. 젊었다. 지금보다 이 년 전이었다. 그 옆에 낯선 사람들이 둘 있었다. 레테 직원증이 보였다. 이름까지는 화면에서 읽히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가 있었다.
강서진이었다.
테이블 한쪽 끝에 앉아 있었다. 지금보다 머리카락이 길었다. 손 안에 서류를 들고 있었다. 화면 속의 강서진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음성이 깨끗하지 않았다. 백업 파일의 음질이었다. 단어들이 끊겼다.
그러나 몇 개가 들렸다.
“…비공식 처리 건수가 이것만이 아니에요…”
“…목록을 확보하면…”
“…레테 외부로…”
세하는 그 단어들을 들으면서 태블릿 화면을 봤다. 강서진이 레테 비공식 삭제 서비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것을 외부로 가져가려 했다. 도현과 함께.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구민재에게 감지됐다.
영상이 거기서 잘렸다.
두 번째 클립이 이어졌다.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복도였다. 도현이 혼자 걷고 있었다. 뒤에서 찍힌 화면이었다. 누가 찍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도현이 멈추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와 마주친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상대는 화면 밖이었다.
도현의 어깨가 좁아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클립이 끝났다.
세하는 재생을 멈췄다. 방 안이 조용했다.
도현이 테이블 위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이 잃어버린 것의 윤곽이, 처음으로 형태를 갖추는 것 같았다.
“저랑 같이 있었네요.”
도현이 강서진을 봤다. 강서진이 도현을 봤다.
“그 자리에 있었어요, 저도.” 강서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이 지워진 부분이 그거예요. 그 사람들이랑 같이 움직이던 것. 도현 씨 포함해서.”
“알고 있었어요?” 도현이 물었다. “제가 이 년 전에 기억 삭제당했다는 거.”
“몰랐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저는 그 이후로 도현 씨를 볼 수 없었으니까. 제 쪽도 지워졌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도현 씨가 없어진 것처럼 됐어요. 연락이 끊어졌고, 찾으려 했는데 찾을 수 없었고.”
도현이 그 말을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받아들이는 동작이었다. 화가 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오래 비어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을 감당하는 동작이었다.
“파일 안에 다른 클립도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더 볼 거예요?”
도현이 세하를 봤다. “네.”
세하는 다음 클립을 열었다.
이번에는 음성이 더 선명했다. 같은 날인지 다른 날인지 알 수 없는 공간이었다. 창이 있었다. 낮 시간이었다. 도현이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었다. 상대가 돌아서는 순간, 얼굴이 보였다.
세하였다.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온도가 아니었다. 세하는 그것을 피부로 알아챘다.
화면 속의 세하가 말하고 있었다. 음성이 잘렸다가 이어졌다.
“…목록을 꺼내는 건 내가 할 수 있어. 기술자 권한이 있으니까…”
세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낯설었다. 기억 안에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발음 방식은 지금과 같았다. 간격이 일정한 말투.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클립이 거기서 잘렸다.
세하는 멈춤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이미 끝난 것이었다. 화면이 검게 됐다.
하율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세하는 화면을 봤다. 검은 화면을.
이 년 전, 세하는 알고 있었다. 목록을. 비공식 삭제 서비스의 존재를. 그리고 그것을 꺼내려 했다. 도현과 강서진과 함께.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지워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워진 것은 하율에 대한 기억이었다.
세하는 그 구조가 맞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클립이 거기서 끝났다. 나머지가 없었다. 두 개의 클립이 전부였다.
“세하 씨.”
강서진이 말했다. 세하가 강서진을 봤다.
“화면 속의 이세하 씨.” 강서진이 말했다. “저랑 아는 사이였을 거예요. 도현 씨를 통해서.”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이 없어서 확인이 안 되지만.”
강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런데.” 강서진이 말했다. “이 년 전 화면 속에서 이세하 씨가 한 말.”
세하는 기다렸다.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하고 말했잖아요.” 강서진이 말했다. “그 다음이 잘린 거예요.”
세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방금 본 것이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을까요.”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싸우지 않았다. 그냥 물어보는 것이었다.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모르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정직한 대답이었다. 기억이 없었다. 그 말의 나머지가 어디 있는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그런데.
손 안의 캡슐이 있었다. 도현이 만든 것.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세하는 아까 그것을 재생했을 때 냄새가 먼저 왔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웃음소리. 몸이 먼저 알고 있었던 것.
캡슐 안에 담긴 그 감각이, 이 년 전 그 자리에 있던 것이라면.
세하는 손을 주머니로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같은 눈이었다.
강서진이 세하의 손을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방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캡슐을 꺼내지 않았다. 주머니 안에 손이 있는 채로, 그 표면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재생 단자의 위치를 손이 알고 있었다. 삼 년간 기술자로 일한 손이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세하가 강서진에게 말했다.
강서진이 기다렸다.
“정아로 씨한테 연락할 거예요?”
강서진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잠깐 멈췄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어느 방향으로 기울었다.
“오늘은 안 할 거예요.” 강서진이 말했다. “아직 제가 뭘 가지고 있는지 모르니까. 없는 것들이 어딨는지도 모르고.”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되찾을 방법.” 강서진이 이어갔다. “구민재가 있다고 했어요. 그게 뭔지는 말 안 해줬어요.”
“저도 몰라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 수석님한테 물어봐야 해요. 직접.”
강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창 너머 드론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를 스쳤다.
세하는 주머니 안에서 손을 꺼냈다. 캡슐을 꺼내지 않은 채로.
태블릿 화면이 아직 켜져 있었다. 검은 화면이었다. 파일의 끝이었다.
그 화면을 보면서 세하는 이 년 전의 자신이 한 말의 나머지를 생각했다.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그 다음에 무엇이 있었는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을 꺼낸 사람이 자신이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도현이 있었다. 강서진이 있었다.
그리고 하율은 없었다.
세하는 그것을 지금 처음으로 알았다. 영상 안에 하율이 없었다. 레테 비공식 삭제 서비스의 목록을 꺼내려 했던 그 자리에, 하율은 없었다.
그런데 지워진 것은 하율이었다.
세하는 그 구조를 머릿속에서 천천히 펼쳐봤다. 그리고 한 가지 가능성이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
레테가 세하를 지운 것이 아니었다면.
세하가 스스로 지운 것이었다면.
구민재가 소회의실에서 말했다. 세하가 직접 의뢰했다고. 그 말을 세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영상을 보고 나서, 그 이유가 달리 읽혔다.
레테를 지키기 위해 지워진 것이 아니었다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지운 것이었다면.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된 것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 이 년을 기다린 눈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눈 안에서, 세하가 처음으로 다른 것을 봤다.
두려움이었다.
세하가 무언가를 알아가고 있다는 것을 하율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하율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네.”
“이 년 전.” 세하가 말했다. “제가 기억을 지우러 레테에 왔을 때.”
하율이 기다렸다.
“하율 씨는 알고 있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들어 있었다. 기다린 것, 찾은 것, 영상을 건넨 것, 경보를 보낸 것,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
하율이 입을 열었다.
하율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 오지 않았다.
세하는 기다렸다. 하율이 말을 고르는 것인지, 아니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방 안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온도가 변한 것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 자리에서 결정되려 하고 있었다.
도현이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린 채로 하율을 봤다. 강서진이 하율을 봤다. 세하만 하율을 보지 않았다. 태블릿 화면을 보고 있었다. 검은 화면. 파일의 끝.
그 검은 화면 안에서 이 년 전의 자신이 한 말이 아직 울리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세하는 그 나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하율에게 묻는 것과 다른 방향이었다. 지금 묻는 것은 더 앞에 있는 것이었다.
"알고 있었어요." 하율이 말했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지우러 간다는 거요?" 세하가 물었다.
"네."
"미리요?"
하율이 잠깐 멈췄다. 그 멈춤이 짧았다.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세하 씨가 말해줬어요." 하율이 말했다. "지우러 가기 전날."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지우러 가기 전날. 세하가 직접 말했다.
"왜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기다린 것, 찾은 것,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해야 하는 것.
"말해야 할 것 같아서 왔다고 했어요." 하율이 말했다. "모르게 지우는 건 하기 싫다고."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한테 와서." 하율이 이어갔다. "내일 레테에 가서 기억을 지울 거라고. 나한테 관련된 것들을 전부. 그리고 그게 나를 위한 거라고 했어요.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게 하려고."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알았다. 이미 8화에서 영상을 통해 들은 것이었다. 세하가 하율에게 한 말.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 말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전날 밤에 먼저 왔었다.
"하율 씨는 뭐라고 했어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의 어느 지점으로.
"막으려 했어요." 하율이 말했다. "처음에는.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런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고."
세하는 기다렸다.
"그런데 세하 씨가." 하율이 말했다. "막을 수 없을 거라고 했어요. 이미 결정한 거라고. 그리고."
하율이 잠깐 멈췄다.
"경로를 알려줬어요." 하율이 말했다. "나중에 되찾고 싶어지면 쓸 수 있는 방법."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기억 삭제 전 경로를 알려준 누군가의 정체. 그것이 지금 밝혀지고 있었다. 하율이었다. 세하가 스스로 알려준 것이었다.
강서진이 조용히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도현이 테이블 위의 손을 조금 움직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테 지하 2층이요?" 세하가 물었다.
"네." 하율이 말했다. "로컬 스토리지. 기술자 권한으로 접근 가능한 것. 그리고 도현 씨한테 연락하면 도움받을 수 있다고. 도현 씨가 아는 게 있다고."
세하는 도현을 봤다.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 전의 것이 지금 자리를 잡는 것 같았다. 기억이 없어도 그 연결이 거기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도현 씨가 캡슐을 만든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도현에게.
"그랬겠죠." 도현이 말했다. 낮게. "기억은 없지만. 세하 씨한테서 얘기 들었을 거고. 그래서 제가 구민재한테 부탁한 거예요. 감각 단편을 담아달라고."
세하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 세하가 나중에 찾고 싶어질 때를 대비해서.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그 나중이 지금이었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네."
"그 전날 밤에." 세하가 말했다. "제가 경로를 알려주고 나서. 그다음에 뭐라고 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그리고 그 이 년보다 더 오래된 것도 있었다.
"기다릴 수 있냐고 물었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제가 뭐라고 했어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하게 결정됐다.
"기다릴 수 있다고 했어요." 하율이 말했다. "얼마든지."
방 안이 조용해졌다.
창 너머 드론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를 스쳤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더 단단하게.
기다릴 수 있다고. 얼마든지.
그 말을 한 사람이 거기 앉아서 실제로 이 년을 기다렸다. 세하가 스스로 지워달라고 해서 지워진 채로. 돌아올지 모르면서.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목소리로.
세하는 하율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이 아닌 것을 봤다. 피로함이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을 이제 조금 내려놓아도 되는지 모르는 사람의 피로함이었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네."
"기억이 없어도." 세하가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흔들렸다. 오래 참아온 것이 흔들리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쏟아지지는 않았다.
"하지 않아도 돼요." 하율이 말했다.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그래도."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율은 알아들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을 보지 않았다. 강서진을 봤다.
"잠깐 나갈게요." 도현이 강서진에게 말했다.
강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갔다. 문이 닫혔다.
방 안에 세하와 하율만 남았다.
세하는 캡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지 않았다. 손 안에 들고 있었다. 차가운 표면이 손바닥의 온기로 조금씩 데워지고 있었다.
"이 캡슐." 세하가 말했다. "아까 재생했을 때 냄새가 왔어요. 오래된 나무랑 먼지. 그리고 웃음소리."
하율이 세하를 봤다.
"어디였어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잠시 말이 없었다.
"제 방이었을 거예요." 하율이 말했다. "자주 있었던 곳이라서."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열리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손 안의 캡슐이 그 말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온도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아니,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세하가 그것을 더 선명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웃음소리는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그리고 그 이 년 이전의 것도.
"세하 씨 거예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자신의 웃음소리였다. 기억 안에 없는 웃음소리가. 도현의 손이 담아둔 그 캡슐 안에 있었다.
세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율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된 것과 마주치는 것 같았다. 지우기 전날 밤에 경로를 알려줬던 사람. 기다릴 수 있냐고 물었던 사람. 얼마든지라고 답했던 사람.
세하는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런데 몸이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구민재였다.
문자 한 줄이었다.
― 강서진 씨한테 기억 복원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세하 씨한테 먼저 얘기해야 할 게 있어요. 내일 아침에 시간 돼요?
세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기억 복원 방법. 구민재가 있다고 했던 것. 써본 적 없다고 했던 것.
그것을 강서진에게 설명하기 전에, 세하에게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이 있다고.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화면이 켜진 채였다.
하율이 그 화면을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구민재요?" 하율이 물었다.
"네."
"뭐라고 해요."
세하는 잠시 생각했다. 그 문장의 무게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내일 아침에 할 말이 있대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 복원 방법 얘기하기 전에."
하율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복원 방법이." 하율이 말했다. 조심스럽게. "강서진 씨한테만 해당하는 게 아닐 수도 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강서진의 기억. 도현의 기억. 그리고 세하의 기억.
구민재가 세하에게 먼저 얘기해야 할 것이 있다고 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차가운 표면이 이제 완전히 데워져 있었다. 처음부터 거기 있던 것을 지금에서야 제대로 쥔 것 같은 감각이 아직 손 안에 있었다.
세하는 입력했다.
― 돼요.
전송했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면서 세하는 창 쪽을 봤다. 드론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붉은빛과 초록빛이 번갈아 유리 위를 스쳤다.
내일 아침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아침에 구민재가 할 말이 있었다.
기억을 되찾는 방법. 그것이 무엇인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그 방법이 무엇이든, 세하는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되찾을지. 아니면 영원히 묻어둘지.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다시 쥐었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거기 있었다. 기억 안에는 없는 것이 거기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 년 전부터 거기 있던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문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도현과 강서진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세하는 눈을 내렸다. 캡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차가운 표면이 다시 옷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이 있었다.
문이 열렸다.
밤이 깊었다.
세하는 작업실 창 앞에 서 있었다. 레테 빌딩 6층이었다. 아래 거리에 드론 배송 차량 하나가 지나갔다. 붉은 꼬리등이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순서대로 펼쳐봤다.
강서진이 왔다. 도현의 파일을 열었다. 화면 속에서 이 년 전의 자신이 말했다.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그 다음이 잘렸다. 하율이 말했다. 알고 있었다고. 지우러 가기 전날, 세하가 직접 말해줬다고. 경로를 알려줬다고. 기다릴 수 있냐고 물었을 때 얼마든지라고 답했다고.
그리고 구민재의 문자가 왔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에 구민재의 문자가 아직 있었다.
― 강서진 씨한테 기억 복원 방법을 설명하기 전에, 세하 씨한테 먼저 얘기해야 할 게 있어요. 내일 아침에 시간 돼요?
세하가 돼요, 라고 보냈다. 구민재는 그 이상의 말을 보내지 않았다.
기억 복원 방법.
구민재가 있다고 했다. 써본 적 없다고 했다. 그것을 강서진에게 설명하기 전에 세하에게 먼저 해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세하는 그 말의 방향을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강서진의 기억과 세하의 기억이 같은 방법으로 처리될 수 있다는 것인지. 아니면 세하의 경우가 다른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인지.
창에 이마를 기대지 않았다. 세하는 그냥 서 있었다.
안주머니 안에 캡슐이 있었다. 아까 하율과 단둘이 있던 시간이 생각났다. 웃음소리는 세하 씨 거예요, 라고 하율이 말했을 때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억이 없는 웃음소리. 그런데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듣는 순간, 부정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 어딘가에서 울렸다.
울렸다는 표현이 맞는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기술자로 삼 년을 일하며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오래 유보해왔다. 그런데 오늘 밤은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하율이었다.
― 잘 들어갔어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입력했다.
― 아직 회사에 있어요.
잠시 뒤 답이 왔다.
― 언제까지 있을 거예요.
세하는 창 밖을 봤다. 거리가 조용했다. 드론 항법 신호등이 규칙적으로 깜박이고 있었다.
― 곧 나갈 거예요.
전송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잠깐 서 있었다.
내일 아침, 구민재를 만난다. 그 자리에서 기억 복원 방법에 대해 듣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하는 아직 모른다. 구민재가 써본 적 없다고 했다. 레테가 다루는 기억 처리 기술은 세하도 알고 있었다. 추출, 보관, 삭제. 그 역방향이 가능하다면 복원이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구민재가 써본 적 없다고 했다는 것은.
세하는 그 생각을 거기서 멈췄다.
내일 들으면 된다.
작업실 불을 껐다. 태블릿은 서랍에 잠갔다. 재킷을 여미면서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복도로 나왔다. 레테 야간 빌딩은 조용했다. 발소리가 혼자였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였다.
구민재가 지정한 장소는 레테가 아니었다. 1층 로비에서 두 블록 떨어진 카페였다. 외부 방문객이 드문 시간대의 조용한 자리였다. 세하가 먼저 도착했다. 창가 쪽 테이블에 앉았다.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
구민재가 오 분 뒤 들어왔다. 외투를 입은 채였다. 세하를 발견하고 걸어왔다. 맞은편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 아무것도 올려놓지 않았다. 노트북도, 서류도 없었다.
“왔어요.”
구민재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그러나 어제 소회의실에서와 달랐다. 더 조용했다. 온화함이 아니라, 오래 생각한 사람의 조용함이었다.
“네.”
잠깐 침묵이 있었다. 카페 안에 배경 음악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먼저 깨지 않기로 했다.
“기억 복원 방법 얘기하기 전에.”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 기억이 왜 그 방식으로 삭제됐는지, 제가 알고 있는 것부터 말해야 할 것 같아요.”
세하는 그 말의 앞뒤를 짚었다. 구민재가 소회의실에서 한 말이 있었다. 세하가 스스로 의뢰했다고. 이유는 하율이 더 이상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민재가 지금 하려는 말이 그것과 같은 것인지 달랐다.
“소회의실에서 한 얘기랑 달라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달라요.”
세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캡슐은 안주머니 안에 있었다. 손이 거기로 가려는 것을 세하는 알아챘다. 그러나 가지 않았다.
“세하 씨가 기억 삭제를 의뢰하러 왔을 때.”
구민재가 말했다.
“두 가지를 부탁했어요.”
세하는 기다렸다.
“하나는 하율 씨에 관련된 기억 전체를 삭제해달라는 것이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바깥으로 나오려는 것이 보였다.
“하율 씨 기억에서도, 세하 씨에 관한 것들을 지워달라는 것이었어요.”
방 안의 배경 음악이 들렸다. 세하는 그것을 이상하게 선명하게 들었다. 구민재의 말이 자리를 잡는 동안, 그 음악 소리가 귀 안으로 들어왔다.
세하만 지운 것이 아니었다.
하율의 기억에서도.
“하율 씨가 동의했어요?”
세하의 목소리가 평탄하게 유지됐다. 삼 년간 기술자로 일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손끝이 달랐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끝이 조금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구민재가 시선을 내렸다.
“아니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하 씨가 원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 씨한테 말하지 말고 처리해달라고요. 하율 씨가 알면 막을 거라고. 그리고 막혀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하율 씨가 세하 씨를 잊어야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천천히 펼쳐봤다.
세하가 하율에게 경로를 알려줬다. 지우러 가기 전날 밤에. 기다릴 수 있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레테에 와서는 하율의 기억에서도 자신을 지워달라고 했다. 몰래.
두 가지가 동시에 있었다.
나중에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하율이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만들려 했다.
세하는 그것이 어떤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 구조를 보면 볼수록, 이 년 전의 자신이 무언가를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이 보였다. 혼자서.
“그래서.”
세하가 말했다.
“실제로 처리했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아니요.”
세하는 그 한 마디를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왜요.”
“하율 씨가 왔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 처리가 끝난 직후에. 직접. 하지 말라고 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율이 알고 있었다. 세하가 전날 밤 말해줬으니까. 그리고 레테로 왔다. 세하의 처리가 끝난 직후에.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말라고 했다.
“하율 씨가 어떻게 알았어요.”
세하가 물었다.
“세하 씨가 전날 밤에 말해줬겠죠.”
구민재가 말했다.
“경로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율 씨 기억도 지우려 한다는 것을. 막아달라고 알려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하율 씨가 스스로 짐작한 것일 수도 있어요. 저는 확인하지 않았어요.”
세하는 그 구조를 다시 펼쳐봤다.
경로를 알려주면서, 동시에 자신이 하율의 기억도 지우려 한다는 것을 알려줬다. 막아달라는 뜻으로. 아니면 막아줄 것을 알면서 알려줬거나.
이 년 전의 자신이 무엇을 원했는지, 세하는 아직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하율 씨는.”
세하가 말했다.
“이 년 동안 기억이 있었던 거예요?”
“네.”
구민재가 말했다.
“전부.”
세하는 손끝이 차가운 것을 다시 느꼈다.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이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안쪽에서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하율은 이 년 동안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세하가 어떤 말을 했는지. 무슨 얼굴로 레테에 들어갔는지. 그리고 나온 세하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 모든 것을 기억한 채로, 이 년을 기다렸다.
“복원 방법이요.”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이전과 달랐다. 무언가를 결정하기 직전의 목소리였다.
“그게 뭐예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정돈되는 것 같았다.
“레테가 기억을 추출할 때 쓰는 역방향 경로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삭제된 기억이 완전히 소거되는 것이 아니라 저장 공간에서 비활성화되는 방식이에요. 덮어쓰이기 전에 활성화하면 돌아올 수 있어요. 단계별로. 전부 한꺼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부작용은요.”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되찾는 과정에서 현재 기억과 충돌이 생길 수 있어요. 그 기간이 짧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리고.”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되찾은 기억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어요.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어요. 우리가 저장하는 방식 자체가 이미 주관적이기 때문에.”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되찾은 기억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 세하가 이미 생각해온 것이었다. 처음 영상을 봤을 때부터. 기억은 되찾더라도 그것이 전부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 구민재가 지금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세하가 말했다.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아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됐다. 오랜 시간이 걸려서.
“세하 씨가 원하면, 저 할 수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강서진 씨도, 세하 씨도. 원하면.”
세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손을 봤다. 차가웠던 손끝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카페 안의 공기가 따뜻했다.
되찾을지. 아니면 영원히 묻어둘지.
세하는 그 질문이 처음으로 추상이 아닌 것으로 느껴졌다. 방법이 있었다. 구민재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세하에게 묻고 있었다.
세하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냄새가 먼저 왔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웃음소리. 세하 자신의 것이라고 하율이 말했다.
하율이 이 년 동안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한 가지만 먼저 확인하고 싶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기다렸다.
“하율 씨한테 제가 직접 말해야 해요. 이 년 전에 하율 씨 기억도 지우려 했다는 것.”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 수석님한테 들어서 알고 있는 건지. 아니면 처음 듣는 건지.”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모르겠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저는 하율 씨한테 따로 말하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 하율 씨를 본 적이 없으니까.”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율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었다. 전날 밤 세하가 어디까지 말해줬는지. 아니면 하율이 짐작하고 있는지.
세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몸이 이미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처리할 수 있어요?”
세하가 구민재에게 물었다.
“준비가 필요해요. 이틀에서 사흘.”
“알겠어요.”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안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차가운 표면이 옷 안으로 들어갔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결정한 거예요?”
구민재가 물었다.
세하는 그 질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되찾을지 묻어둘지. 그것은 아직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런데 세하가 지금 알고 싶은 것은 그것보다 앞에 있었다.
“아직이요.”
세하가 말했다.
“먼저 하율 씨한테 가야 해요.”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것이 이 자리에서 구민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세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늦가을이었다. 아침 햇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걸었다.
손 안에 캡슐이 없었다. 안주머니 안에 있었다. 그러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
하율이 이 년 동안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세하는 그 이 년의 무게를 지금 처음으로 제대로 느끼는 것 같았다.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의 이름을 찾았다. 전화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두 번째 신호가 끝나기 전에 하율이 받았다.
“세하 씨.”
목소리가 아직 잠에서 덜 깬 것 같았다. 그러나 세하가 전화한 것을 듣는 순간 달라지는 것이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느꼈다.
“지금 어디예요.”
세하가 말했다.
“집이요.”
“가도 돼요?”
전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네.”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아침 햇빛이 거리 위에 낮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그 빛을 밟으면서 걸었다. 하율의 집이 어디인지 세하는 알고 있었다. 이 년 전의 기억에 없는 것이었지만, 지금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성수동 파란 철문 건물. 처음 하율을 만나러 갔던 곳.
세하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하율에게 말해야 할 것이 있었다. 이 년 전에 자신이 하율의 기억도 지우려 했다는 것. 그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확인해야 했다. 그리고 기억 복원 방법이 있다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정확히 몰랐다. 기억이 없었다. 이 년 전의 감각만이 캡슐 안에 남아 있었다. 냄새와 웃음소리.
그런데 지금 이 아침에, 세하는 그것을 재생하지 않아도 걸을 수 있었다.
하율의 집 방향으로.
성수동 골목은 아침에도 조용했다.
세하는 파란 철문 앞에 섰다. 처음 왔던 날을 생각했다. 그때는 밤이었다. 문 너머에서 하율의 목소리가 먼저 왔었다. 지금은 낮이었다. 아침 햇빛이 철문 위에 비스듬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렸다. 안쪽에서 오는 소리였다. 문이 열렸다.
하율이 서 있었다. 잠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이 아직 정돈되지 않은 채였다. 그런데 세하를 보는 눈은 달랐다. 잠기운이 없었다. 이미 깨어 있던 사람의 눈이었다.
“왔어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와요.”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복도가 있었다. 하율의 방은 안쪽이었다. 세하는 그 공간을 알고 있었다. 현재의 기억 안에 있는 것이었다. 처음 왔을 때 들어왔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냄새였다.
복도를 지나면서 세하는 그것을 알아챘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무언가. 캡슐을 재생했을 때 처음으로 왔던 냄새였다. 기억 안에 없는 것이었는데.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세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방으로 들어왔다. 하율이 뒤따라 들어와 문을 닫았다. 창이 있었다. 아침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바닥 위에 빛이 기울어져 있었다.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앉지 않았다.
세하가 먼저 말했다.
“구민재 수석님한테 들은 게 있어요.”
하율이 기다렸다.
“이 년 전에 제가 기억 삭제를 의뢰할 때.” 세하가 말했다. “두 가지를 부탁했대요. 하나는 하율 씨와 관련된 제 기억 전체. 그리고 또 하나는.”
잠깐 멈췄다.
“하율 씨 기억에서도 저를 지워달라는 것이었대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하율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빠르지 않게. 천천히.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했다. 놀람인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던 것이 확인되는 것인지.
하율이 말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어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짐작했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 씨가 전날 밤에 경로를 알려줬을 때. 그 방식이. 너무 꼼꼼하게 알려줬어요. 레테에 어떻게 들어가는지.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는지. 뭘 찾아야 하는지.”
하율이 잠깐 멈췄다.
“그건 나중에 찾으러 오라는 거잖아요.” 하율이 말했다. “그런데 저한테 그걸 알려주면서, 동시에 저더러 잊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게 세하 씨가 할 것 같은 방식이라서.”
세하는 그 말의 무게를 받아들였다.
그게 세하 씨가 할 것 같은 방식이라서.
이 년 전의 자신을 하율이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를. 그래서 레테로 왔다. 세하의 처리가 끝난 직후에. 하율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세하가 말했다.
이번에는 달랐다. 22화에서 했던 말과 같은 형식이었지만, 그것과 달랐다. 그때는 기억이 없어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고 했다. 지금은 기억이 없어도 하는 말이 아니었다. 방금 들은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온 말이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기다린 것. 기억한 것. 그리고 레테에 가서 막은 것. 세하를 찾은 것. 영상을 건넨 것. 경보를 보낸 것. 그 이 년이 전부 그 눈 안에 있었다.
“세하 씨.”
“네.”
“그거.” 하율이 말했다. “당신이 나를 잊으려 했던 것이랑, 나도 잊혀지게 하려 했던 것이랑.”
하율이 잠깐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세하를 봤다.
“같은 마음에서 나온 거라는 거 알아요.” 하율이 말했다. “그래서 막긴 했는데. 화는 안 났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무서웠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 씨가 나오고 나서. 나를 모르는 얼굴로 걸어가는 거 보면서. 내가 막았는데도, 이게 끝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
방 안이 조용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구름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세하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꺼내지 않았다.
“기억 복원 방법이 있대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 수석님이. 삭제된 기억이 완전히 소거된 게 아니래요. 비활성화된 것을 다시 여는 방식이라고 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부작용이 있어요.” 세하가 이어갔다. “현재 기억과 충돌이 생길 수 있고. 되찾은 기억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그래도 할 거예요?” 하율이 물었다.
세하는 그 질문 앞에서 잠깐 멈췄다.
되찾을지 묻어둘지. 그것이 이 이야기가 시작될 때부터 있던 질문이었다. 캡슐을 처음 재생한 날부터. 병원 복도 장면을 본 날부터. 하율을 처음 만난 날부터.
그 질문이 지금 이 방 안에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이 년을 기억한 채로 기다린 사람이 지금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강요가 없었다. 세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그런데.
그 눈 안에 두려움이 있었다.
세하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는 두려움이 아니었다. 세하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하고 나서도, 그 결정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사람의 두려움이었다.
세하는 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캡슐을 꺼내지 않은 채로.
“하율 씨.”
“네.”
“아까 이 방에 들어오면서.” 세하가 말했다. “냄새가 났어요. 캡슐 재생했을 때 처음 왔던 냄새랑 같은 것이.”
하율이 세하를 봤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에요.” 세하가 말했다. “그런데 몸이 알고 있는 게 있어요. 여기 온 적 있다는 것을.”
하율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용하게 흔들렸다.
“그래서.” 세하가 말했다. “할 거예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말을 한 다음에야, 자신이 언제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는지 생각했다. 구민재와 카페에서 마주 앉았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어젯밤 작업실 창 앞에 서 있을 때부터인지. 아니면 더 전, 캡슐 안에서 자신의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부터인지.
아마 그보다 더 전이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을 이제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는 것을 처음으로 믿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런데.” 세하가 이어갔다.
하율이 기다렸다.
“되찾은 기억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그러면.”
세하가 잠깐 멈췄다.
“제가 돌아오는 기억이 이 년 전의 저예요. 지금의 저는 아니에요. 그 둘이 다를 수 있어요. 그게 하율 씨한테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싸우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이 년 동안 생각해온 것이었다.
“세하 씨.” 하율이 말했다.
“네.”
“저는 이 년 전 세하 씨를 기다린 게 아니에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세하 씨가 뭘 기억하든 기억 못 하든.” 하율이 말했다. “지금 여기 온 사람을 기다렸어요.”
방 안이 조용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 위에 가만히 있었다. 구름이 지나간 것이었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안주머니 안의 캡슐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이 방의 냄새가 거기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구민재의 이름을 찾았다.
입력했다.
― 준비해주세요.
전송했다.
화면을 내려놓으면서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 년 전부터 거기 있던 것이.
잠시 후, 구민재의 답이 왔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 한 가지만요, 세하 씨. 복원 전에 알아야 할 게 있어요. 이 년 전, 세하 씨가 부탁했던 두 번째 의뢰 말이에요. 하율 씨 기억에서 세하 씨를 지워달라는 것. 그걸 거절했다고 했죠. 그런데.
한 줄이 더 왔다.
― 완전히 거절한 건 아니었어요.
세하는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다시 느껴졌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구민재의 문자가 거기 있었다.
― 완전히 거절한 건 아니었어요.
방 안이 조용했다.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바닥 위에 가만히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들고 서 있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세하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은 것 같았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었다.
세하는 다시 화면을 봤다.
― 완전히 거절한 건 아니었어요.
그 한 줄이었다. 그다음이 없었다. 구민재가 거기서 멈춘 것이었다.
세하는 입력했다.
― 무슨 뜻이에요.
전송했다. 핸드폰을 들고 기다렸다. 신호가 오고, 답이 왔다. 빠른 답이었다.
― 하율 씨가 레테에 왔을 때 저는 처리를 멈췄어요. 그런데 멈추기 전에, 일부를 이미 건드렸어요. 전체를 지운 게 아니에요. 특정 구간만. 하율 씨가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세하 씨가 복원을 결정했으면, 하율 씨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요.
세하는 화면을 두 번 읽었다.
일부를 이미 건드렸다. 특정 구간만.
하율이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구민재도 그렇게 말했다. 전부라고.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하율 스스로도 모르는 구간이, 그 기억 안에 비어 있을 수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렸다. 천천히.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읽으려 하고 있었다. 세하의 표정이 무엇을 향해 가는지.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네.”
“구민재 수석님한테 문자가 왔어요.”
하율이 기다렸다.
“이 년 전에. 하율 씨 기억을 지워달라는 두 번째 의뢰.” 세하가 말했다. “거절했다고 했는데. 완전히 거절한 게 아니었대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자리를 바꿨다. 놀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가 아닌 어딘가에 있는 것이었다.
“일부만 처리했대요.” 세하가 이어갔다. “하율 씨가 레테에 와서 막기 전에, 특정 구간은 이미 건드렸다고.”
하율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세하는 그 눈을 봤다. 무너지지 않은 눈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오래된 방식으로 흔들렸다. 이 년 동안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믿어온 사람이, 지금 그 전제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는 것 같았다.
“어느 구간인지 알아요?” 하율이 물었다.
“말 안 해줬어요.” 세하가 말했다.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모를 수도 있다고.”
하율이 시선을 내렸다. 바닥 위에 기울어진 햇빛 쪽으로.
세하는 그 옆모습을 봤다. 이 년을 기억한 채 기다렸다고 했던 사람이 지금 그 기억의 어느 부분이 없어졌는지 모르는 채로 서 있었다. 그 구조가 무엇과 비슷한지 세하는 알았다. 기억이 없는데 없다는 것도 모르는 것. 공백의 경계가 어딘지 알 수 없는 것.
도현이 말했던 것이었다. 강서진이 말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하율이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하율 씨.”
“네.”
“확인하고 싶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두 가지가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무게를 재는 것이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알고 싶은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
“모르면 안 되는 게 있어요?” 하율이 물었다.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세하가 말했다. “하율 씨와 관련된 기억이 돌아오면. 그 기억과 하율 씨가 실제로 가진 기억이 같은 건지 확인해야 할 수 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같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세하가 이어갔다. “구민재 수석님이 말했어요. 되찾은 기억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그러면 제가 돌아오는 기억과 하율 씨의 기억이 다를 수 있고. 거기에 지워진 구간까지 있으면.”
말을 마치지 않았다. 그러나 하율은 알아들었다.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거죠.” 하율이 말했다.
“네.”
방 안이 조용했다. 창 너머에서 멀리 드론 배송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것이었다. 세하는 그 소리가 지나가는 것을 들으면서 하율을 봤다.
하율이 결정하고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재촉하지 않았다.
“확인할게요.” 하율이 말했다.
짧은 한 마디였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짧지 않았다. 이 년을 기억한 채로 기다린 사람이, 그 기억 중 일부가 없어졌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서 한 말이었다.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구민재에게 입력했다.
― 하율 씨도 확인하고 싶어해요. 어떻게 하면 돼요.
전송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 레테로 오면 돼요. 오늘 오후 괜찮아요. 세하 씨 복원 준비도 같이 시작할 수 있어요. 단, 복원은 당장 진행하는 게 아니에요. 먼저 상태 확인이 필요해요.
세하는 화면을 하율에게 보여줬다. 하율이 읽었다.
“오후에 갈 수 있어요?” 세하가 물었다.
“네.”
세하는 구민재에게 답을 보냈다.
― 갈게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서 있었다. 앉지 않은 채였다. 세하가 온 것도, 하율이 문을 열어준 것도, 그 이후 이어진 말들도 전부 서 있는 채로 이루어졌다.
세하는 창 쪽을 봤다. 햇빛이 바닥 위에 가만히 있었다. 구름이 없는 시간이었다.
“하율 씨.”
“네.”
“아까 말했잖아요.” 세하가 말했다. “이 년 전 저를 기다린 게 아니라고. 지금 여기 온 사람을 기다렸다고.”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말.” 세하가 이어갔다. “제가 기억을 되찾고 나서도 같을 것 같아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오래. 그 눈 안에서 두려움이 있었다. 세하가 24화에서 처음 알아챈 것이었다. 세하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이겠다고 결정하고 나서도, 그 결정이 흔들리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사람의 두려움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하율이 대답하기 전에, 세하가 먼저 알았다. 그 질문이 하율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세하 자신이 두려운 것이었다. 기억을 되찾고 나서 자신이 달라질 것인지. 달라진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대답을 들었다.
“솔직히.” 하율이 이어갔다. “기억이 돌아온 세하 씨가 어떨지 저도 몰라요. 지금이랑 다를 수도 있어요. 다른 부분도 있겠죠.”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율이 말했다. 잠깐 멈췄다가. “이 년 전에도 저는 세하 씨가 어떻게 될지 몰랐어요. 레테에서 나오고 나서.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살 건지. 전혀 몰랐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래도 기다렸어요.”
방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안주머니에서 손을 꺼냈다. 캡슐을 꺼내지 않은 채로.
이 방의 냄새가 있었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와 그 위에 얹힌 무언가. 캡슐 안에 있던 것이 지금 이 공기 안에 있었다. 기억이 없어도 몸이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오후에 같이 가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 년 전부터 거기 있던 것이. 지금 이 방 안에서 처음으로 같은 무게로 두 사람 사이에 놓이는 것 같았다.
세하는 창 쪽을 봤다. 햇빛이 바닥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구름이 다시 지나가는 것이었다.
오후가 남아 있었다. 레테가 남아 있었다. 구민재가 준비할 것이 있었다. 상태 확인이 먼저라고 했다. 그리고 하율의 기억 안에 어느 구간이 비어 있는지 확인해야 했다.
세하는 안주머니 안의 캡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그 안의 웃음소리가 세하 자신의 것이라고 하율이 말했다.
기억이 없어도 거기 있던 것이 있었다.
세하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도현에게 입력했다.
― 오늘 오후 레테 가요. 하율 씨도 같이요. 도현 씨도 올 수 있어요?
전송했다. 잠시 후 답이 왔다.
― 갈게요. 강서진 씨한테도 연락해둘게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강서진도 있었다. 정아로도 아직 움직이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목록이 있었다. 구민재가 먼저 가려 했던 이름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오늘 오후를 향해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율을 봤다.
“몇 시에 갈 거예요?” 하율이 물었다.
“두 시.”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직 정돈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아까 들은 것이었다. 하율 자신의 기억 안에 알 수 없는 구간이 있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무너짐이 아니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 수백 개의 기억을 다루며, 사람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순간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율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율 씨.”
“네.”
“지워진 구간이 뭔지 알게 됐을 때.” 세하가 말했다. “힘들면 말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처음으로 무언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단단하게 조여 있던 것이 한 층 얇아지는 것 같았다.
“알겠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방 안을 봤다. 창이 있었다. 햇빛이 바닥 위에 있었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의 냄새가 공기 안에 있었다.
세하는 그 냄새를 이제 이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이 없어도. 여기라는 이름이었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정아로였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문자 한 줄이었다.
― 세하 씨, 구민재가 오늘 오후 레테에서 무언가 진행하려는 것 같아요. 저도 거기 있어야 해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정아로의 문자가 거기 있었다.
― 세하 씨, 구민재가 오늘 오후 레테에서 무언가 진행하려는 것 같아요. 저도 거기 있어야 해요.
하율이 세하의 표정을 봤다. 세하는 화면을 들어 하율에게 보여줬다. 하율이 읽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하는 입력했다.
― 오후 두 시예요. 오려면 와도 돼요.
전송했다. 답이 바로 왔다.
― 고마워요.
짧은 답이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올 것 같아요.” 세하가 하율에게 말했다.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말하지 않았다. 세하도 묻지 않았다.
방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가기 전에 뭔가 먹을래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이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이상하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침 먹었어요?”
세하는 생각했다. 구민재를 만나러 카페에 갔던 것을 생각했다. 커피를 시키지 않았다.
“아니요.”
하율이 부엌 쪽으로 갔다. 세하는 방 안에 서 있었다. 그리고 잠깐 주위를 봤다.
좁은 방이었다. 책이 많았다. 창가 쪽에 낡은 의자가 하나 있었다. 바닥 위에 빛이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보다 각도가 달라져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세하는 의자 쪽으로 가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바깥을 봤다. 성수동 골목이 보였다. 사람이 드문 시간이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를 걷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의 냄새가 공기 안에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의식하지 않을수록 더 선명했다. 기억이 없는 것이 몸 안에 있었다. 그 감각이 거기 있다는 것을 세하는 이제 부정하지 않았다.
부엌에서 소리가 났다. 냄비 위에 뭔가를 올리는 소리였다.
세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재생 단자의 위치를 손이 알고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오후 한 시 사십 분이었다.
세하와 하율은 레테 빌딩 앞에 섰다. 도현이 먼저 와 있었다. 강서진이 그 옆에 있었다. 도현은 외투 안에 손을 넣은 채였다. 강서진은 숄더백을 어깨에 걸고 있었다. 세하가 오는 것을 보고 도현이 손을 들었다. 강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로 씨는요?” 도현이 물었다.
“아직이에요.” 세하가 말했다.
도현이 레테 빌딩 입구 쪽을 봤다. 자동문이 닫혀 있었다. 평일 오후였지만 사람의 드나듦이 적은 시간이었다.
“먼저 올라갈까요?”
“잠깐만요.”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정아로에게 문자를 보냈다.
― 지금 건물 앞이에요.
답이 오는 데 이 분이 걸렸다.
― 지하철역에서 나왔어요. 곧 가요.
세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율이 옆에 서 있었다. 강서진이 하율을 봤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이 년 전 같은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치고 있었다. 기억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거나, 일부가 비어 있거나, 아예 없거나. 제각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빌딩 앞에 서 있다는 것은 같았다.
정아로가 골목 끝에서 나타났다. 걸음이 빠른 편이었다. 외투를 여미면서 걸어왔다. 세하를 봤다. 그다음 하율을 봤다. 잠깐 멈추는 것 같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늦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이 분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강서진을 봤다. 강서진도 정아로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려 했다. 오래 함께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었다.
“들어가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기다리고 있는 곳은 지하 1층이었다. 레테의 기억 처리실이 있는 층이었다. 세하가 삼 년간 일한 공간이었다. 처리실 복도는 조용했다. 야간처럼 불이 절반만 켜져 있었다.
구민재가 복도 끝에 서 있었다. 다섯 명이 오는 것을 보고 가만히 서 있었다. 놀란 것이 아니었다. 예상한 것이었다.
세하가 먼저 말했다.
“다 얘기했어요. 같이 와도 된다고 했어요.”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가 구민재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도 침묵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강서진과 정아로 사이의 침묵과 달랐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는 것이었다.
“하율 씨.” 구민재가 하율을 봤다. “오셨군요.”
하율이 구민재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돼 있었다. 이 년 전 레테에 왔을 때와 다른 방식으로.
“확인하러 왔어요.” 하율이 말했다.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처리실 문 쪽으로 돌아섰다.
“하율 씨 먼저 하는 게 나아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 복원 준비는 시간이 걸려요. 오늘은 상태 확인까지예요. 진행은 이틀 뒤가 돼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이틀 뒤.
처리실 문이 열렸다. 구민재가 먼저 들어갔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세하가 하율을 봤다.
“같이 들어갈게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처리실로 들어갔다. 도현과 강서진과 정아로는 복도에 남았다.
처리실 안은 세하에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작업 의자, 추출 장비, 모니터.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던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지금 이 안에서 다루려는 것이 타인의 것이 아니었다.
구민재가 장비를 켰다. 모니터가 켜지는 소리가 났다.
“하율 씨.” 구민재가 말했다. “앉아요. 불편하지 않아요. 시간도 길지 않아요.”
하율이 작업 의자에 앉았다. 세하는 그 옆에 섰다. 구민재가 장갑을 끼면서 모니터를 봤다.
“어느 구간인지는 끝나고 나서 말할게요.” 구민재가 하율에게 말했다. “보이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억지로 끌어오는 게 아니라 상태만 보는 거예요.”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하율의 옆모습을 봤다. 이 년 동안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생각해온 사람이 지금 그 기억의 어느 부분이 비어 있는지 확인하려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이 무너지지 않았다. 그러나 단단하게 조여 있었다.
세하는 손을 뻗었다.
하율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풀렸다.
구민재가 작동을 시작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장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세하는 하율의 손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서 있었다. 모니터 화면은 보지 않았다. 하율의 얼굴을 봤다.
하율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몇 분이 지났다.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 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구민재가 멈췄다.
세하는 그것을 느꼈다. 장비 소리가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구민재의 움직임이 멈춘 것이었다.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읽혔다. 예상한 것이 아닌 것을 본 사람의 눈이었다.
“구민재 수석님.”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세하 씨.” 구민재가 말했다. “지워진 구간을 찾았어요.”
세하는 기다렸다.
“그런데.” 구민재가 말했다.
그 다음이 오지 않았다. 구민재가 다시 화면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지금 자리를 바꾸는 것 같았다.
“이 구간.” 구민재가 말했다. “제가 지운 게 아니에요.”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장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하율의 손이 세하의 손 아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구민재가 지운 게 아니었다.
그러면 누가 지운 것이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장비 소리만 낮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정리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오래 이 일을 해온 사람이 예상하지 못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제가 지운 게 아니라는 게." 세하가 말했다. "확실해요?"
"네." 구민재가 말했다. "처리 방식이 달라요. 레테의 삭제 방식은 고유한 패턴이 있어요. 비활성화 구조가 다르게 되어 있어요. 이건."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더 오래된 방식이에요."
세하는 그 말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더 오래된 방식.
레테의 기억 처리 기술은 세하가 입사한 삼 년 전에도 이미 고도화되어 있었다. 그 이전에 어떤 방식이 쓰였는지 세하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구민재는 알고 있었다. 레테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던 사람이었다.
"레테 초창기 방식이에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고개를 저었다.
"레테 밖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하율의 손이 세하의 손 아래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하는 그것을 느꼈다. 하율의 눈이 아직 감겨 있었다. 구민재가 조용히 보라고 했던 상태였다.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상태만 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처리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율 씨." 구민재가 하율에게 말했다. "지금 뭔가 보이는 게 있어요?"
하율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막 떠올랐다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흐릿하게." 하율이 말했다. "사람이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이에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잠깐 생각했다.
"세하 씨는 아니에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민재 수석님도 아니에요." 하율이 이어갔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데 낯설지 않아요. 이상하게."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무언가를 입력했다. 장비 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시간이 언제예요?" 세하가 구민재에게 물었다. "그 구간이."
"이 년 전보다 앞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삼 년에서 사 년 사이."
세하는 그 숫자를 들었다.
삼 년에서 사 년 사이. 세하가 레테에 입사한 것이 삼 년 전이었다. 그 경계 어딘가였다. 세하가 이 일을 시작하던 시점과 겹쳤다.
"하율 씨가 레테와 접점이 생긴 게 언제예요?" 세하가 하율에게 물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세하 씨를 통해서였어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 씨가 여기서 일하기 시작하고 나서. 그러니까 삼 년쯤 전이에요. 처음 얘기를 들은 게."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삼 년 전. 세하가 입사한 해. 그리고 하율의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의 끝이 그 언저리였다.
"구민재 수석님." 세하가 말했다. "그 구간 안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무게를 재고 있었다.
"일부는 볼 수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런데 세하 씨."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이 구간과 연결된 다른 파일이 있을 수 있어요. 하율 씨 기억에만 있는 게 아니라." 구민재가 말했다. "그 파일이 어디 있는지 저는 알 수 없어요. 레테 시스템 안에 없어요. 제가 처리한 것이 아니라서."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천천히 펼쳐봤다.
레테 밖의 방식으로 지워진 것. 레테 시스템 안에 없는 것. 구민재가 알지 못하는 것.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지만 낯설지 않은 사람이 하율의 흐릿한 기억 안에 있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꺼내지 않았다.
복도에 도현이 있었다. 강서진이 있었다. 정아로가 있었다.
정아로.
세하는 그 이름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위치에 놓이는 것을 느꼈다. 레테 내부 감사팀. 레테 외부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제기됐던 사람. 강서진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이 구민재의 짓이었다. 도현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도 구민재의 짓이었다. 세하 자신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도 구민재였다.
그런데 하율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은 구민재가 아니었다.
레테 밖의 방식으로. 더 오래된 방식으로.
"잠깐 나갔다 올게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세하는 하율의 손을 한 번 쥐었다가 놓았다. 그리고 처리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로 나왔다. 도현이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강서진이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정아로가 창문 쪽에 서서 바깥을 보고 있었다.
세하가 나오는 소리를 듣고 정아로가 돌아섰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네."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정아로가 기다렸다. 그 눈 안에서 아무것도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레테 이전에." 세하가 말했다. "기억 처리 기술을 쓴 곳이 또 있었어요?"
복도가 조용해졌다. 도현이 벽에서 등을 떼었다. 강서진이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아주 빠르게. 그러나 세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사람이 무언가를 감추려는 순간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물어보는 거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 수석님이 한 게 아니에요. 레테 밖의 방식으로 처리됐대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천천히, 오래 버텨온 것이 자리를 바꾸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아로가 입을 열었다.
"레테가 생기기 전에." 정아로가 말했다. "전신 기관이 있었어요. 민간이 아니었어요."
복도가 조용했다.
"정부 연구소였어요." 정아로가 이어갔다. "지금 레테의 기반 기술이 거기서 나왔어요. 그 연구소가 해체되면서 인력 일부가 레테로 왔어요. 구민재 수석도 그중 하나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정아로가 말했다. 잠깐 멈췄다가. "저도요."
도현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서진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아닌, 더 오래된 것이 이제 바깥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그 연구소에서." 세하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을 건드린 거예요?"
정아로가 시선을 내렸다.
바닥 위에 기울어진 복도 조명이 있었다. 정아로가 그것을 보고 있었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런데 막지 못했어요."
처리실 쪽에서 장비 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세하는 손 안의 아무것도 없는 것을 쥐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캡슐은 안주머니 안에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하율의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 있었다. 구민재가 한 것이 아니었다. 레테가 생기기 전부터 있던 기관의 방식으로 처리된 것이었다. 그리고 정아로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막지 못했다고 했다.
세하는 그 구조 안에서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율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이 무엇인지. 누가 지시한 것인지. 그리고 정아로가 레테에 들어온 진짜 이유가 내부 고발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막기 위한 것인지.
세하는 처리실 문 쪽을 봤다.
하율이 저 안에 있었다. 구민재가 저 안에 있었다.
세하는 정아로를 다시 봤다.
"지금 들어가서 같이 얘기해야 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오래 감춰온 것을 이 자리에서 꺼내는 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지 알면서도, 그것을 감수하는 방향으로.
"알겠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는 처리실 문을 열었다.
안쪽에서 장비 소리가 들려왔다. 하율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민재가 화면을 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돌아섰다.
정아로를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복도에서와는 다른 침묵이었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같은 곳에서 출발한 사람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었다.
하율이 정아로를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세하는 하율의 옆으로 갔다. 손을 다시 하율의 손 위에 얹었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조금 더 들어야 할 게 있어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세하의 손이 닿아 있었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어 정아로를 봤다.
"오래됐네요." 구민재가 말했다.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다.
정아로가 구민재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했다.
"네." 정아로가 말했다. "말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장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세하는 하율의 손을 쥔 채로 기다렸다.
정아로가 입을 열었다.
정아로가 입을 열었다.
"그 연구소 이름은 기억원이었어요."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감정을 실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담아둔 것을 이제 순서대로 꺼내려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2050년대 초에 정부 주도로 만들어졌어요. 공식 목적은 외상 후 스트레스 치료였어요. 전쟁이 있었고, 재난이 있었고, 지워야 할 기억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때만 해도 기억 처리 기술은 민간에 없었어요. 국가가 쥐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듣고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저는 스물다섯에 거기 들어갔어요." 정아로가 이어갔다. "처음에는 정말 치료가 목적인 줄 알았어요. 외상을 가진 사람들의 기억을 다루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정아로가 잠깐 멈췄다.
"이 년쯤 지나니까 알게 됐어요. 의뢰인 중에 치료가 필요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하율이 정아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흐릿하게만 보인다고 했던 그 사람의 윤곽이, 지금 이 목소리 안에서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어떤 사람들이요." 세하가 물었다.
"특정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연구소 내부의 일을 알게 된 사람들. 기술이 어디에 쓰이는지 알아버린 사람들. 그 사람들의 기억이 조용히 처리됐어요. 동의 없이."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장비 소리만 낮게 깔렸다.
"하율 씨가 그중 하나예요." 정아로가 하율을 봤다. "하율 씨가 기억원과 접점이 생긴 건 세하 씨 때문이 아니에요. 순서가 반대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율이 정아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그런데 그 이 년보다 더 오래된 것이 지금 자리를 바꾸려 하고 있었다.
"제가." 하율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원을 먼저 알았어요?"
"네." 정아로가 말했다. "사 년 전이에요. 하율 씨가 기억원 내부 자료를 외부로 가져가려 했어요. 어떤 경로로 접근했는지는 저도 몰라요. 그런데 감지됐고, 처리됐어요."
세하는 손 안에 하율의 손이 있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그 손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정아로가 이어갔다. "그 이후에 하율 씨가 세하 씨를 만났어요. 처리된 채로. 그 기억이 없는 채로."
구민재가 처음으로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정아로를 봤다.
"당신이 막지 못했다는 게." 구민재가 말했다. "그 처리를."
"제가 감지한 게 하루가 늦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이미 진행된 다음이었어요."
구민재가 다시 화면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재조립되고 있었다. 이 년 전 하율이 레테에 왔을 때. 세하의 처리가 끝난 직후에. 자신의 기억을 지우지 말라고 했을 때. 구민재가 하율을 처음 만난 그 자리에서, 하율의 기억 안에 이미 다른 손이 닿아 있었다는 것을.
"기억원이 지금도 있어요?" 세하가 물었다.
"공식적으로는 해체됐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레테가 설립되면서. 그런데 인력이 흩어진 거예요. 기술이 사라진 게 아니에요."
"흩어진 인력 중에." 세하가 말했다. "지금도 움직이는 사람이 있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마지막 무게를 재고 있었다.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율 씨 기억을 처리한 사람이에요. 기억원 시절 기술 책임자였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이름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 오지 않았다. 한 박자가 지났다. 그 박자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름을 말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박자였다.
"박진술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구민재가 모니터에서 손을 뗐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구민재의 손이 장비에서 떨어지는 것을. 그 움직임이 작았다. 그러나 세하는 삼 년간 구민재의 동작을 봐온 사람이었다. 구민재가 멈추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알아요?" 세하가 구민재에게 물었다.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기억원에서 같이 일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제가 레테로 옮길 때 그 사람은 오지 않았어요. 방향이 달랐어요."
"방향이요." 세하가 말했다.
"레테는 기억을 맡아두는 것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박진술은 다른 방향을 원했어요. 기억을 재구성하는 것. 삭제에 그치는 게 아니라 덮어쓰는 것."
세하는 그 말의 의미를 천천히 펼쳐봤다. 삭제가 아닌 재구성. 비활성화가 아닌 덮어쓰기.
"하율 씨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 세하가 말했다. "덮어씌워진 것도 있어요?"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다시 장비에 손을 올렸다. 잠시 작동 소리가 달라졌다.
"확인해볼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있어요."
세하는 하율의 손을 쥔 채로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전부 있었다. 그런데 그 이 년보다 더 앞의 어느 지점에, 자신도 모르는 것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지금 처음으로 알아가고 있었다.
"뭐가 덮어씌워진 거예요." 하율이 물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세하의 손 아래에서 하율의 손이 아주 조금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구민재가 화면을 오래 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사람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 안에서 특정 사람의 존재가 지워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진 것이 있어요."
"어떤 사람이요." 하율이 말했다.
구민재가 하율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마지막으로 내려놓는 것 같았다.
"박진술 본인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 씨가 그 사람을 알고 있었어요. 사 년 전에. 그리고 그것이 지워졌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가 바닥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막지 못했다고 했던 말의 무게가 지금 바닥 위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하율이 아는 사람이었다. 사 년 전에. 기억원 내부 자료를 가져가려 했을 때 접점이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 기억이 그 사람 자신의 손에 의해 지워졌다.
세하는 손 안에 캡슐이 없다는 것을 느꼈다. 안주머니 안에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웃음소리가 거기 있었다. 기억 안에 없는 것이 거기 있었다.
그리고 하율의 기억 안에, 하율 자신도 모르는 이름이 있었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 있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았다.
"레테 외부에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런데."
정아로가 잠깐 멈췄다.
"세하 씨 기억 복원이 시작되면, 알게 될 거예요."
세하는 그 말의 방향을 읽었다.
"제가 그 사람을 알아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장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세하는 하율의 손을 쥔 채로 서 있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을 기다려온 사람이 지금 자신이 기다려온 것이 처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이틀 뒤가 준비 완료라고 구민재가 했다.
세하는 그 이틀이 지금보다 훨씬 짧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리실을 나온 것은 오후 네 시가 넘어서였다.
세하는 복도 끝 창가에 서 있었다. 하율이 그 옆에 있었다. 도현과 강서진은 복도 중간 쪽에 앉아 있었다. 정아로는 처리실 문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구민재는 아직 안에 있었다. 장비를 정리하는 소리가 문 너머로 낮게 들렸다.
세하는 창 밖을 봤다. 레테 빌딩 지하 1층의 창은 지상과 거의 수평이었다. 사람들의 발목이 지나갔다. 드론 배송 차량의 바퀴가 지나갔다. 그것들이 규칙적으로 스쳐갔다.
하율이 세하 옆에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처리실 안에서 들은 것들이 아직 자리를 잡지 않은 채였다. 박진술이라는 이름. 기억원. 사 년 전의 하율. 그리고 세하 자신이 그 사람을 알고 있을 수 있다는 것.
세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서 여러 번 발음해봤다.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기억이 없었다. 이름을 들어도 반응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세하 씨."
하율이 말했다.
"네."
"지금 어때요."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지금 어떠냐는 물음이 어느 방향의 것인지 알고 있었다. 기억 복원 준비가 오늘부터 시작됐다는 것에 대해서. 박진술이라는 이름이 자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모르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무서워요?"
세하는 잠깐 생각했다. 무서운지 아닌지를 진단하듯이 따져봤다. 기술자의 방식이었다.
"무섭다기보다는." 세하가 말했다. "이틀이 남았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니까."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오래된 것을 건드렸다.
"저도 그랬어요." 하율이 말했다. "이 년 전에. 세하 씨가 레테에서 나오고 나서. 다음 날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냥 하루가 실감이 안 났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어요." 하율이 이어갔다. "실감이 날 때까지."
처리실 문이 열렸다. 구민재가 나왔다. 외투를 손에 들고 있었다.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무너진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다 꺼내고 난 뒤의 얼굴이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오늘 확인한 거 정리해뒀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이틀 뒤 진행 전에 세하 씨 상태 기록이 하나 더 필요해요. 내일 아침에 잠깐 올 수 있어요?"
"네."
"하율 씨는." 구민재가 하율을 봤다. "오늘 확인한 구간, 나중에 세하 씨 기억과 맞춰볼 수 있어요. 원하면요. 강제하는 게 아니에요."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구민재가 정아로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침묵이 있었다. 처리실 안에서 나누지 못한 것들이 그 침묵 안에 들어 있었다.
"박진술이 어디 있는지." 구민재가 말했다. "알아요?"
정아로가 구민재를 봤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육 개월 전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레테 외부. 기억원 해체 이후에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의뢰를 받아서 처리하는 방식으로."
"의뢰인이 누군지 알아요?"
정아로가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다시 들었다.
"일부만요."
구민재가 그 대답을 들었다. 더 묻지 않았다. 지금 이 복도에서 모든 것을 다 꺼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도현이 일어섰다.
"세하야."
도현이 세하를 봤다. 오래된 방식으로 이름을 불렀다. 기억이 없어도 세하가 그 방식을 알아채는 것 같은 무언가가 있었다.
"이틀 동안 뭔가 필요하면 연락해."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전달됐다. 자신도 기다리는 사람이라는 것이. 기억 복원이 세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사람들이 복도에서 흩어졌다. 구민재가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갔다. 도현이 강서진과 함께 뒤따랐다. 정아로가 잠깐 세하를 봤다가,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 세하와 하율만 남았다.
세하는 창가에 서 있었다. 창 너머 발목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율이 세하 옆에 있었다.
"박진술이라는 이름." 세하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와요. 기억에."
"올 수도 있어요." 하율이 말했다. "이틀 뒤에."
"그게 무서운 건지도 모르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이름을 들었는데 아무것도 안 오는 것이 지금은 당연한데, 이틀 뒤에는 당연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다는 게."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이름이 세하 씨 기억 안에 있으면." 하율이 말했다. "저도 알게 되는 거예요. 그 사람이 어떻게 세하 씨랑 연결돼 있는지."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정아로가 대답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세하가 박진술을 아느냐는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것이 대답이었다고 세하는 읽었다. 그러나 어떻게 아는 것인지는 아직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 접점이 있는 것인지.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재생 단자의 위치를 손이 알고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하율 씨."
"네."
"이틀 동안." 세하가 말했다. "뭔가 생각나면 말해줄 수 있어요? 처리실에서 흐릿하게 보인다고 했잖아요. 모르는 사람. 낯설지 않은."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자리를 잡았다.
"생각나면요." 하율이 말했다. "말할게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복도에 서 있었다. 장비 소리가 다 꺼진 처리실 문이 닫혀 있었다. 복도 조명이 낮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손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틀이 있었다. 그 이틀이 무엇을 가져올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했다. 단계별로 온다고 구민재가 했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이 복도에 서 있는 것이, 이틀 뒤의 것을 기다리는 방식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시작된 것 같았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구민재에게 입력했다.
― 내일 아침 몇 시예요.
답이 빠르게 왔다.
― 아홉 시. 처리실로 오면 돼요. 길지 않아요. 그리고 세하 씨.
한 줄이 더 왔다.
― 오늘 밤 캡슐 다시 재생해봐요. 아까 처리실에서 확인한 것들이랑 연결되는 게 있을 수 있어요. 억지로 꺼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놔두면 오는 게 있을 거예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의 핸드폰 화면을 봤다. 읽은 것 같았다.
"집에 갈게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깐 세하를 봤다.
"세하 씨."
"네."
"오늘 밤에." 하율이 말했다. "뭔가 오면. 무서우면 연락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 말 안에 이 년이 들어 있었다. 이 년 전에는 할 수 없었던 말이었다. 세하가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율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자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알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었다. 발소리가 혼자였다. 지하 1층 복도가 뒤에 남았다.
집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여섯 시였다. 세하는 외투를 걸고 안주머니에서 캡슐을 꺼냈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이 조명 아래에서 빛을 반사했다.
세하는 의자에 앉아서 캡슐을 봤다.
도현이 만든 것.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오래된 나무와 먼지 냄새. 웃음소리. 하율이 자신의 방이었을 거라고 했다.
세하는 재생 단자에 손가락을 올렸다.
눌렀다.
냄새가 먼저 왔다. 오래된 나무와 먼지. 그 위에 얹힌 무언가. 하율의 방의 공기였다. 세하는 그것을 이제 이름 붙일 수 있었다. 오늘 낮에 그 방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웃음소리가 왔다. 세하 자신의 것이라고 하율이 말했던 그것이.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웃음소리 뒤에, 처음에는 없던 것이 왔다.
목소리였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세하의 것이 아니었다. 하율의 것도 아니었다.
단어가 선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음절이 들렸다.
세하는 재생을 멈추지 않았다. 그 두 음절을 다시 들으려 했다.
왔다.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목소리가 말한 것은 이름이었다.
자신의 이름이었다.
세하가 아니었다.
캡슐이 꺼졌다. 재생이 끝난 것이었다. 세하는 테이블 위에 캡슐을 내려놓았다.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목소리가 기억 안에 없었다. 그러나 들은 적이 있다는 감각이 몸 안에서 왔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구민재에게 입력했다.
― 캡슐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전에 없던 거예요.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는데, 제 이름이 아닌 것 같았어요. 두 음절이었어요.
전송했다.
답이 오는 데 오 분이 걸렸다.
― 내일 아침에 얘기해요. 그리고 세하 씨, 그 두 음절 기억해둬요. 이틀 뒤 복원이 시작되면 그게 첫 번째 실마리가 될 수 있어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두 음절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발음해봤다. 기억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몸이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테이블 위의 캡슐이 조명 아래에서 가만히 있었다.
이틀이 있었다.
그날 밤 세하는 오래 잠들지 못했다.
테이블 위에 캡슐이 있었다. 조명을 끄지 않았다. 캡슐의 표면이 낮은 빛을 반사하며 가만히 있었다. 세하는 침대에 누운 채로 그것을 봤다. 재생하지 않았다. 이미 들은 것이 귀 안에 남아 있었다.
두 음절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머릿속에서 다시 꺼내려 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세하의 것도 하율의 것도 아닌. 웃음소리 뒤에 왔던 것. 그 목소리가 부른 이름이 세하가 알고 있는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다는 감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두 음절이 무엇인지 세하는 확신하지 못했다.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떠올리려 하면 윤곽이 흐릿해졌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온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자로 삼 년을 일하며 알고 있었다. 신체 감각으로 각인된 것은 논리적으로 꺼내려 할수록 흐려졌다. 그냥 놔두면 다시 오는 것이었다. 구민재가 그렇게 말했다.
억지로 꺼내려는 게 아니라, 그냥 놔두면 오는 게 있을 거예요.
세하는 눈을 감았다. 꺼내려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두 음절이 왔다.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놓치지 않았다.
‘세나’였다.
세하는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조명이 낮게 켜진 방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 두 음절이 방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공기 안에 스며든 것처럼.
세나.
세하가 아니었다. 그러나 비슷한 것이었다. 한 글자가 달랐다. 그것이 별명인지, 다른 이름인지, 아니면 잘못 들은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몸 안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세하는 핸드폰을 집었다. 구민재에게 보낸 문자가 아직 화면에 있었다. 그 아래에 구민재의 답이 있었다.
그 두 음절 기억해둬요.
기억했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율의 이름을 찾았다가, 보내지 않았다. 뭔가 오면 연락하라고 했다. 무서우면이라고 했다. 지금 이것이 무서운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무서운 것과 다른 것이 같이 있었다. 오래된 방식으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 그 목소리가 낯설지 않다는 감각이 있었다는 것.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캡슐 옆에.
그리고 불을 껐다.
다음 날 아침 여덟 시 오십 분이었다.
세하는 처리실 앞 복도에 서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구민재가 아직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장비를 준비하는 소리가 낮게 들렸다.
복도가 조용했다. 어제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지금은 없었다. 도현도, 강서진도, 정아로도, 하율도. 세하 혼자였다.
문이 열렸다. 구민재가 나왔다가 세하를 보고 멈췄다.
“왔어요. 들어와요.”
처리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젯밤과 달리 장비가 절반만 켜져 있었다. 모니터 하나. 추출 장비 대신 작은 단말기 하나. 간단한 상태 확인용이었다.
구민재가 의자 쪽을 가리켰다. 세하가 앉았다.
“어젯밤 문자 봤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단말기를 켜면서였다. “목소리가 들렸다고.”
“네.”
“두 음절이 뭔지 알아냈어요?”
세하는 잠깐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세나요.”
구민재의 손이 멈췄다. 단말기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이. 아주 짧게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세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알아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말할 것과 말하지 않을 것 사이에서.
“알아요.” 구민재가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게 제 이름이에요?” 세하가 물었다.
“이름이 아니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런데 이름처럼 쓰였어요. 특정 사람이 세하 씨를 부르던 방식이에요.”
“박진술이요.”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게. 무게가 있는 동작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박진술이 세하를 세나라고 불렀다. 그 목소리가 캡슐 안에 있었다. 도현이 담아둔 것이었다.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오래된 나무와 먼지와 웃음소리와 함께.
그 이름이 하율의 방에서 들렸다.
“박진술이 하율 씨 방에 있었어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잠깐 말이 없었다.
“저도 다 알지 못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시점에 세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 그건 세하 씨 기억이 돌아와야 알 수 있는 것이에요. 제가 처리한 게 아니라서.”
“그런데 그 이름은 알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기억원에서 박진술이 세하 씨를 그렇게 불렀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가 그 사람을 처음 만난 게 레테 입사 직전이에요. 제가 세하 씨를 채용하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접촉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레테 입사 직전. 구민재가 채용하기 전에. 박진술이 먼저.
“왜요.” 세하가 말했다.
“세하 씨가 기억 처리 기술 쪽에 적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겠죠.” 구민재가 말했다. “기억원이 해체되던 시점이었어요. 인력을 붙잡아두려 했거나.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거나.”
“다른 목적이요.”
구민재가 단말기를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이틀 뒤에 알게 될 거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제가 추정할 수 있는 것을 지금 말하는 것보다, 세하 씨 기억에서 직접 오는 것이 더 정확해요.”
세하는 그 말의 방향을 읽었다. 구민재가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틀 뒤를 위해서 남겨두는 것이었다.
세하는 더 묻지 않았다.
“상태 확인 시작할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오래 안 걸려요.”
단말기가 작동했다. 낮은 소리가 났다. 세하는 등받이에 기대었다. 눈을 감지 않았다. 모니터 화면의 끝을 봤다. 구민재가 무언가를 기록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나.
그 두 음절이 아직 귀 안에 남아 있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박진술의 것이라고 구민재가 말했다. 기억 안에 없는 목소리가 몸 안에서 낯설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세하는 지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게 된다는 것은 알았다.
이틀 뒤.
구민재가 작동을 멈췄다. 기록이 끝난 것이었다.
“이상 없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모레 오전 열 시. 여기로 오면 돼요.”
세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민재 수석님.”
“네.”
“박진술이 지금 무언가를 진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제 복원과 관련해서.”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멈췄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정아로 씨가 어제 말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제 복원이 시작되면 알게 될 거라고. 그 사람이 어떻게 저와 연결돼 있는지. 그 말이.”
세하가 잠깐 멈췄다.
“제가 기억을 되찾는다는 게 그 사람한테도 무언가를 의미할 수 있다는 것처럼 들렸어요.”
구민재가 세하를 오래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재조립되고 있었다.
“정아로한테 물어봐요.” 구민재가 말했다.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이 대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리실 문을 열었다.
복도가 조용했다. 발소리가 혼자였다.
세하는 걸으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정아로의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멈췄다.
문자 대신 전화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두 번. 세 번.
정아로가 받지 않았다.
네 번째 신호가 끝나기 전에 문자가 왔다.
정아로였다.
— 지금 통화 어려워요. 이따가 연락할게요.
세하는 그 문자를 봤다. 그리고 한 줄을 보냈다.
— 박진술이 제 복원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전송했다.
답이 오지 않았다.
세하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으면서 화면을 들고 있었다. 답이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세하가 탔다. 문이 닫혔다.
1층 버튼을 누르면서 화면을 봤다.
답이 왔다.
문자가 아니었다.
정아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세하는 받았다.
“세하 씨.” 정아로의 목소리였다. 통화 어렵다고 했던 목소리와 달랐다. 낮고 빠른 목소리였다. “그 질문, 어디서 온 거예요.”
“구민재 수석님한테 박진술이 저를 세나라고 불렀다고 들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캡슐에서 그 목소리가 들렸고요.”
전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언제 들렸어요.”
“어젯밤이요.”
침묵이 다시 왔다. 이번에는 더 길었다.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그 사람이 알 수 있느냐고 물은 거예요. 제가 기억 복원을 앞두고 있다는 걸.”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다. 문이 열렸다. 세하는 내리지 않았다.
“알 수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문이 다시 닫혔다.
“어떻게요.”
“캡슐이요.” 정아로가 말했다. “도현 씨가 구민재한테 부탁해서 만든 그 캡슐. 그게 레테 공식 방식이 아니에요. 구민재가 기억원 시절 기술로 만든 거예요. 기억원 기술에는 추적 경로가 있어요. 재생이 되면 신호가 나가요. 아주 약하지만.”
세하는 손 안의 핸드폰을 느꼈다.
“그러면.” 세하가 말했다.
“어젯밤에 재생했으면.” 정아로가 말했다. “그 사람이 감지했을 수 있어요. 세하 씨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캡슐이 활성화됐다는 건.”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렸다.
세하는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담아둔 것.
그것이 신호를 내보냈다면.
“세하 씨.” 정아로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왔다. “오늘 낮에 봐야 해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이틀 뒤 복원 전에.”
세하는 1층 로비를 봤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평범한 오전이었다.
“어디서요.” 세하가 물었다.
“레테 말고 바깥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제가 정할게요. 문자로 보낼게요.”
전화가 끊겼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렸다. 그리고 잠깐 서 있었다.
안주머니 안의 캡슐이 느껴졌다.
이틀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충분한지 세하는 지금 알 수 없었다.
정아로가 지정한 장소는 레테에서 두 정거장 거리의 작은 카페였다.
지하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면 낮은 천장과 좁은 테이블들이 있었다. 점심 전 시간이라 손님이 적었다. 구석 자리에 정아로가 먼저 와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이 앞에 있었다. 거의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세하가 자리에 앉았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캡슐 가져왔어요?”
세하는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네.”
“오늘부터 재생하지 마요.” 정아로가 말했다. “복원 끝날 때까지. 신호가 나가면 안 돼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물었다.
“어젯밤 재생했을 때 신호가 나갔으면, 그 사람이 지금 무언가를 하고 있을 수 있어요?”
정아로가 커피잔을 봤다. 손으로 감싸듯 쥐었다가 놓았다.
“박진술은 오래 기다리는 사람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신호 하나로 바로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잠깐 멈췄다.
“세하 씨 복원이 진행된다는 걸 알게 되면, 그건 달라요.”
“왜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 묵힌 것을 순서대로 꺼내려는 사람의 것이 있었다.
“세하 씨가 기억을 되찾으면.” 정아로가 말했다. “박진술이 했던 일이 증언이 돼요. 기억원 시절의 것들이. 그 사람이 가장 오래 숨겨온 것들이.”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제가 증인이 돼요?”
“증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면.”
카페 안이 조용했다.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세하는 테이블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그 사람이 저를 레테 입사 전에 먼저 접촉했다고 구민재 수석님이 말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이유가 기술 쪽 적성 때문인지, 다른 목적인지 모른다고 했는데.”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다른 목적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뭔데요.”
정아로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것이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순서로 말해야 하는지를 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하 씨 어머니 알아요?”
세하는 그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돌아가셨어요. 제가 스물둘 때.”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알아요?”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하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거리를 재는 것처럼.
“병이요.” 세하가 말했다. “오래 아프셨어요.”
“기억원에 간 적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어머니가.”
처리실 밖 세상처럼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기억 안에서 어머니가 기억원에 갔다는 것은 없었다. 오래 병원에 있었다. 병원 복도가 기억 안에 있었다. 그러나 기억원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모르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그게 왜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기억원은 치료 목적으로만 운영되지 않았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어떤 의뢰인들은, 가족이 대신 의뢰했어요. 본인 동의 없이. 그게 가능한 구조였어요. 당시에.”
세하는 테이블 위의 손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느꼈다.
“세하 씨 어머니가 기억원에서 처리를 받았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 오래된 것이 무게를 내려놓는 소리가 있었다. “의뢰한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에요.”
“누구예요.”
정아로가 잠깐 세하를 봤다. 그리고 말했다.
“박진술이에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계단 위쪽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가 멀어졌다. 세하는 테이블 위를 봤다. 손이 거기 있었다. 차가웠다.
“어머니가 무슨 기억을 지운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지운 게 아니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덮어씌운 거예요. 박진술의 방식으로.”
세하는 28화에서 들은 것을 떠올렸다. 삭제가 아닌 재구성. 비활성화가 아닌 덮어쓰기. 하율의 기억 안에서 박진술 본인이 지워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진 것.
“어머니 기억 안에서.” 세하가 말했다. “무엇이 덮어씌워진 거예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세하 씨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카페 안은 그대로였다. 낮은 조명, 좁은 테이블,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 그런데 세하의 손 아래에서 테이블 표면이 아주 멀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 왔다.
“어머니 기억에서 저를 지운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네.”
“이유가요.”
정아로가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 커피잔을 봤다. 그리고 다시 세하를 봤다.
“세하 씨 어머니는 기억원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리고 박진술이 그것을 알았어요. 세하 씨 어머니가 그것을 세하 씨한테 전달하기 전에 막은 거예요.”
세하는 그 구조를 천천히 펼쳐봤다.
어머니가 알고 있었다. 기억원이 어떤 곳인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리고 세하에게 그것을 말하려 했다. 그래서 박진술이 어머니 기억 안에서 세하를 지웠다. 말할 대상을 없애는 방식으로.
“어머니가 나한테 말을 못 하셨던 게.”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이 없어서였어요. 내가 누군지.”
정아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세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테이블 위를 봤다. 커피잔이 거기 있었다. 시키지 않았다. 손이 차가웠다.
병원 복도가 기억 안에 있었다. 오래 아프셨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 복도에서 어머니가 세하를 보던 눈이 어떤 눈이었는지 세하는 지금 생각할 수 없었다. 기억 안에 있는 것인데 지금 꺼낼 수가 없었다. 꺼내면 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제가 레테에 들어온 것도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유도한 거예요?”
“세하 씨를 가까이 두는 게 유리했겠죠.” 정아로가 말했다. “알고 있는 사람을 시야 안에 두는 방식으로. 그런데 구민재가 중간에 채용한 거예요. 박진술 의도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그거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구민재가 중간에. 그래서 구민재와 박진술의 방향이 달라진 것이, 단순히 기술적 방향성의 차이만이 아니었을 수 있었다.
“구민재 수석님이 이것을 알고 있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일부는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 씨 어머니가 기억원 의뢰인이었다는 건 알아요. 박진술이 무엇을 덮어씌웠는지는 저도 이 년 전에야 알았어요.”
“어떻게 알았어요.”
정아로가 잠깐 침묵했다.
“도현 씨가 찾아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기억이 강제 삭제되기 전에. 레테 내부를 조사할 때 기억원 연결 파일까지 접근했어요. 그게 세하 씨 어머니 파일이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21화의 영상을 떠올렸다. 세하·도현·강서진이 레테 비공식 삭제 서비스 목록을 외부로 빼내려 했던 것. 그리고 세하가 영상 안에서 말했던 것.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이후 잘린 클립.
그 문장의 나머지가 지금 오고 있었다.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어머니한테 한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세하는 손을 안주머니에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재생하지 말라고 정아로가 했다.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손 안에 쥐었다.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네.”
“이것을 왜 지금 말하는 거예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마지막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틀 뒤에 복원이 시작되면.”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 씨가 이것을 기억 안에서 꺼내게 될 거예요. 그때 아무 준비 없이 오는 것보다. 미리 알고 있는 게 나아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게 전부예요?”
정아로가 잠깐 말이 없었다.
“아니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핸드폰을 꺼내 놓았다. 화면을 열었다. 무언가를 세하 쪽으로 밀었다.
세하가 화면을 봤다.
문자 내역이었다. 수신자는 정아로였다. 발신자 이름이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번호만 있었다. 그런데 세하는 그 번호를 봤다. 그리고 손 안의 캡슐이 아주 조금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딘가에서 본 번호였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알고 있는 번호였다.
“이게.” 세하가 말했다.
“어젯밤에 왔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캡슐 신호가 나간 다음에.”
세하는 화면 안의 문자를 읽었다.
— 세나가 돌아오려는 것 같군요. 이번엔 내가 먼저예요.
카페 안이 조용했다.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가 멀게 들렸다.
세하는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정아로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막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는 막겠다는 것이 있었다.
이틀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지금 훨씬 짧아진 것 같았다.
세하는 정아로의 핸드폰을 다시 봤다.
— 세나가 돌아오려는 것 같군요. 이번엔 내가 먼저예요.
문자는 짧았다. 그러나 그 짧음 안에 무언가가 가득 들어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읽으면서 손 안의 캡슐이 아직 거기 있다는 것을 느꼈다. 꺼내지 않았다.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손 안에 쥐고 있었다.
“이 번호가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는 그 번호를 한 번 더 봤다. 기억 안에 없는 번호였다. 그러나 몸이 알고 있다는 감각이 어딘가에서 왔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캡슐에서 목소리가 들렸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번호를 본 적이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확인하듯이. “어딘가에서.”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레테 입사 서류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비상 연락처란에 적혀 있었어요. 세하 씨가 직접 적은 거예요.”
처리실 기계 소리가 아닌, 카페 안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세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손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캡슐이 손바닥 안에 있었다.
비상 연락처. 세하가 직접 적은 것.
레테에 입사할 때 세하는 박진술의 번호를 비상 연락처에 적었다. 가족이 아닌. 그 사람의 번호를.
“그때 저는 그 사람을 믿고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질문이 아니었다.
“그랬을 거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 씨를 지운 사람이 동시에 세하 씨한테는 가장 가까운 사람처럼 있었으니까. 그게 그 사람이 쓰는 방식이에요. 가까이 두는 것.”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테이블 위를 봤다. 커피잔이 거기 있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정아로의 것이었다. 거의 식어 있었다.
“이틀 뒤에.” 세하가 말했다. “기억이 돌아오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구체적으로 알게 될 거예요.”
“네.”
“그게 박진술한테 위협이 돼요.”
“증언이 되니까요.” 정아로가 말했다. “기억원이 무엇을 했는지. 그 사람이 개인적으로 무엇을 해왔는지. 세하 씨 기억 안에 그것이 있어요. 세하 씨가 레테 입사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들이.”
세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면.” 세하가 말했다. “제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 그 사람이 무언가를 하려는 거예요?”
정아로가 시선을 내렸다. 테이블 위를 봤다. 그리고 다시 세하를 봤다.
“이번엔 내가 먼저라고 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 말이.”
잠깐 멈췄다.
“복원을 막겠다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먼저 오겠다는 건지. 저도 지금 알 수 없어요.”
세하는 그 말의 두 방향을 천천히 펼쳐봤다. 복원을 막는 것. 또는 다른 방식으로 먼저 오는 것. 어느 쪽이든 이틀 안이었다.
“구민재 수석님은 알아요?”
“문자 내용은 몰라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런데 박진술이 움직일 가능성은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을 거예요. 같이 일한 사람이니까.”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구민재의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멈췄다.
구민재가 정아로한테 물어보라고 했다. 박진술이 움직일 가능성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으면서 정아로에게 미룬 것이었다. 아니면 정아로가 말할 수 있는 것들이 구민재보다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네.”
“박진술이 다른 방식으로 먼저 온다는 게.” 세하가 말했다. “지금 제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를 통할 수도 있어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잠깐 흔들렸다.
세하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사람이 무언가를 감추려는 순간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아로 씨.”
“가능성은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낮고 빠른 목소리였다. “그런데 제가 지금 확신하는 게 아니에요. 섣불리 말하면 세하 씨가 잘못된 방향으로 의심하게 될 수 있어요.”
“말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강서진 씨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제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그런데 강서진 씨가 기억원과 접점이 있었던 게 저를 통해서만이 아니에요.”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가 멀게 들렸다.
“강서진 씨가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강서진 씨한테 접근한 적이 있어요. 기억원 시절에. 저도 나중에 알았어요. 그리고 강서진 씨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 구민재가 한 게 맞는지.” 정아로가 잠깐 멈췄다. “저는 지금 확신하지 못해요.”
세하는 테이블 위에 손을 올린 채로 정아로를 봤다.
강서진.
20화 로비에서 처음 봤을 때 어깨와 손끝이 먼저 반응했던 것. 기억 없이도 관계가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정아로와 강서진 사이에 오래 함께 알고 지낸 사람들 사이에만 있는 침묵이 있었던 것.
그리고 하율이 강서진을 처음 보는 순간 알아보려 하는 눈으로 봤던 것.
“지금 강서진 씨가 어디 있어요?” 세하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오전에 연락이 안 됐어요.”
세하는 핸드폰을 집었다. 도현에게 전화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두 번. 세 번. 도현이 받았다.
“세하야.”
“강서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전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왜?”
“어젯밤에 캡슐 재생했어요. 신호가 나갔을 수 있어요. 박진술한테. 그 사람한테서 정아로 씨한테 문자가 왔어요. 이틀 안이에요.”
도현의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강서진은 어제 저녁에 헤어지고 나서 연락이 없었어. 아침에 문자 보냈는데 아직 확인이 안 됐고.”
세하는 핸드폰을 쥔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움직여줄 수 있어요?”
“어디로?”
“강서진 씨 집이요. 확인해줘요.”
전화가 끊겼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막지 못했다고 했던 말의 무게가 다시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제가 틀렸으면 좋겠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강서진 씨가 그냥 연락을 못 받은 거면.”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페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쥐고 있었다.
이틀이 있었다.
그런데 이틀이 충분한지, 세하는 지금 알 수 없었다.
핸드폰 화면이 켜졌다. 도현이었다.
세하는 받았다.
“세하야.”
도현의 목소리가 달랐다.
“강서진 집 앞인데.” 도현이 말했다. “문이 열려 있어.”
도현의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왔다.
"문이 열려 있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카페 안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정아로가 세하의 얼굴을 봤다. 세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정아로를 봤다.
"안에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지금 들어가는 중이야." 도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현의 발소리가. 멈췄다.
"도현 씨."
아무 말이 없었다.
"도현 씨."
"있어." 도현이 말했다. "강서진이 있어. 괜찮아. 소파에 앉아 있어. 자고 있었던 것 같아."
세하는 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숨을 참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핸드폰 무음이었어." 도현이 이어갔다. "지금 깼어. 놀랐는지 나 보고 멍하게 있네."
"문은 왜 열려 있었어요?"
"물어볼게."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도현이 강서진에게 무언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도현이 다시 세하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환기한다고 열었다가 잠그는 걸 깜빡했대."
세하는 테이블 위에 손을 내려놓았다. 손이 아직 차가웠다.
"세하야." 도현이 말했다. "무슨 일이야."
"나중에 얘기할게요."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 씨 옆에 있어줄 수 있어요? 오늘 하루."
도현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알겠어."
전화가 끊겼다.
세하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정아로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자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정아로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긴장이 아니라, 오래 버텨온 것이 잠깐 쉬는 것 같은 것이었다.
"다행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커피잔을 봤다. 자신 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키지 않았다. 주문할 생각도 없었다.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네."
"박진술이 강서진 씨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근거가 뭐예요. 가능성이 있다고 했잖아요. 확신은 못 한다고도 했고."
정아로가 커피잔을 손으로 감쌌다. 이미 식은 잔이었다. 온기를 찾는 것이 아니라 손을 어디에 둘지 몰라서 하는 동작 같았다.
"기억원 시절에." 정아로가 말했다. "박진술이 강서진 씨한테 접근한 방식이 저한테 접근한 방식이랑 같았어요. 일 때문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요."
"강서진 씨가 그 당시에 어떤 사람을 잃었어요. 가까운 사람을. 그 슬픔을 박진술이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가까워졌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저는 그게 나중에야 보였어요. 그 사람 옆에 있을 때는 안 보이거든요. 그 방식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를 지운 사람. 하율의 기억 안에서 자신의 흔적을 덮어씌운 사람. 레테 입사 서류의 비상 연락처란에 세하가 직접 적었던 번호.
가까이 두는 것. 그게 그 사람이 쓰는 방식이라고 정아로가 했다.
"그러면." 세하가 말했다. "저한테도 같은 방식이었던 거예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랬을 거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 씨가 어머니를 잃은 직후였을 거예요. 처음 접촉한 게."
세하는 테이블 위를 봤다. 손이 거기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스물둘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테에 입사한 것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 사이에 박진술이 있었다. 기억 안에 없는 시간 안에.
"이틀 뒤에 돌아올 기억 안에." 세하가 말했다. "그 사람이 있겠네요."
"있을 거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래서 말한 거예요. 미리 알고 있는 게 나으니까."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단계별로 온다고 구민재가 했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세하가 알고 있는 것들이 그 기억 안에서 어떤 형태로 올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았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세하만의 일이 아니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순간 박진술에게 무언가가 닫히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오래 감춰온 것들이.
이번엔 내가 먼저예요.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재생하지 않았다. 꺼내지도 않았다.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네."
"그 문자를 구민재 수석님한테도 보여줘야 해요."
정아로가 잠깐 말이 없었다.
"알아요." 정아로가 말했다. "오늘 안으로."
"같이 가요." 세하가 말했다. "지금."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결정되고 있었다. 혼자 오래 들고 있던 것을 이제 다른 방식으로 내려놓는 것.
"알겠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아로가 식은 커피잔을 그대로 두고 외투를 집었다. 세하가 먼저 계단 쪽으로 걸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의 이름을 찾았다. 문자를 입력했다.
―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어요?
전송했다.
계단 위로 올라오자 바깥 빛이 들어왔다. 낮 시간의 빛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받으면서 멈추지 않았다.
답이 왔다. 하율이었다.
― 네. 언제든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이틀이 있었다.
그 이틀 안에 박진술이 무엇을 하려는지 세하는 알지 못했다. 복원을 막으려는 것인지. 다른 방식으로 먼저 오려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세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기다리는 방식으로 있을 수 없었다.
정아로가 세하 옆으로 나란히 걸었다.
레테 빌딩 방향으로 걸으면서 세하는 한 가지를 생각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세나라고 불렀다는 것. 그 이름이 캡슐 안에 있었다는 것. 도현이 담아둔 것이었다.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으로.
도현이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세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도현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캡슐에 박진술 목소리가 담겨 있었어요. 알고 있었어요?
전송했다.
답이 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세하는 걸으면서 화면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답이 왔다.
― 알고 있었어. 그게 거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유는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한 줄이 더 왔다.
― 세하야. 그 사람 목소리가 들렸으면,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더 올 거야. 이틀 전에. 무서우면 나한테도 연락해.
세하는 핸드폰을 내렸다.
정아로가 옆에서 세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테 빌딩이 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 외벽이 오후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자동문이 닫혀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걸었다.
이틀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이틀이 남아 있다는 것이, 충분하다는 의미인지 아닌지를 세하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자동문이 열렸다.
세하가 먼저 들어갔다.
구민재는 세하와 정아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회의실이었다. 6층. 레테에서 세하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공간 중 하나였다. 창가 블라인드가 절반 내려져 있었다. 오후 빛이 좁은 각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구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이 앉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세하가 먼저 앉았다. 정아로가 그 옆에 앉았다.
정아로가 핸드폰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화면을 열었다. 어젯밤 받은 문자가 있는 화면이었다. 구민재 쪽으로 밀었다.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아무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 반응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세하는 알고 있었다. 삼 년간 이 사람의 얼굴을 봐온 사람이었다. 구민재가 무언가를 읽을 때의 눈은 다른 순간의 눈과 달랐다. 지금 그 눈이 그것이었다.
구민재가 핸드폰을 정아로 쪽으로 다시 밀었다.
“언제 왔어요.”
“어젯밤 열한 시 삼 분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 씨가 캡슐 재생한 직후예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어젯밤 재생한 거 알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문자 받았으니까. 그런데 신호 경로까지는 제가 차단하지 않았어요. 실수예요. 그 캡슐이 기억원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을 제가 간과했어요.”
낮고 평탄한 목소리였다. 자책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박진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잠깐 말이 없었다.
“직접 오지는 않을 거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사람은 직접 움직이는 방식이 아니에요. 접근할 수 있는 경로를 찾아요. 가장 가까운 것부터.”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강서진을 생각했다. 도현이 지금 옆에 있었다. 도현에게 연락했다. 그것이 맞는 방향이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입사 서류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비상 연락처에 박진술 번호가 적혀 있었다고 정아로 씨한테 들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그 서류가 지금 레테 시스템에 있어요?”
구민재가 잠깐 세하를 봤다. 그리고 테이블 옆에 있던 태블릿을 집었다. 무언가를 입력했다. 화면을 세하 쪽으로 돌렸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입사 서류였다. 세하의 이름이 위에 있었다. 항목들이 있었다. 주소. 긴급 연락처. 비상 연락처.
비상 연락처란에 번호가 적혀 있었다.
세하는 그 번호를 봤다. 정아로의 핸드폰에서 본 번호였다. 같은 번호였다. 세하가 직접 적은 것이었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그 번호가 화면 위에 있는 것을 보면서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오는 것이었다.
“가족 칸은 비어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세하 씨가 입사할 때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였고, 다른 가족을 적지 않았어요. 그 칸 옆에 이 번호가 있었어요.”
세하는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수석님은 그때 이 번호가 누구 것인지 알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대답하는 데 한 박자가 걸렸다.
“알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런데 채용했어요.”
“네.”
소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테이블 위에 좁게 깔려 있었다.
“왜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천천히 자리를 바꾸는 것 같았다.
“세하 씨가 그 번호를 적어서 왔다는 것 자체가,” 구민재가 말했다. “그 사람한테 잡혀 있다는 의미였어요. 그런데 동시에 레테에 지원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시야 밖으로 가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했어요. 제 생각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이 년 전에 세하 씨가 스스로 기억 삭제를 의뢰하러 왔을 때.” 구민재가 말했다. “그 결정이 어디서 왔는지 저는 물어보지 않았어요.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때 물어봤으면 더 빨리 알았을 것들이 있어요.”
정아로가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구민재를 봤다.
“기억 복원을 이틀 뒤로 잡은 게.” 정아로가 말했다. “박진술이 그 안에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 잡은 거예요?”
구민재가 정아로를 봤다.
“준비가 필요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이틀이 가장 짧은 시간이에요. 더 당길 수 없었어요.”
“그러면 내일로 앞당길 수 없어요?” 세하가 물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재고 있었다.
“오늘 오전에 상태 확인을 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이상이 없었어요. 그런데 복원은 상태 확인과 달라요. 세하 씨 쪽 준비도 있고, 장비 세팅도 있어요. 오늘 오후에 진행하면 내일 아침은 가능할 수 있어요.”
“그렇게 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오래 봤다. 그 눈 안에서 막으려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 번 더 확인하는 것이 있었다.
“무서운 게 올 수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있었는지가 기억 안에 있을 거예요. 어머니 이야기도. 준비된 거예요?”
세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
준비된 것인지 아닌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단계별로 온다고 구민재가 했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세하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틀을 기다리는 것이 안전한 선택이 아닐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멈춰 있는 것을, 세하는 지금 할 수 없었다.
“네.”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 세 시에 준비할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처리실로 와요. 하율 씨한테도 연락해요. 있고 싶으면 있어도 돼요.”
세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아로도 일어섰다.
소회의실 문 쪽으로 걸으면서 세하는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복도로 나왔다. 정아로가 세하 옆에서 걸었다.
“강서진 씨한테도 연락해요.” 세하가 말했다. “오늘 어디 있는지. 도현 씨가 옆에 있지만.”
“할게요.” 정아로가 말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아로가 먼저 버튼을 눌렀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오늘 오후 세 시로 앞당겼어요. 처리실로 올 수 있어요?
전송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정아로가 먼저 탔다. 세하가 뒤따랐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 핸드폰이 울렸다. 하율이었다.
문자가 아니었다. 전화였다.
세하는 받았다.
“세하 씨.” 하율의 목소리가 왔다. 낮고 빠른 목소리였다. 평소와 달랐다.
“네.”
“지금 어디예요.”
“레테 안이에요. 엘리베이터에 있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세하 씨.” 하율이 말했다. “아까 문자 받고 바로 이동하려고 준비하는데.”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1층 로비였다.
“누가 왔어요.”
세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았다.
“누가요.” 세하가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율이 말했다. “그런데.”
하율이 잠깐 멈췄다.
“세나라고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 저한테.”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닫혔다. 세하는 그 문이 닫히는 것을 보면서 손 안의 핸드폰을 쥐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세하의 얼굴을 읽으려는 것이었다.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그리고 하율에게 말했다.
“문 열지 마요.”
세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 있었다. 1층 로비 버튼이 눌린 채였다. 그러나 세하는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정아로가 세하의 옆에서 세하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지금 그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복도예요." 하율이 말했다. "문 앞이에요. 나가지 않았어요."
"혼자예요?"
"혼자인 것 같아요. 보이는 건 한 명이에요."
세하는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가 세하의 눈을 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이미 누군가에게 전화를 누르고 있었다. 도현이었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아무것도 열지 마요. 답하지도 마요. 지금 가요."
"알겠어요."
세하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귀에 댄 채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6층이었다. 구민재가 있는 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갔다.
정아로가 도현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낮고 빠른 목소리였다. 강서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확인해요. 움직이지 말고. 잠깐만요.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세하가 먼저 내렸다. 복도를 빠르게 걸었다. 소회의실 문이 보였다. 닫혀 있었다. 세하는 두드리지 않고 열었다.
구민재가 자리에 있었다. 태블릿을 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하율 씨 집에 누가 왔어요." 세하가 말했다. "세나라고 아느냐고 물었대요."
구민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천천히가 아니었다.
"주소 알아요?" 구민재가 말했다.
"성수동이에요. 파란 철문 건물이에요."
구민재가 외투를 집었다. 정아로가 소회의실로 들어오면서 도현과의 전화를 끊었다.
"강서진 씨는 도현 씨 옆에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지금 이동하지 말라고 했어요."
"하율 씨 혼자예요?" 구민재가 세하에게 물었다.
"네."
구민재가 말없이 소회의실을 나갔다. 세하가 뒤따랐다. 정아로가 그 뒤를 따랐다.
복도를 걸으면서 세하는 핸드폰을 다시 귀에 댔다.
"하율 씨."
"네." 하율의 목소리가 왔다. 낮고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 조여 있는 것이 있었다.
"그 사람이 아직 있어요?"
"있어요. 아무 말 안 해요. 그냥 서 있어요."
세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계속 통화해요." 세하가 말했다. "끊지 마요."
"알겠어요."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세 사람이 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혔다.
구민재가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얼굴이 아까와 달랐다. 소회의실에서 앉아 있던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된 무언가가 다시 바깥으로 나온 사람의 얼굴이었다. 기억원에서 일하던 시절의 것이 아직 그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정아로가 세하 옆에서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막지 못했다고 했던 말의 무게가 다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이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놓으려는 것처럼.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섰다.
로비를 가로질러 자동문이 열렸다.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오후 빛이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간이었다. 세하는 걸으면서 핸드폰을 귀에 댔다.
"하율 씨."
"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요. 세나라고 아느냐고 한 것 말고 다른 말은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세하 씨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어요."
세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답했어요?"
"아니요."
"잘했어요."
구민재가 세하 옆으로 걸음을 맞췄다. 택시를 잡는 것이 빠를 것이었다. 구민재가 먼저 손을 들었다. 차가 섰다.
세 사람이 탔다. 성수동이라고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는 뒷자리에서 창을 봤다. 빌딩들이 스쳐갔다. 세하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하율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말이 없었다. 그러나 끊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 세하가 확인할 수 있는 전부였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네."
"그 사람 목소리가 낮고 건조해요?"
잠깐이었다.
"네." 하율이 말했다. "그래요."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캡슐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귀 안에서 다시 왔다. 낮고 건조한 것. 세나라고 불렀던 것. 박진술이라고 정아로가 말했던 이름. 기억 안에 없는 목소리가 몸 안에서 낯설지 않았던 것.
차가 성수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세하는 창 밖을 봤다. 오래된 건물들이 이어졌다. 익숙한 골목이었다. 처음 하율을 만나러 왔던 날의 길이었다.
차가 섰다. 세 사람이 내렸다.
파란 철문이 보였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걸었다. 철문 앞에 사람이 서 있었다. 등이 보였다. 외투를 입고 있었다. 키가 크지 않았다. 그리 늙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냥 서 있는 사람이었다. 문을 두드리거나 기다리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귀에서 내렸다.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왔어요. 나오지 마요."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세하가 앞으로 걸었다. 구민재와 정아로가 뒤에 있었다. 발소리가 골목 안에서 울렸다. 그 사람이 돌아섰다.
세하는 그 얼굴을 봤다.
기억 안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몸 안에서 무언가가 왔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캡슐에서 목소리가 들렸을 때와 같은 방식으로.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것이었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그 사람이 세하를 봤다.
그리고 웃었다. 아주 조금이었다. 소리 없이.
"세나." 그 사람이 말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였다.
세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귀가 아니라 몸 안 어딘가에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기억이 없는 곳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도 않았다.
세하는 그 사람과 두 걸음 거리에서 멈췄다.
"박진술 씨예요?" 세하가 말했다.
그 사람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계산되고 있었다. 오래 이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 계산이 지금 예상한 것과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 그 안에 있었다.
"기억이 없는 것치고는." 그 사람이 말했다. "잘 알고 오셨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구민재의 발소리가 세하 등 뒤에서 멈췄다. 박진술의 눈이 세하 너머로 갔다. 구민재를 봤다. 그리고 정아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다시 계산을 조정했다.
"민재 씨도 왔네." 박진술이 말했다. "오래됐죠."
구민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하는 구민재가 세하의 옆으로 한 걸음 나란히 선 것을 느꼈다.
골목이 조용했다. 오후 빛이 담장 위에 기울어져 있었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왔다. 파란 철문이 닫혀 있었다.
"복원하려는 거 알고 있어요." 박진술이 세하에게 말했다. "막으러 온 게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러면 왜 왔어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마지막 무게를 재고 있었다.
"세나가 기억을 되찾기 전에."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고 싶었어요. 내 쪽에서."
골목이 조용했다.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막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먼저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세하는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없어도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이 사람이 세하의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를 지웠다는 것.
하율의 기억 안에서 자신의 흔적을 덮어씌웠다는 것.
그리고 세하가 레테 입사 서류의 비상 연락처란에 이 사람의 번호를 적었다는 것.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재생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세하가 말했다. "여기서 말해요. 지금. 다 들을게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이제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 같았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잠깐 멈췄다. 계산이 아니었다. 계산은 이미 끝난 것 같았다. 지금 그 안에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오래 준비해온 말이 막상 입 앞에 오자 달라지는 것 같은 것이었다.
골목이 조용했다. 담장 위의 빛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왔다가 멈췄다.
박진술이 세하에게서 눈을 거두지 않은 채로 말했다.
“세나가 레테에 들어온 건 내가 유도한 게 아니에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건 알고 왔으면 좋겠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가까이 두려고 한 건 맞아요. 그런데 레테는 아니었어요. 레테는 민재 씨가 먼저 채용한 거예요. 내가 예상한 경로가 아니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구민재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서 구민재가 숨을 아주 조금 고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어머니 기억에서 저를 지운 이유요.” 세하가 말했다. “그게 듣고 싶어요.”
골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박진술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이동했다.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디서부터 꺼낼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세나 어머니가 기억원에 온 건.” 박진술이 말했다. “치료 목적이 아니었어요. 나한테 직접 찾아온 거예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알고 왔다는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알고 왔어요.”
“그리고 그것을 세한테 전달하려 했고.”
“그랬어요.”
“그래서 막은 거예요.”
박진술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것이 부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세하는 알았다. 그 침묵 안에 �긍정이 있었다.
“막은 건 맞아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런데 세나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은 아니에요.”
“어떤 방식이에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무게를 내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세나 어머니가 기억원에 온 건.”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원의 기술을 세나한테 넘기려 해서가 아니었어요. 세나를 기억원에서 멀리 두기 위해서였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세나 어머니는.” 박진술이 이어갔다. “내가 세나한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내가 그 접근에 목적이 있다는 것도. 그래서 온 거예요. 세나를 그 목적 밖으로 꺼내달라고.”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이 차가운 것을 느꼈다.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이 그 표면을 쥐고 있었다.
“세나를 내 시야 밖으로 보내달라고 왔는데.” 박진술이 말했다. “나는 대신 기억원 안으로 당겼어요. 세나 어머니 기억 안에서 세나를 지우는 방식으로.”
“이유가요.”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조여 있었다.
“세나가 필요했으니까.”
골목이 조용했다.
“무엇에요.”
박진술이 세하를 오래 봤다.
“기억원이 하는 일을 세나처럼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에요. 기억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읽어내는 감각. 그건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세나한테 있었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기억 안에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몸 안 어딘가에서 반응이 왔다.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이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게 이유예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잠깐 무언가가 흔들렸다. 계산이 아닌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하는 지금 이름 붙일 수 없었다.
“전부는 아니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정아로가 세하의 옆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 움직임이 세하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박진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정아로가 말을 꺼내기 전에 세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의 눈이 세하에게 돌아왔다.
“세나가 내 딸이에요.”
골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들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담장 위의 빛이 그대로였다. 파란 철문이 닫혀 있었다. 바람이 없었다. 그런데 세하의 발 아래에서 골목 바닥이 아주 멀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 왔다.
기억 안에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몸 안에서 오는 반응이 기억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꺼내지 않았다.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손 안에 쥐고 있었다.
박진술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계산이 없었다. 처음으로. 세하가 골목에 들어서고 처음으로, 그 눈 안에서 계산이 없었다.
“이틀 뒤에.” 박진술이 말했다. “아니, 내일이겠군요 이제. 기억이 돌아오면 세나가 알게 될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세나 어머니한테 무엇을 했는지.”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막으러 온 게 아니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건 진심이에요. 그런데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내 쪽에서 말하고 싶었어요. 기억이 보여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세나가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는 것과 모르고 받아들이는 것은 달라요.”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천천히 펼쳐봤다. 막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했다. 먼저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기억이 보여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이 진심일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세하의 판단에 무언가를 먼저 심어두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세하는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뤄온 사람이었다. 기억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읽어내는 것. 박진술이 방금 그것이 세하한테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람이 세하를 필요로 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 했다.
세하는 그 능력을 지금 이 순간 이 사람에게 쓰고 있었다.
“박진술 씨.” 세하가 말했다.
“네.”
“내일 기억이 돌아오면.” 세하가 말했다. “내가 직접 판단할 거예요. 지금 여기서 들은 것도 포함해서.”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것만 말할게요.”
박진술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안도인지 패배인지 다른 무언가인지.
박진술이 세하에게서 눈을 거뒀다. 구민재를 봤다. 정아로를 봤다. 그리고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민재 씨.” 박진술이 말했다. “잘 부탁해요. 복원.”
구민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진술이 골목 입구 쪽으로 걸었다. 세하는 그 등을 봤다. 키가 크지 않았다. 외투가 낡아 있었다. 그냥 걸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등이 멀어질수록 세하의 손 안에서 캡슐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오는 것이었다.
박진술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 사라졌다.
골목이 조용해졌다.
구민재가 세하 옆에 서 있었다. 말이 없었다. 정아로가 세하의 반대편에서 파란 철문을 봤다.
세하는 철문을 봤다. 닫혀 있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전화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한 번.
하율이 받았다.
“세하 씨.”
“나왔어요.” 세하가 말했다. “나와요.”
잠깐 후에 파란 철문이 안에서 열렸다.
하율이 나왔다.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을 기다려온 사람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있었다. 말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하는 하율의 얼굴을 봤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이 얼굴 앞에서 세하의 몸이 아는 것이 있었다. 캡슐 안의 냄새를 처음 맡았던 것처럼. 낮고 짧은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들었어요?” 하율이 물었다. 낮은 목소리였다.
“네.”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을 꺼내지 않았다. 감촉만 확인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내일이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박진술이 방금 말한 것들이 기억 안에서 어떤 형태로 올지도. 세하의 어머니가 기억원에서 무엇을 잃었는지도. 그리고 세하가 스물둘에 어머니를 잃고 박진술 옆에 있었던 시간 안에서 무엇이 있었는지도.
그 모든 것이 내일 온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구민재를 봤다. 정아로를 봤다.
그리고 하율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혼자 있지 마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하 씨도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골목 끝에서 바람이 다시 왔다. 파란 철문이 안쪽으로 조금 더 열렸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이 보여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세하도 알고 있었다. 기억은 되찾더라도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알게 된 것이었다. 기억은 감정에 의해 각색된다. 원하는 것을 더 크게 담고 두려운 것을 더 작게 담는다.
그러나 세하는 내일 그것을 보기로 했다.
각색된 기억이라도. 그 안에서 진짜인 것과 아닌 것을 세하가 직접 읽어낼 것이었다.
그것이 세하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박진술이 세하를 필요로 했다고 말한 능력이기도 했다. 세하는 그 사실이 지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능력이 박진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하 안에 원래 있었던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내일 자신을 위해 쓸 것이었다.
골목이 조용했다. 오후 빛이 완전히 기울었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세하는 파란 철문 쪽으로 걸었다.
파란 철문 안쪽은 조용했다.
하율의 방은 세하가 처음 왔던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낮은 천장, 좁은 창문, 창 쪽으로 놓인 의자. 그러나 지금은 사람이 더 있었다. 구민재가 방 한쪽에 서 있었다. 정아로가 문 가까이에 있었다. 하율이 의자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세하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창 밖으로 골목의 저녁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오후가 끝나가는 빛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확인하는 것이었다.
구민재가 먼저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 있어도 돼요.”
세하를 향한 말인지, 그 방 안에 있는 사람 전체를 향한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구민재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더 이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오늘 밤을 혼자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내일 아침이 오면 자신이 처리실을 준비할 것이라는 것. 그 두 가지가 짧은 문장 안에 있었다.
정아로가 창 쪽을 봤다. 그리고 세하에게 말했다.
“강서진 씨한테 연락했어요. 도현 씨 옆에 있다고 했어요. 오늘은 거기 있을 거래요.”
“알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그리고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골목에서 박진술의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쌓인 것이 있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세하가 먼저 말했다.
“들었죠?”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 끊지 않았어요. 문 닫고 있었는데 다 들렸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율이 골목에서 박진술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것. 그리고 그 말들을 들으면서 혼자 방 안에 있었다는 것.
“괜찮아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것이 대답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하는 알았다. 무엇이 괜찮고 무엇이 아닌지를 지금 자신도 모르는 것이었다.
“모르겠어요.”
하율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하율이 이어갔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는데. 아는 목소리인지 아닌지를 모르겠어요. 기억이 지워진 구간에 있는 것인지.”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4년 전 기억원에서 처리된 구간. 하율이 박진술을 알았던 시간.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하율도 아직 알지 못했다.
“내일 복원하고 나면.” 세하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도 같이 볼 수 있어요. 구민재 수석님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알아요.”
하율이 말했다. “그런데 지금 세하 씨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뭐예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이 있었다. 구민재가 있었다. 정아로가 있었다. 그러나 하율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세하에게만 말했다.
“박진술이 한 말 중에서.” 하율이 말했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방 안이 조용해졌다. 구민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멈췄다. 정아로는 창 쪽을 보고 있었다.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박진술이 골목에서 말한 것들이 있었다. 레테 입사를 유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를 지운 것은 맞지만 세하가 생각하는 방식으로만은 아니라고 했다. 기억이 보여주는 것만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나가 자신의 딸이라고 했다.
그 말들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세하는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기억이 없어도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기억원에 간 것.” 세하가 말했다. “세를 그 사람 시야 밖으로 꺼내달라고 간 것. 그건 진짜인 것 같아요.”
하율이 세하를 봤다.
“어머니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요청을 한 거잖아요. 기억원에 직접 가서. 그 사람한테 직접.” 세하가 말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와 별개로, 어머니가 그것을 했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방 안이 조용했다. 에스프레소 기계 소리도 없었다. 외부 소음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방이었다.
“나머지는.” 세하가 말했다. “내일 봐야 알아요.”
정아로가 창 쪽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잠깐 내려앉았다. 오래 막지 못했다고 했던 것들 중 하나가 지금 이 방 안에서 다른 방식으로 놓이고 있는 것 같았다.
구민재가 말했다.
“저는 나갈게요.”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외투를 집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에 처리실 준비해요. 세하 씨 컨디션 보고 시작 시간 조정할게요.”
“알겠어요.”
“오늘 밤.” 구민재가 잠깐 세하를 봤다. “무언가 더 올 수 있어요. 신체 반응으로. 캡슐 재생하지 마요. 그냥 두면 돼요.”
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민재가 방 밖으로 나갔다. 발소리가 계단 쪽으로 멀어졌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저도 나갈게요.” 정아로가 말했다. “강서진 씨한테 한 번 더 연락해볼게요.”
“정아로 씨.”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멈췄다.
“오늘 말해줘서 고마워요. 어제도. 오늘도.”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된 무게를 마지막으로 한 층 내려놓는 것이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문 쪽으로 걸었다.
문이 닫혔다.
방 안에 세하와 하율만 남았다.
처음 이 방에 왔던 날이 세하의 기억 안에 있었다. 파란 철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하율이 세하를 기다리고 있었을 때. 그때 세하는 기억을 되찾으러 온 것이 아니었다. 그냥 왔던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세하는 기억을 아직 되찾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방에 있는 것이 그때와 다른 것은 알고 있었다.
하율이 의자에 앉았다. 세하는 그 옆에 있는 바닥에 기대어 앉았다. 좁은 방이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으면 거리가 가까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 밖에서 저녁이 오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의 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조금씩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을 꺼내지 않았다. 그냥 손 안에 감촉을 느끼는 것이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도현이 만든 것이었다.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들을 담아둔 것이었다. 냄새와 소리. 그리고 박진술의 목소리.
그게 거기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도현이 그렇게 말했었다.
세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었다. 도현을 만나서 직접 들을 것이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나면. 아니면 돌아오기 전에.
“세하 씨.”
하율이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네.”
“무서워요?”
세하는 그 질문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무서운 것인지 아닌 것인지 세하는 지금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 적이 없었다. 박진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 안에서 보게 되는 것. 어머니가 기억원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알게 되는 것. 그리고 세하가 스물둘에 혼자였던 시간 안에서 무엇이 있었는지.
그것들이 내일 온다.
“조금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하의 옆에서 하율의 손이 바닥 위에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창 밖을 봤다.
어두워지고 있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에 처리실에 간다. 구민재가 준비할 것이었다. 기억이 단계별로 온다고 했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 안에서 진짜인 것과 아닌 것을 세하가 읽어낼 것이었다.
그것이 세하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캡슐이 주머니 안에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방 안이 조용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도현이었다. 문자였다.
세하는 화면을 열었다.
― 세하야. 강서진이 나한테 방금 말한 게 있어. 오늘 밤 네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해도 돼?
세하는 그 문자를 읽었다. 오늘 밤 알아야 할 것.
하율이 세하의 핸드폰 화면을 보지 않았다. 그러나 세하가 멈췄다는 것은 알았는지 세하를 봤다.
세하는 도현에게 전화를 눌렀다.
도현이 한 번 만에 받았다.
"세하야."
"무슨 일이에요."
전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도현이 숨을 한 번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말을 고르는 것인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재는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강서진이." 도현이 말했다. "박진술을 알고 있었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하율이 세하의 옆에서 창 쪽을 보다가 세하를 봤다. 세하는 하율을 보지 않았다.
"정아로 씨를 통해서가 아니라요?"
"아니. 그 전부터. 강서진이 기억원에 간 적이 있어."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재생하지 않았다. 그냥 쥐는 것이었다.
"의뢰인으로요?"
"아니." 도현이 말했다. "기억원 직원으로. 짧은 기간이었대. 정아로보다 먼저. 박진술이 직접 데려간 거야."
방 안이 조용했다. 저녁 빛이 창을 통해 들어오다 멈추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직전의 빛이었다.
"강서진이 왜 지금 말하는 거예요."
"골목에서 박진술이 왔다는 걸 듣고 나서." 도현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낮고 건조한 사람이냐고 나한테 물었어. 그렇다고 했더니 한참 말이 없었어. 그리고 나한테 말한 거야."
세하는 그 순서를 천천히 받아들였다. 박진술의 목소리. 강서진이 그것을 듣고 반응했다. 기억이 지워진 구간에 있는 것인지 아닌지. 하율이 방금 같은 말을 했었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아는 목소리인지 아닌지를 모르겠다고.
"강서진 씨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 수석님이 한 게 맞다고 했어요?"
"그게." 도현이 잠깐 멈췄다. "거기서부터가 복잡해. 강서진이 기억원에서 나온 건 스스로 나온 게 아니래. 박진술이 내보낸 거야. 그리고 나오면서 기억원에서 있었던 일부 기간이 처리됐어. 박진술 방식으로."
"박진술이 직접요?"
"그래. 그러니까 강서진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 구민재 소행인지 기억원 소행인지가 지금 불분명한 거야. 구민재가 처리했다고 알려진 부분이 사실은 이미 그 전에 박진술이 건드린 위에 덧씌워진 것일 수 있어."
세하는 그 구조를 펼쳐봤다. 하율의 기억 안에서 박진술 본인이 지워지고 다른 것으로 채워진 것. 삭제가 아닌 덮어쓰기. 그것이 강서진한테도 있었다면, 구민재가 처리했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조차 지금 확인되지 않은 것이었다.
"강서진 씨가 기억원에서 무엇을 했는지 알아요?"
도현이 대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세하야." 도현이 말했다. "강서진이 기억원에서 한 일이." 도현이 잠깐 멈췄다. "세나 어머니 파일이랑 연결돼 있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방 안의 조명이 그대로였다. 하율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보지 않았다.
"어떻게요."
"강서진이 박진술한테서 배운 게 있어. 기억원 기술 중에. 세나 어머니 파일이 처리될 때 강서진이 그 작업에 있었대." 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직접 처리한 게 아니야. 옆에서 봤던 거야. 그런데 그 기억이 나오면서 처리됐어. 박진술이 직접."
세하는 테이블이 없어도 손을 내려놓는 동작을 했다. 허벅지 위에 손이 내려갔다. 차가웠다.
"강서진 씨가 지금 어떤 상태예요."
"말하고 나서 많이 울었어. 오래 담고 있었던 것 같아. 기억이 지워졌는데도 그 감정은 안 지워진 것처럼." 도현이 말했다. "세하야. 강서진이 너한테 직접 말하고 싶대. 오늘 밤 안으로. 내일 복원하기 전에."
"알겠어요."
"갈 수 있어?"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전화 너머의 말이 들렸는지 아닌지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세하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은 읽은 것 같았다.
"갈게요."
전화가 끊겼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렸다. 방 안이 조용했다.
"가야 해요?" 하율이 물었다.
"네."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 씨가 오늘 밤 안에 나한테 할 말이 있대요."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묻지 않았다. 세하가 일어섰다. 외투를 집으면서 안주머니를 손으로 짚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하율 씨."
"네."
"오늘 밤은 혼자 있지 마요. 아까 내가 한 말."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알아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 씨도요. 아까 내가 한 말."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정아로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강서진 씨가 오늘 밤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해요. 도현 씨 쪽으로 가는 중이에요.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먼저 말해줄 수 있어요?
전송했다.
파란 철문을 나서자 골목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박진술이 서 있던 자리가 거기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냥 골목이었다.
세하는 그 자리를 한 번 봤다. 그리고 걸었다.
정아로의 답이 왔다. 세하는 걸으면서 화면을 열었다.
― 알고 있었어요. 말하려고 했는데 강서진 씨가 먼저 하고 싶어했어요. 세하 씨 어머니 파일 처리 때 강서진 씨가 거기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 더. 그건 강서진 씨한테 직접 들어요. 내가 말하는 게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세하는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골목이 끝나고 큰길이 나왔다.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저녁이 완전히 오고 있었다.
하나 더.
정아로가 말하는 게 맞지 않는다고 한 것. 강서진이 직접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
세하는 택시를 잡았다. 도현이 있는 곳의 주소를 눌렀다. 차가 출발했다. 창 밖으로 밤이 오는 서울이 지나갔다.
세하는 손 안의 핸드폰 화면이 꺼지는 것을 봤다. 그리고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내일 아침 여덟 시.
그 전에 강서진이 말하려는 것이 있었다. 정아로가 알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게 맞지 않다고 한 것이 있었다.
세하는 창 밖을 봤다.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면서 스쳐갔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세하는 지금 그것을 멈추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내일의 기억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각색되지 않은 방식으로. 미리 알고 있는 상태로.
차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도현이 말한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불이 켜진 창문이 있었다.
세하는 차에서 내렸다. 건물 앞에 도현이 나와 있었다. 세하를 보고 걸어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하 옆으로 섰다.
"강서진 씨 안에 있어요?"
"응." 도현이 말했다. "세하야." 도현이 잠깐 멈췄다. "각오하고 들어가."
세하는 도현을 봤다. 도현의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의 걱정이 있었다. 기억이 지워졌어도 남아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알겠어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랐다. 문 앞에 섰다.
세하가 노크했다.
안에서 강서진의 목소리가 왔다.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세하는 문을 열었다.
강서진이 앉아 있었다. 눈이 부어 있었다. 그러나 세하를 보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 결정하고 기다린 사람의 눈이었다.
"이세하 씨." 강서진이 말했다. "앉아요."
세하가 앉았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었다.
"세하 씨 어머니가 기억원에 왔던 날." 강서진이 말했다. "저도 거기 있었어요. 그리고." 강서진이 잠깐 멈췄다. "어머니가 박진술한테 부탁한 게 하나 더 있었어요. 세하 씨를 시야 밖으로 꺼내달라는 것 말고."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강서진이 말했다. "세하 씨한테 전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어요. 자기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박진술이 허락하지 않으면 제가 전해달라고. 저한테."
방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전해줄 수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된 것을 마지막으로 꺼내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세하 씨한테 하고 싶었던 말이." 강서진이 말했다.
그리고 말했다.
강서진이 말했다.
“미안하다고 했어요.”
방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들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강서진의 눈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 들고 있었던 것을 이제 내려놓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게 전부예요?”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아주 조금 조여 있었다. 강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강서진이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한 거예요. 그리고 나서.”
강서진이 잠깐 눈을 내렸다. 무릎 위에 손이 놓여 있었다. 손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가 멈췄다.
“기억 안에 네가 없어도.” 강서진이 말했다. “너는 내가 낳은 사람이라고. 그 사실은 아무도 못 가져간다고. 어머니가 그 말을 해달라고 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들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방 안의 조명이 그대로였다. 강서진이 앞에 앉아 있었다. 창 밖으로 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하의 손 아래에서 허벅지가 아주 멀어지는 것 같은 감각이 왔다. 기억 안에 없는 곳에서 오는 것이었다.
세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강서진을 봤다.
“어머니가.”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처음과 달랐다. 아주 조금이었다. 그러나 세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직접 그 말을 했어요?”
“네.” 강서진이 말했다. “박진술이 처리를 시작하기 전에. 저한테 직접. 외워두라고 했어요. 제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이것만은 남겨달라고.”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천천히 펼쳐봤다. 어머니가 기억원에 갔다. 처리가 시작되기 전에 강서진에게 말을 맡겼다. 자신의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그것만은 전해달라고. 그리고 강서진의 기억도 일부가 처리됐다. 그러나 그 말은 남아 있었다. 지워지지 않았다.
“왜 지금까지.” 세하가 말했다.
“세하 씨를 몰랐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어머니가 이름을 말해줬는데, 제 기억에서 그 이름이 지워진 거예요. 세하 씨 어머니한테 딸이 있다는 것과, 그 딸에게 전해줄 말이 있다는 것만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세하 씨 얼굴을 처음 봤을 때.”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레테 로비에서요. 20층에서 처음 내려왔을 때. 세하 씨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어요.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20층 로비. 강서진이 들어오던 순간 세하의 어깨와 손끝이 먼저 반응했던 것. 기억 없이도 관계가 각인되어 있는 것처럼.
그것이 서로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바로 말하지 못한 건요.” 강서진이 말했다. “확인이 필요했어요.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무서웠어요. 이 말이 세하 씨한테 어떤 방식으로 오게 될지.”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난 뒤의 공백이 있었다. 무거운 것이 없어진 자리의 허전함이었다.
“전해줬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이제.”
방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손을 안주머니에 뻗었다. 캡슐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재생하지 않았다. 꺼내지도 않았다. 그냥 손 안에 쥐었다.
기억 안에 없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있었다. 지금 세하가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내일 기억이 돌아오면 들을 수 있게 될지도 알 수 없었다. 박진술이 덮어씌운 기억 안에서 어머니의 원래 목소리가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그러나 지금 이 방 안에서 세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기억원에 간 것이 기억원의 기술을 세하에게 넘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하를 멀리 두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딸에게 전할 말을 낯선 사람에게 맡겼다.
기억 안에서 세하가 지워지더라도.
너는 내가 낳은 사람이라고.
세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강서진을 봤다.
“고마워요.”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주 조금이 아니었다. 세하도 알고 있었다. 그것을 억누르지 않았다. 억누를 이유가 없었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안에서 오래된 것이 이제 다른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잠깐 후에 문이 열렸다. 도현이었다. 두 사람을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방 안으로 들어와서 세하 옆에 앉았다. 강서진 쪽을 보면서.
세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 밖으로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허벅지 위에 내려놓았다. 손이 차가웠다. 그러나 캡슐을 쥐고 있었던 온기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도현이 세하를 봤다.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세하야.”
“네.”
“캡슐에 박진술 목소리를 담아둔 이유.” 도현이 말했다. “아까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세하는 도현을 봤다.
“그 목소리가 기억 안에서 세하가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것이거든.” 도현이 말했다. “이 년 전, 기억 삭제 의뢰하기 전날 밤에 세하가 나한테 한 말이 있어. 그 목소리가 이상해. 그 목소리가 낯선데 낯설지 않아. 그게 무서워. 그렇게 말했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기억이 없어도 몸이 먼저 알 수 있도록.” 도현이 말했다. “그래서 담아둔 거야. 세하가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방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캡슐 재생 이후 몸 안에서 왔던 것들을 떠올렸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 세나라고 부르는 것.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된 것에서 오는 반응. 골목에서 박진술의 얼굴을 봤을 때 기억이 아닌 방식으로 왔던 것.
도현이 그것을 의도하고 담아둔 것이었다.
“세하야.” 도현이 말했다. “내일 기억이 돌아오면.”
도현이 잠깐 멈췄다.
“네가 보게 되는 것 중에 내가 잘못한 것도 있을 거야.” 도현이 말했다. “이 년 전에. 내가 더 빨리 막았어야 하는 것들이. 그것도 기억 안에 있을 거야.”
세하는 도현을 봤다.
도현의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의 것이 있었다. 먼저 말해두는 것.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자신이 직접 하는 것.
“알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강서진이 창 쪽을 봤다. 도현이 바닥을 봤다. 세하는 방 안의 조명을 봤다. 낮고 따뜻한 빛이었다. 오래된 방의 빛이었다.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잘 있어요?
전송했다. 답이 빨리 왔다.
― 네. 잘 있어요. 세하 씨도요?
세하는 화면을 봤다.
― 네.
전송하고 핸드폰을 내렸다.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그러나 충분했다.
세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서진 씨.”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내일 복원하고 나면.”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 씨 기억도 같이 봐요. 박진술이 덮어씌운 것들이 어디까지인지.”
강서진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세하는 외투를 집었다. 도현이 일어나려 했다.
“여기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 씨 옆에.”
도현이 다시 앉았다.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지낸 사람의 것이 있었다. 잘 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방식의 인사였다.
세하가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밤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세하는 걸으면서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내일 아침 여덟 시.
기억이 단계별로 온다고 구민재가 했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억 안에 어떤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내일 보게 될 것이었다. 박진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그리고 세하가 스물둘에 혼자였던 시간 안에서 무엇이 있었는지도.
그 모든 것이 내일 온다.
세하는 택시를 잡았다.
차 안에서 창 밖을 봤다. 밤의 서울이 지나갔다. 가로등이 스쳐갔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생각했다.
기억이 돌아온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하가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말을 남겼다. 낯선 사람에게. 그 말이 지금 세하에게 왔다. 기억 안에 없는 방식으로.
너는 내가 낳은 사람이라고.
그 사실은 아무도 못 가져간다고.
세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창 밖을 봤다. 차가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파란 철문이 있는 골목이었다.
세하가 기사에게 말했다.
“여기서 세워주세요.”
차가 섰다. 세하가 내렸다.
파란 철문이 앞에 있었다. 닫혀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냈다.
하율에게 전화를 눌렀다. 신호가 갔다. 한 번.
하율이 받았다.
“세하 씨.”
“문 열어줄 수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밖에 있어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였다. 파란 철문이 안쪽에서 열렸다.
하율이 서 있었다.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을 기다려온 사람이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가 있었다. 말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하는 하율의 얼굴을 봤다.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이 얼굴 앞에서 세하의 몸이 아는 것이 있었다. 캡슐 안의 냄새를 처음 맡았던 것처럼. 낮고 짧은 웃음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오늘 밤은 혼자 있지 말라고 했잖아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주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자리를 바꾸는 것 같았다.
하율이 철문을 더 열었다.
세하가 들어갔다.
철문이 닫혔다.
골목이 조용해졌다.
내일 아침이 오면 기억이 돌아올 것이었다. 그 기억 안에서 무엇이 오는지를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하가 알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강서진이 전해준 말. 도현이 담아둔 목소리. 하율이 이 년을 기다려온 방식. 구민재가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는 얼굴. 정아로가 말하는 게 맞지 않다고 판단하고 강서진에게 미룬 것.
그 모든 것이 세하 안에 있었다.
기억이 돌아오기 전에 이미.
파란 철문 안쪽에서 밤이 지나갔다.
세하는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불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언가가 계속 왔다. 신체적으로. 구민재가 말했던 것이었다. 오늘 밤 무언가 더 올 수 있어요. 신체 반응으로. 그냥 두면 돼요.
냄새가 왔다. 오래된 나무 냄새. 먼지와 섞인 것. 캡슐 안에 담겨 있던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캡슐 없이 오고 있었다. 세하는 창 쪽을 봤다. 하율의 방이었다. 그 냄새가 이 방에서 오는 것인지 기억 안 어딘가에서 오는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새벽 두 시쯤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짧은 것이었다. 낮고 조용한 것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율은 옆에서 자고 있었다. 소리는 바깥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 세하 안에서 온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냥 들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아침이 왔다.
처리실은 지하 1층이었다.
여덟 시 삼 분에 세하가 들어갔을 때 구민재는 이미 와 있었다. 장비 앞에 서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세하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잤어요?”
“조금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컨디션을 읽으려는 것이 있었다. 기술자의 눈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닌 것이 그 안에 섞여 있었다.
“신체 반응 왔어요?”
“냄새랑 소리요.” 세하가 말했다. “캡슐 없이.”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준비됐다는 거예요. 시작할 수 있어요.”
하율이 문 옆에 서 있었다. 세하와 함께 왔다. 들어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정아로가 처리실 한쪽 벽 앞에 있었다. 세하가 눈이 마주쳤을 때 정아로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어젯밤의 것이 아직 그 안에 있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자리의 것이었다.
도현은 없었다. 강서진과 함께 밖에 있을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이 맞는 배치라고 생각했다.
구민재가 말했다.
“눕기 전에 한 가지만요.”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기억이 단계별로 와요. 처음엔 감각이 먼저 오고, 그다음에 장면이 와요. 장면이 올 때 감정이 같이 오는데.” 구민재가 말했다. “각색된 것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건 알죠?”
“알아요.”
“그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세하 씨가 읽어낼 수 있어요. 그 능력이 있으니까. 기억이 오는 중에 판단하려 하지 말고, 다 받고 나서 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박진술이 골목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기억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읽어내는 감각. 그건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구민재가 지금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둘이 같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세하에게 낯설지 않았다. 오래 함께 일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서로를 배신하기 전에.
“알겠어요.” 세하가 말했다.
세하가 처리 의자에 앉았다. 누웠다. 천장이 보였다. 낮고 흰 천장이었다. 세하는 삼 년간 타인을 눕혀두고 이 천장을 기술자 쪽에서 바라봤다. 지금은 반대편이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 앉았다. 무언가를 입력하는 소리가 들렸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캡슐이 거기 있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표면.
“캡슐 꺼내도 돼요.” 구민재가 말했다. “쥐고 있어요. 복원 시작되면 그게 닻이 돼요.”
세하가 캡슐을 꺼냈다. 손 안에 쥐었다.
하율이 처리 의자 옆으로 걸어왔다. 말이 없었다. 세하의 손 가까이에 손을 내렸다.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느꼈다.
“시작할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처리실 안의 조명이 아주 조금 낮아졌다.
세하는 눈을 감았다.
처음에 냄새가 왔다.
오래된 나무. 먼지. 그리고 무언가 더 있었다. 세하가 이름 붙이지 못했던 것. 어디선가 맡은 적이 있다는 감각만 있었던 것.
지금은 이름이 왔다.
어머니 방 냄새였다.
세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판단하지 않았다. 구민재가 말한 대로였다. 다 받고 나서 해요.
그다음에 빛이 왔다. 오후의 빛이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좁은 창이었다. 커튼이 반쯤 쳐져 있었다.
그리고 장면이 왔다.
병원 복도가 아니었다. 그 전이었다. 어머니가 아직 집에 있던 시간이었다. 세하가 스물하나였다.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식탁이 있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밥이 있었다. 어머니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이 지금 세하의 기억 안에서 어떤 눈인지가 왔다.
세하는 그 눈을 보는 것이 기억 안에서도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보았다.
어머니의 눈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안에 무언가를 말하려다 멈추는 것이 있었다. 오래된 것이었다. 이 년이나 삼 년이 아닌, 더 오래된 것이었다. 세하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 사람 안에 있었던 것 같은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손 안의 캡슐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의 온기가 금속을 데우고 있는 것이었다. 기억이 아닌 방식의 것이었다.
다음 장면이 왔다.
박진술이었다.
세하는 그 얼굴을 기억 안에서 처음으로 봤다. 어제 골목에서 본 것과 같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 기억 안에서 그 얼굴은 달랐다. 더 젊었다. 그리고 세하가 그 얼굴을 보는 눈이 달랐다.
세하는 그 눈을 읽었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쌓아온 것으로.
믿고 있었다. 그 기억 안의 세하가. 이 사람을 믿고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가 아니라 두 박자를 벌었다. 판단하지 않았다. 그냥 받았다.
기억이 계속 왔다.
기억원. 처음 갔던 날. 박진술이 세하를 세나라고 처음 불렀던 순간. 그 이름이 낯설었는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던 것.
어머니가 기억원에 갔다는 것을 몰랐던 시간. 그 시간 안에서 박진술 옆에 있었던 것들.
그리고 어느 날 세하가 알게 된 것이 왔다.
기억 안에서 세하는 파일을 보고 있었다. 기억원 내부 파일이었다. 의뢰인 목록이었다. 세하는 그 목록 안에서 이름을 하나 찾았다.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세하는 처리실 의자에 누운 채로 그 기억을 받아들이는 동안 손 안의 캡슐을 쥐는 힘이 세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판단하지 않았다. 다 받고 나서.
기억이 계속 왔다.
도현이 왔다. 강서진이 왔다. 셋이 함께 레테 안에서 움직이던 것들이 왔다. 비공식 삭제 서비스 목록을 빼내려 했던 밤이 왔다. 세하가 말했던 것이 왔다.
만약 내가 이것 때문에 지워지면, 어머니한테 한 것처럼. 그런 방식으로.
그 문장의 나머지가 기억 안에 있었다. 잘린 것이 아니었다. 온전히 있었다.
그러면 나는 괜찮아. 그 방식이라면.
세하는 그 말을 기억 안에서 들었다. 자신이 한 말이었다. 이 년 전의 세하가.
세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 알았다.
기억이 지워지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처럼 되는 것이라면, 기억 안에서 누군가 지워지더라도 그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은 남는 것이라면. 그 방식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세하는 눈을 뜨지 않았다.
기억이 마지막으로 왔다.
병원 복도였다. 1화에서 봤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처음부터였다. 세하가 하율을 복도에 두고 돌아서기 전의 것이 먼저 왔다.
하율의 얼굴이 기억 안에 있었다. 세하는 그 얼굴을 기억 안에서 처음으로 봤다.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 처음 만났던 얼굴이 아니었다. 오래 알고 있던 얼굴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있었다. 세하가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세하가 말했다.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것이 전부였다.
세하는 그 말이 기억 안에서 어떤 무게로 있었는지를 지금 받아들였다. 감정적으로 각색된 것인지 아닌지를 읽어내려 했다. 삼 년의 기술로.
각색되지 않았다.
그 말은 기억 안에서 원래 그 무게였다.
세하가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낮고 흰 천장이었다. 처리실이었다. 조명이 아까보다 밝았다.
구민재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단말기 앞에 앉은 채로.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과를 읽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세하가 어떻게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었다.
하율이 세하의 옆에 있었다. 아까부터 거기 있었다. 손이 세하 가까이에 있었다. 잡지 않은 채로.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따뜻했다. 손의 온기가 거기까지 갔다.
세하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세하가 먼저 말했다.
“다 왔어요.”
구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아로가 벽 앞에서 세하를 봤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의 것들도 있었다. 하율이 기억 안에서 지워진 것들이 아직 거기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았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기억 안에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 씨가. 병원 복도에서 하율 씨 얼굴이.”
하율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조금이었다.
“오래 알던 얼굴이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 안에서도.”
하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손이 움직였다. 처음으로. 세하의 손 가까이에 있던 손이 아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세하가 손을 폈다. 캡슐이 손바닥 위에 있었다. 차갑지 않았다. 이제 따뜻했다.
세하는 캡슐을 하율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이 년을 기다려온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잡는지가 그 안에 있었다.
세하가 말했다.
“이제 하율 씨 차례예요.”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하율의 기억 스캔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막지 못했다고 했던 말의 무게가 지금 다른 방식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막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막아낸 것이었다.
세하는 처리 의자에서 내려섰다. 하율 옆으로 섰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무서워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조금요.” 하율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어젯밤 세하가 한 말과 같았다. 세하는 그것이 낯설지 않았다.
“옆에 있을게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보다 더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한 층을 내려놓는 것이 있었다.
하율이 처리 의자에 앉았다. 눕기 전에 세하를 한 번 봤다. 세하는 거기 있었다.
하율이 눈을 감았다.
구민재가 말했다.
“시작할게요.”
처리실의 조명이 다시 조금 낮아졌다.
세하는 하율의 옆에 서서 창 없는 처리실 벽을 봤다. 기억이 돌아왔다. 이제 세하의 안에 있었다. 각색된 것들과 진짜인 것들이 섞여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나중에 읽어낼 것이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고.
박진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기억 안에 있었다.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를 지운 것도. 그리고 그 전에, 기억원 복도에서 처음 세하를 세나라고 불렀던 것도.
그 이름이 지금 세하 안에서 어떤 무게인지를 세하는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하율이 먼저였다.
세하는 하율의 손 가까이에 손을 내렸다. 잡지 않았다. 그냥 거기 있었다.
처리실이 조용했다.
기억이 돌아왔다. 그러나 세하가 알게 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기억 안에서 세하를 잃으면서도 낯선 사람에게 말을 맡긴 것. 강서진이 그 말을 잃어버릴 뻔하면서도 끝내 전한 것. 도현이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들을 캡슐에 담아둔 것.
기억은 지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지워지지 않았다.
세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처리실 안의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하율의 기억 스캔이 시작되고 있었다.
세하는 거기 있었다.
처리실 안의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세하는 하율의 옆에 서 있었다. 손을 내려놓은 자리가 아까부터 그대로였다. 잡지 않은 채로.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기술자의 집중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오래 알고 있던 사람이 이제 그것을 끝내려는 것이 섞여 있었다.
정아로가 벽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하는 하율의 얼굴을 봤다. 눈이 감겨 있었다. 숨이 고르게 오가고 있었다. 긴장한 것인지 아닌지를 세하는 호흡으로 읽으려 했다. 조금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두려움이 아니었다. 기다려온 사람의 호흡이었다.
구민재가 말했다.
“첫 번째 층이 열렸어요.”
화면 쪽에서 낮은 소리가 왔다. 데이터가 읽히는 소리였다. 세하는 삼 년간 그 소리의 반대편에 있었다. 단말기 앞에서. 지금은 처리 의자 옆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구민재가 말했다.
“박진술이 건드린 구간이 나왔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기계 소리만 있었다.
“삭제가 아니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덮어쓰기예요. 하율 씨 기억 안에서 박진술이 있던 자리가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어요.”
“무엇으로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화면을 보는 채로 잠깐 말이 없었다.
“처음 기억원에 갔을 때요.”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 씨가 기억원에 처음 간 이유. 그게 덮여 있어요. 박진술이 직접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있었던 어떤 일이.”
정아로가 벽 앞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먼저 말하지 않았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의 눈썹이 아주 조금 좁혀졌다. 의식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의 경계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기억이 스캔되는 동안 감각적 잔향이 오는 것이었다. 세하도 어젯밤 그랬다. 냄새가 왔다. 소리가 왔다. 이름 붙이지 못했던 것들이 왔다.
하율의 손이 의자 위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손을 조금 더 가까이 뒀다. 잡지 않은 채로.
구민재가 말했다.
“덮어쓴 것 안을 읽을 수 있어요. 원본이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에요. 박진술 방식이 그래요. 위에 얹는 거예요. 지우는 게 아니라.”
“읽어줘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세하를 잠깐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하율 씨가 기억원에 처음 간 건 사 년 전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의뢰인이 아니에요. 세하 씨 때문이었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세하 씨가 기억원에 있다는 걸 하율 씨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박진술이 세하 씨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그래서 직접 갔어요. 박진술한테.”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사 년 전. 세하가 기억원 안에 있던 시간. 하율이 거기 왔었다는 것. 기억 안에 없었다. 세하가 오늘 아침 돌려받은 기억 안에도 그 장면은 없었다. 하율의 기억 안에 있던 것이었다. 박진술이 덮어씌운 것 아래에.
“그리고 박진술이 하율 씨를 내보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리고 그 기억을 덮어씌웠어요. 하율 씨가 왜 기억원에 갔는지, 거기서 무슨 말을 했는지. 전부.”
정아로가 벽에서 한 걸음 나왔다.
“박진술이 하율 씨한테 한 말이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그날.”
세하가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의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이 마지막 층을 내려놓으려 하고 있었다.
“박진술이 하율 씨한테 말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은 자기 일이 먼저인 사람이에요. 너를 위해 이 안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고 내보냈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하율 씨가 그 말을 믿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자리에서는요.” 정아로가 말했다. “잠깐. 아주 잠깐이요. 그리고 나서 아니라고 했어요. 박진술한테.”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두 박자를 벌었다.
하율이 사 년 전 기억원에 갔다. 박진술이 세하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그리고 박진술이 세하에 대해 말했다. 그 말을 잠깐 들었다가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내보내졌다. 그 기억이 덮어씌워졌다.
이 년 전 하율이 세하를 찾아왔을 때.
그 이 년 전에 이미 하율은 세하를 위해 기억원까지 갔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처리 의자 위에 누운 채로 눈이 감겨 있었다. 그 얼굴이 지금 기억의 층들을 지나고 있었다. 덮어씌워진 것들 아래에서. 사 년 전의 것들이.
구민재가 말했다.
“복원 가능해요. 덮어씌운 것을 걷어내면 원본이 나와요.”
“해줘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단말기를 조작했다. 기계 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더 깊은 곳을 읽는 소리였다.
시간이 흘렀다.
하율의 눈썹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하율이 눈을 떴다.
천천히였다. 천장을 봤다. 낮고 흰 천장. 그것을 보는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억이 오는 방식으로.
세하가 하율을 봤다.
하율이 고개를 돌렸다.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보다 더 오래된 것이 있었다. 사 년 전의 것이 있었다. 기억원 복도에서 박진술과 마주섰던 것이. 세하 때문에 거기 갔었던 것이.
하율이 세하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하가 먼저 말했다.
“왔어요?”
하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천천히.
“다요?”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사 년 전이 왔어요.” 하율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원에 갔던 것이. 그리고 박진술이 나한테 한 말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방금 들었어요. 정아로 씨한테.”
하율이 정아로를 봤다. 정아로가 하율을 봤다. 그 두 눈 사이에서 사 년 전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들이 처음으로 공유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율이 다시 세하를 봤다.
“박진술이 한 말이요.” 하율이 말했다. “그때 잠깐 믿었어요.”
“알아요.”
“그런데 기억 안에서 봤어요. 내가 왜 아니라고 했는지.”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의 눈 안에서 사 년 전의 것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것과 지금 여기 있는 것이 같은 자리에 놓이는 것이었다.
“세하 씨 얼굴 때문이었어요.” 하율이 말했다. “박진술이 말하는 동안. 세하 씨가 기억원 복도에서 걸어가던 것이 머릿속에서 왔어요. 걷는 방식. 그거 보고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이 화면만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세하는 손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꼈다. 캡슐을 아까 하율에게 줬다. 하율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이 지금 처리 의자 위에서 하율의 손 안에 있었다.
세하는 하율에게 손을 뻗었다.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가까이 두는 것이었다. 아까 하율이 세하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데 이번에는 하율이 먼저 손을 폈다.
캡슐이 세하의 손 안으로 돌아왔다.
세하는 그것을 받았다. 따뜻했다. 하율의 온기가 거기까지 가 있었다.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 복원은 일단 여기까지예요.”
모두가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그 눈 안에서 말하려는 것이 있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었다.
“덮어씌워진 것을 걷어냈는데.” 구민재가 말했다. “그 아래에 하나 더 있어요.”
처리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박진술이 두 겹으로 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첫 번째 층은 방금 걷어낸 거고. 두 번째 층은 더 아래에 있어요. 사 년 전보다 더 오래된 것이에요.”
하율이 구민재를 봤다.
“얼마나요.” 하율이 말했다.
구민재가 하율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꺼내질지를 재는 것이 있었다.
“세하 씨랑 처음 만났던 것보다 더 전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 씨가 세하 씨를 알기 전부터. 박진술이 건드린 기억이 있어요.”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방금까지 돌아온 기억의 무게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로 새로운 것이 오고 있었다. 무거움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더 있다는 것의 감각이었다.
세하가 하율을 봤다.
“계속할 수 있어요?” 세하가 물었다.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민재가 단말기로 손을 뻗었다.
세하는 하율 옆에 서서 처리실 벽을 봤다. 손 안의 캡슐이 따뜻했다. 기계 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소리였다.
세하 안에서 무언가가 조여오기 시작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알기 전부터 하율의 기억에 손을 댔다는 것.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세하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아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세하가 스물둘에 어머니를 잃기 전부터.
박진술이 세나라고 처음 부르기 전부터.
하율의 기억 안에 박진술이 먼저 있었다는 것.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구민재가 말한 대로였다. 다 받고 나서.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하율의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오기 시작했다.
기계 소리가 달랐다.
세하는 그것을 알아챘다. 삼 년간 단말기 앞에서 들어온 소리였다. 첫 번째 층을 읽을 때와 두 번째 층을 읽을 때의 차이가 있었다. 깊이가 달랐다. 지금 기계가 내고 있는 소리는 세하가 처리실에서 들어온 것 중 가장 낮은 음역이었다.
하율의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아까보다 느렸다. 기억이 오는 속도가 아니었다. 기억이 아직 오지 않는 것이었다. 층이 너무 깊어서 닿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저항이 있어요."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박진술이 두 번째 층을 훨씬 단단하게 처리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첫 번째 층은 표면에 얹어둔 거였어요. 이건 달라요. 안쪽 구조에 맞게 짜 넣은 거예요."
"뚫을 수 있어요?"
구민재가 잠깐 말이 없었다.
"시간이 걸려요."
정아로가 벽에서 구민재 쪽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리고 멈췄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먼저 말하는 것을 결정하지 못한 것이었다.
세하가 정아로를 봤다.
"알고 있는 거 있으면 말해줘요."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리고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어 정아로를 봤다. 두 사람 사이에서 기억원에서 함께 있었던 시간이 지나갔다.
"박진술이 두 번째 층을 만든 게 언제인지 알아요." 정아로가 말했다. "하율 씨가 기억원에 처음 간 것보다 훨씬 전이에요. 기억원 초창기예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하율 씨가 기억원 안에 있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직원으로가 아니에요. 박진술이 기억원을 만들 때부터. 그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에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들었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처리실 조명이 그대로였다.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하율이 처리 의자 위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손 안의 캡슐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쥐는 힘이 달라진 것이었다. 세하가 알아챘다.
"어떤 방식으로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그것이 모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세하는 알았다.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재는 것이었다.
"박진술이 기억원을 만든 이유가 있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연구소예요. 국가 기술 개발. 그런데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 아니었어요. 박진술이 찾고 있던 게 있었어요. 사람이에요. 특정한 감각을 가진 사람."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펼쳐봤다.
박진술이 골목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기억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읽어내는 감각. 그건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세나한테 있었어요.
"하율 씨도 그 감각이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이 마지막 층을 꺼내는 것이 있었다.
"하율 씨가 먼저였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 씨보다. 박진술이 처음 찾아낸 사람이 하율 씨예요."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기계 소리만 있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처리 의자 위에서 눈이 감겨 있었다.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아직 오고 있었다. 느리게. 단단히 잠겨 있던 것이 천천히 열리는 속도로.
"하율 씨가 어릴 때부터요." 정아로가 말했다. "박진술이 하율 씨를 알고 있었어요. 기억원을 만들기 전부터. 그리고 하율 씨 기억 안에 자신을 단단하게 묻어뒀어요. 하율 씨가 자라면서 그 감각을 쓰지 못하도록."
"왜요." 세하가 말했다.
정아로가 잠깐 말이 없었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고 말했다.
"하율 씨 감각이 자신을 향하는 걸 막으려 한 거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박진술이 하는 일 안에서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하율 씨가 읽어낼 수 있으니까. 그게 박진술한테 가장 위험한 눈이에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기억 안에서 방금 돌아온 것들이 다시 움직였다. 기억원 복도. 박진술이 세나라고 처음 불렀을 때. 그때 세하 안에서 왔던 것. 낯선데 낯설지 않은 것. 그것이 세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지금 다른 방식으로 왔다.
하율이 먼저였다.
박진술이 세하를 찾기 전에 하율을 찾았다. 그리고 하율의 감각을 먼저 잠갔다.
세하가 기억원에서 쓴 능력이 있었다. 박진술이 그것을 필요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전에 같은 능력이 하율 안에 있었고, 박진술은 그것을 쓰지 못하게 묻어뒀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차갑지 않았다. 아직 따뜻했다. 하율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기계 소리가 달라졌다.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읽히기 시작했다.
"열렸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순간 하율의 눈썹이 움직였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랐다. 표정이 바뀌는 것이었다. 기억이 오는 방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아는 것이었다.
하율의 손이 의자 위에서 펴졌다.
세하가 그것을 봤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가까이 두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해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율의 손이 세하 쪽으로 왔다.
잡은 것이 아니었다. 닿은 것이었다. 아주 가볍게. 기억이 오는 동안 무언가를 확인하는 것처럼.
세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구민재가 화면을 읽으면서 말했다.
"하율 씨가 어린 시절 기억이에요. 박진술과 처음 만난 것이 나와요. 그 전에 뭔가가 하나 더 있는데."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세하 씨."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꺼내질지를 마지막으로 재는 것이 있었다.
"하율 씨 기억 안에."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 어머니가 있어요."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기계 소리도 잠깐 낮아지는 것 같았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조명이 그대로였다. 하율이 처리 의자 위에 있었다. 손이 세하 쪽에 닿아 있었다.
그런데 세하의 손 안에서 캡슐이 차가워졌다.
이번에는 쥐는 힘이 아니었다.
손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조여 있었다. "하율 씨를 알고 있었어요?"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어머니가 하율 씨한테 세하 씨를 부탁했어요."
세하는 숨을 고르지 않았다. 고를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그냥 그 말을 받았다.
어머니가 기억원에 갔다. 박진술한테 세하를 시야 밖으로 꺼내달라고 요청했다. 강서진한테 말을 맡겼다. 그것들을 세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하율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율한테 세하를 부탁했다.
기억원에 가기 전에.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도현이 담아둔 것이었다. 기억보다 먼저 오는 것들. 냄새와 소리. 그리고 박진술의 목소리.
그 캡슐 안에 하율과 관련된 것들이 있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 낮고 짧은 웃음소리.
그것이 어머니의 것일 수도 있었다.
세하는 그 가능성을 지금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율이 눈을 떴다.
천천히였다. 천장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지금 막 온 것들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것이었다. 박진술이 묻어뒀던 것의 아래에 있던 것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온 사람의 눈이었다.
하율이 세하를 보면서 말했다.
"어머니를 알아요."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이 막 닿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세하 씨 어머니를." 하율이 말했다. "어릴 때. 박진술이 저한테 처음 왔을 때. 그 전에 먼저 온 사람이 있었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는 사람이었어요." 하율이 말했다. "낮고 짧게 웃는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이 저한테 말했어요. 언젠가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올 거라고. 그때 외면하지 말라고."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세하의 손 안에서 캡슐이 다시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캡슐 안에 담겨 있던 웃음소리가 거기에 있었다. 낮고 짧은 것이었다. 세하가 이름 붙이지 못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이름이 왔다.
세하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율을 봤다. 하율의 눈 안에서 사 년 전의 것과 그보다 더 오래된 것이 지금 이 순간과 겹쳐지고 있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아로가 벽 쪽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의 마지막 층이 지금 내려앉고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따뜻했다.
하율의 온기와 섞인 것인지, 아니면 더 오래된 온기가 거기 남아 있는 것인지 세하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하가 알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기억원에 가기 전에 움직였다. 강서진한테만 말을 맡긴 것이 아니었다. 하율한테도 갔다. 박진술이 묻어두기 전에. 그 아이한테. 언젠가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올 거라고.
그리고 이 년 전, 하율이 세하를 찾아왔다.
세하는 그 두 가지가 연결되는 것을 지금 받아들이는 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판단하지 않았다. 구민재가 말한 대로였다.
다 받고 나서.
"하율 씨."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사람이 말한 게 더 있어요?"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안에서 기억이 아직 오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다 오지 않은 것이었다. 두 번째 층이 열렸지만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아직 전부 오지 않은 것이었다.
하율이 천장을 봤다. 그리고 다시 세하를 봤다.
"그 사람이 말했어요." 하율이 말했다. "올 때 혼자 오지 않을 거라고. 혼자 오면 놓치는 게 생긴다고."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말했다.
"세하 씨."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하율 씨 기억 안에 하나가 더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 사람이 하율 씨한테 남긴 것이요. 박진술이 묻어두기 전에 하율 씨 기억 안에 넣어둔 것이 있어요. 말이 아니에요."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잠깐 멈췄다.
"파일이에요."
처리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그러나 세하의 손끝은 차가웠다.
파일.
어머니가 하율의 기억 안에 파일을 남겼다.
기억원에 가기 전에.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박진술이 하율의 기억에 손을 대기 전에.
그것이 거기 있었다. 이 년 전에도. 사 년 전에도. 하율이 세하를 찾아왔을 때에도. 그 아래에 묻혀서.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열 수 있어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끝날지를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있었다.
"열 수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그런데 세하 씨가 직접 읽어야 해요. 기술자 권한으로. 기억 안에서 꺼낸 파일이니까."
세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
하율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두 번째 층이 열리고 나서 아직 다 오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하를 보는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세하가 단말기 쪽으로 걸었다.
구민재가 자리를 비켜줬다.
세하가 화면 앞에 섰다. 삼 년간 서 있던 자리였다. 타인의 기억을 읽던 자리였다. 지금은 달랐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파일이 거기 있었다.
이름이 없었다. 날짜만 있었다.
세하가 태어나기 일 년 전의 날짜였다.
파일을 여는 데 손이 망설이지 않았다.
세하는 그것을 스스로 알아챘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면서 망설인 적이 없었다. 기술자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망설임이 없는 것이 기술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미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오든.
화면을 눌렀다.
파일이 열렸다.
텍스트가 아니었다. 기억 기반 데이터였다. 기억원의 방식으로 저장된 것이었다. 영상도 아니었다. 세하가 삼 년간 다뤄온 형식과 달랐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기억원 초창기. 기술이 완성되기 전의 방식이었다.
구민재가 세하의 옆으로 왔다. 화면을 봤다.
“읽어줄 수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같이 봐요.” 구민재가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정아로가 벽에서 한 걸음 더 나왔다. 하율이 처리 의자 위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구민재가 말하지 않았다. 괜찮다는 신호였다.
화면 안에서 데이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감각 기반이었다. 텍스트나 영상이 아니라 감각의 집합이었다. 기억원이 초창기에 시도한 방식이었다. 언어보다 먼저 오는 것들을 담는 방식. 세하는 삼 년간 그것을 읽어온 사람이었다. 기억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읽어내는 감각.
세하가 읽기 시작했다.
온기가 먼저 왔다. 화면 안에서 오는 것이었는데 손 안에서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온기였다. 낡은 것의 온기가 아니었다. 오래 지속된 것의 온기였다.
그다음에 낮고 짧은 웃음소리가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캡슐 안에 담겨 있던 것과 같은 소리였다. 도현이 담아뒀던 것. 그것이 여기에도 있었다. 하율의 기억 안에. 어머니가 넣어둔 것 안에.
그리고 언어가 왔다.
텍스트가 아니었다. 기억 안에서 남은 언어였다. 말의 형태가 아니라 말의 무게로 남은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읽는 데 잠깐을 벌었다. 기술자로서. 각색된 것과 아닌 것을 구별하면서.
각색되지 않았다.
원본이었다.
세하는 화면 앞에서 천천히 읽었다.
어머니가 하율에게 말했다. 파일 안에서. 기억원에 가기 전에. 박진술이 이 아이의 기억에 손을 대기 전에.
아이야.
너한테 부탁하는 게 맞는 것인지 모르겠다. 너는 아직 어린데. 그리고 이것이 언제 올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내가 틀린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한다.
내 딸이 올 거다. 언젠가. 혼자이거나 혼자가 아니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네 앞에 올 거다. 그 아이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올 거다. 그때 네가 옆에 있어줬으면 한다.
가르쳐달라는 게 아니다. 채워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옆에 있어달라는 거다.
그 아이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알아. 내가 낳은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옆에만 있어줘. 찾아낼 때까지.
세하는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그 아래에 하나가 더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만 더. 이건 부탁이 아니다. 그냥 말해두고 싶어서.
너한테도 찾아낼 것들이 있다. 박진술이 그걸 알고 있어. 그래서 네가 무서운 거야. 그 사람한테. 그러니까 네 감각을 믿어. 누가 덮어두려 해도. 그 아래에 있는 거니까. 없어진 게 아니야.
파일이 끝났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데이터가 닫혀 있었다. 읽은 것이었다. 다 읽은 것이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구민재가 세하의 옆에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아로가 벽 가까이에서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이 이제 완전히 내려앉은 것이 있었다. 무거움이 없어진 자리의 것이었다.
세하는 단말기 앞에서 돌아섰다.
하율이 처리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상체를 일으킨 채로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두 번째 층이 열리고 난 뒤의 것들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채로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것들. 박진술이 묻어두기 전에 있었던 것들. 그리고 방금 세하가 읽고 있는 동안 하율의 기억 안에서도 무언가가 오고 있었을 것이었다.
세하가 하율에게 걸었다.
하율 앞에 섰다. 손 안의 캡슐을 봤다. 따뜻했다. 하율의 온기와 섞인 것이었다. 그리고 더 오래된 온기도 거기 있는 것 같았다.
세하가 캡슐을 하율에게 다시 내밀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냥 손 안에 쥐었다.
“읽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이 년의 방식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방식으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하율 씨한테 부탁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내가 올 때 옆에 있어달라고.”
하율이 숨을 고르는 소리가 아주 조금 들렸다.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내가. 그러니까 찾아낼 때까지 옆에만 있어달라고.”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이 년 전에 세하를 찾아왔을 때부터 있었던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자리를 바꾸는지가 그 안에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읽었다. 삼 년의 기술로 읽지 않았다. 그냥 봤다.
“알고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그 부탁을.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기억에서 지워진 구간이었으니까.” 하율이 말했다. “몰랐어요. 그런데.”
하율이 잠깐 멈췄다.
“세하 씨를 찾아갔을 때.” 하율이 말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어요. 왜 이 사람인지. 왜 이 사람 앞에서는 기다릴 수 있는지. 그냥 그렇다는 것만 알았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지금은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어린 시절의 것과 이 년 전의 것과 지금 이 순간의 것이 겹쳐지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알아요.” 하율이 말했다. “왜 기다릴 수 있었는지.”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기억 안에 없는 곳에서 오는 반응이 왔다. 판단하지 않았다. 그냥 받았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말했다.
“세하 씨.”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지금 마지막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피로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 피로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사람의 가벼움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하율 씨 기억 복원은 마무리됐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두 번째 층까지 다 걷어냈어요.”
하율이 구민재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는 것이 있었다.
“강서진 씨 기억은.” 세하가 말했다.
“다음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오늘 안으로 할 수 있어요. 강서진 씨가 준비되면.”
세하는 핸드폰을 꺼냈다. 도현에게 문자를 입력했다.
― 끝났어요. 강서진 씨 데리고 올 수 있어요?
전송하고 핸드폰을 내렸다.
정아로가 세하 쪽으로 걸어왔다. 세하 앞에 섰다. 그 눈 안에서 말하려는 것이 있었다. 오래된 것이었다.
“박진술이요.” 정아로가 말했다.
세하가 정아로를 봤다.
“오늘 이걸 알게 됐다는 걸 알 거예요. 어떤 방식으로든.” 정아로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 안에 있던 것들이 열렸다는 것을.”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받아들였다. 박진술이 묻어뒀던 것이 열렸다. 어머니가 남긴 파일이 읽혔다. 박진술이 그것을 감지할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세하는 지금 알지 못했다.
“그래서요.” 세하가 말했다.
“움직일 것 같아요.” 정아로가 말했다. “오늘 안으로. 아니면 내일.”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말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그러나 세하의 손끝은 차가웠다. 아까부터 그랬다. 파일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핸드폰이 울렸다. 도현이었다.
― 강서진이 가겠다고 해. 지금 나가려고.
세하는 화면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하율을 봤다. 구민재를 봤다. 정아로를 봤다.
“강서진 씨 오고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아무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세하는 처리실 안을 한 번 봤다. 기계들이 조용히 있었다. 낮고 흰 천장이 있었다. 세하가 오늘 아침 여기 누웠던 것이 이미 오래전 같았다. 그러나 몇 시간 전이었다.
그 시간 안에서 온 것들이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억 안에서 왔다. 어머니의 눈이 식탁 너머에서 세하를 보던 것이 왔다. 박진술이 세나라고 처음 불렀던 순간이 왔다. 기억원 복도에서 걷던 것이 왔다. 의뢰인 목록 안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찾았던 것이 왔다. 그리고 병원 복도에서 하율에게 말했던 것이 왔다.
네가 더 이상 나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세하는 그 말이 기억 안에서 원래 그 무게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하율에게 남긴 말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세하는 처리실 문 쪽을 봤다.
강서진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박진술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두 가지가 같은 방향에서 오고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세하가 스스로. 그것이 지금 세하 안에 있었다.
처리실 문이 열렸다.
강서진이었다. 도현이 뒤에 있었다. 두 사람이 처리실 안으로 들어왔다. 강서진의 눈이 세하를 봤다. 그 안에서 오늘 밤 울었던 것과 결정하고 온 것이 같이 있었다.
“왔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네.”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이 처리 의자를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무서워요.” 강서진이 말했다. 먼저 말하는 방식이었다. 숨기는 것이 아니었다.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처리 의자 쪽으로 걸었다.
그때 세하의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세하는 화면을 봤다. 처리실 안의 모두가 세하를 봤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멈췄다. 정아로가 세하 쪽으로 한 걸음 나왔다.
세하는 전화를 받았다.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왔다.
“세나야.”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박진술이었다.
“기억이 다 돌아온 것 같군요.” 박진술이 말했다. “하율이 것도. 내가 묻어뒀던 것도 다 열었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남긴 것을 읽었군요.” 박진술이 말했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박진술 씨.” 세하가 말했다.
“네.”
“할 말이 있으면 여기로 와요.” 세하가 말했다. “전화로 하지 말고.”
전화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지금 어디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레테요.” 세하가 말했다. “지하 1층 처리실.”
침묵이 흘렀다. 길지 않았다.
“삼십 분이요.” 박진술이 말했다.
전화가 끊겼다.
세하는 핸드폰을 내렸다. 처리실 안의 모두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구민재의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지금 마지막 방향을 정하는 것이 있었다.
정아로의 눈 안에서 오래 막지 못했던 것을 이번에는 막겠다는 것이 있었다.
하율이 처리 의자에서 내려섰다. 세하 옆으로 왔다. 말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도현이 세하를 봤다.
세하는 처리실 문 쪽을 봤다.
삼십 분이었다.
그 안에 강서진의 기억 복원을 마쳐야 한다고 세하는 생각했다. 박진술이 오기 전에. 강서진이 자신의 기억을 온전히 돌려받고 나서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강서진 씨.”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서둘러야 해요.” 세하가 말했다. “삼십 분 안에 끝낼 수 있어요?”
구민재가 단말기 앞으로 돌아갔다.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강서진이 처리 의자에 앉았다. 눕기 전에 세하를 한 번 봤다.
세하는 거기 있었다.
처리실의 조명이 다시 조금 낮아졌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강서진이 처리 의자에 누웠다. 조명이 낮아졌다. 세하는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삼십 분이라는 것이 몸 안에서 재지고 있었다.
정아로가 세하 옆으로 왔다.
“박진술이 어떻게 알았을까요.”
세하가 정아로를 봤다.
“하율 씨 기억 안에 있던 것들이 열렸다는 걸.”
“추적 신호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캡슐 재생할 때 발신된다고 했잖아요. 기억원 기술 기반이면 파일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오래된 방식일수록 더 단순해서 오히려 막기가 어려워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파일을 열었던 것. 읽었던 것. 그 순간 신호가 나갔던 것이었다.
“박진술이 그걸 알면서 설계한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정아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묻어뒀던 것이 열리면 알 수 있도록. 그 자신이.”
세하는 그 구조를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박진술이 하율의 기억 안에 어머니의 파일을 묻어두지 않았다. 어머니가 먼저 넣었다. 박진술은 그것을 알면서 그 위에 자신을 덮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 덮개를 걷어내면 자신이 알 수 있도록 장치를 남겼다.
그것이 막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처리실 안에서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강서진 씨 첫 번째 층 열렸어요.”
강서진의 호흡이 고르게 오가고 있었다. 눈이 감겨 있었다. 아까 처리 의자에 앉기 전에 세하를 봤던 눈이 있었다. 무서워요, 라고 먼저 말했던 방식이. 숨기는 것이 아닌 방식이었다.
도현이 강서진의 옆에 서 있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 옆에 있었다. 처리 의자에서 내려선 이후로 세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잡지 않은 채로.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하율 씨.”
하율이 세하를 봤다.
“어머니가 처음 왔을 때 기억이 온전히 돌아왔어요?”
하율이 잠깐 말이 없었다. 두 번째 층이 열리고 난 뒤의 것들이 아직 가라앉는 중이었다. 그것을 세하는 알았다.
“얼굴이 왔어요.” 하율이 말했다. “웃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랑. 그 사람이 제 손을 잡았던 것이랑.”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말은요.”
“다는 아니에요.” 하율이 말했다. “언젠가 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올 거라고 했다는 것만. 그리고.” 하율이 잠깐 멈췄다. “외면하지 말라는 것.”
세하는 파일 안에서 읽었던 것들을 하율에게 전부 말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강서진이 처리 의자 위에 있고 삼십 분이 재지고 있는 지금은.
“나중에 다 말할게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이 년의 방식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방식으로 기다리는 것이었다. 재촉하지 않는 것이었다.
“알겠어요.” 하율이 말했다.
구민재가 말했다.
“강서진 씨 기억에서 박진술이 처리한 구간 나왔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정아로가 단말기 쪽으로 한 걸음 나왔다가 멈췄다.
“하율 씨 때랑 같은 방식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덮어쓰기예요. 삭제가 아니라.”
“어느 구간이에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원에서 나오기 직전이에요.”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강서진 씨가 박진술한테 내보내지기 전. 세하 씨 어머니 파일 처리 작업을 옆에서 봤던 것. 그 구간이 덮여 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강서진이 기억원에서 나오면서 지워진 것이 구민재 소행인지 박진술 소행인지 불분명하다고 했던 것이 있었다. 지금 답이 오고 있었다. 박진술이었다. 구민재가 처리한 것 아래에 박진술이 먼저 있었던 것이었다.
“걷어낼 수 있어요?”
“해요.” 구민재가 말했다. 이미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계 소리가 달라졌다. 강서진의 눈썹이 아주 조금 좁혀졌다. 기억이 오는 방식으로 오는 반응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세하는 처리실 문 쪽을 봤다. 닫혀 있었다. 삼십 분 중 얼마가 지났는지 세하는 가늠했다. 절반쯤이었다.
구민재가 말했다.
“열렸어요.”
강서진의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처음에는 느렸다. 그리고 점차 빠르게. 기억이 쏟아지는 방식이 아니었다. 하나씩 오는 것이었다. 단단히 잠겨 있던 것이 순서대로 풀리는 것이었다.
강서진의 손이 의자 위에서 폈다.
도현이 그것을 봤다. 그리고 강서진의 손 가까이에 자신의 손을 뒀다. 잡지 않은 채로.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따뜻했다.
구민재가 화면을 읽으면서 말했다.
“강서진 씨 기억 안에서 세하 씨 어머니 파일 처리 장면이 나왔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박진술이 작업한 것이에요. 강서진 씨는 옆에 있었던 거고.”
정아로가 구민재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그 자리에 자신도 있었다는 것이 있었다. 오래 막지 못했다고 했던 것들 중 하나가 거기 있었다.
“어머니 파일이 어떻게 됐는지 나와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삭제가 아니에요.”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박진술이 세하 씨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 씨를 지운 것. 기억원 기술로 했는데.” 구민재가 말했다. “그 원본 파일이 남아 있어요. 박진술이 보관하고 있어요. 자신한테.”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두 박자를 벌었다.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가 지워진 것. 그 원본이 있었다. 박진술이 들고 있었다.
어젯밤 골목에서 박진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막으러 온 게 아니에요.
그리고 오늘 전화에서 했던 것.
할 말이 있으면 여기로 와요.
세하가 그렇게 말했다. 박진술이 삼십 분이라고 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러나 캡슐은 따뜻했다.
강서진이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도현을 봤다. 도현이 강서진을 봤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 년간 각자 들고 있던 것들이 지금 같은 자리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왔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이 막 닿은 사람의 목소리였다. “어머니 기억 안에서 세하 씨가 지워지던 것이.”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진술이 작업하는 동안 제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그때 제가 봤어요.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어요. 옮겨지는 것이었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어머니 기억에서 꺼낸 것을 박진술이 자신한테 넣었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그 장면을 내가 봤다는 것을 박진술이 알고 덮어씌운 거예요.”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말했다.
“지금 강서진 씨가 말한 것과 기억 데이터가 일치해요.”
세하는 천천히 숨을 고르지 않았다. 고를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다. 그 말을 그냥 받았다.
박진술이 어머니 기억 안의 세하를 지운 것이 아니었다. 자신 안에 넣어둔 것이었다.
그것이 막으러 온 게 아니라는 말의 나머지였다. 그리고 삼십 분 안에 오겠다고 한 것의 나머지였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끝날지를 보려는 것이 있었다.
하율이 세하 옆에 있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세하는 처리실 문 쪽을 봤다.
삼십 분이 거의 됐다.
그리고 문이 열렸다.
박진술이었다.
낡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어젯밤 골목에서와 같았다. 키가 크지 않았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처리실 안을 한 번 봤다. 사람들을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계산이 없었다.
박진술이 손을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꺼냈다.
캡슐이었다.
세하가 들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그러나 더 오래된 것이었다. 기억원 초창기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박진술이 세하에게 걸어왔다. 멈추지 않았다. 그 앞에 섰다.
캡슐을 세하 쪽으로 내밀었다.
“어머니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 것이에요. 돌려줄게요.”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세하는 박진술의 손 위에 있는 캡슐을 봤다. 그리고 박진술의 눈을 봤다. 그 안에서 오늘 이 자리에 오기까지의 것이 있었다. 오래된 것이었다. 계산이 아닌 것이었다.
세하는 손을 뻗었다.
캡슐을 받았다.
차가웠다. 세하의 손이 차가워서인지 캡슐 자체가 차가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손 안에 쥐는 순간 어디선가 무언가가 왔다. 기억이 아닌 방식의 것이었다. 오래된 나무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재생하기 전에.” 박진술이 말했다. “할 말이 있어요.”
세하는 캡슐을 손 안에 쥔 채로 박진술을 봤다.
“들을게요.”
박진술이 세하를 오래 봤다. 처리실 안의 모든 사람이 거기 있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돌아서 있었다. 정아로가 벽 가까이에서 세하를 보고 있었다. 하율이 세하 옆에 있었다. 강서진이 처리 의자에서 내려서 있었다. 도현이 강서진 옆에 있었다.
박진술의 눈이 그 모두를 한 번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세하에게 왔다.
“세나 어머니가 기억원에 왔을 때.” 박진술이 말했다. “나한테 두 가지를 요청했어요. 하나는 세나를 시야 밖으로 꺼내달라는 것. 그건 어젯밤에 말했어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이 지워지기 전에 세나 것을 보관해달라는 거였어요. 자신의 기억 안에서 세나에 대한 것들이 지워지더라도. 그것만은 남겨달라고.”
세하의 손 안에서 캡슐이 차가웠다.
“내가 그걸 들어준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리고 들고 있었어요. 지금까지.”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왜 지금이에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어머니가 조건을 달았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가 스스로 찾아낼 때까지 기다리라고. 내가 먼저 주려 하면 안 된다고.”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파일 안에서 읽었던 것이 있었다.
그 아이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하율에게 남긴 말이었다. 그리고 박진술에게도 같은 것을 말했다는 것이었다.
“오늘 하율 씨 기억 안의 것들이 열렸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어머니가 남긴 파일을 세나가 읽었어요. 그것이 조건이었어요. 어머니가 남긴 것을 세나가 직접 찾아냈을 때.”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박진술이 어머니 기억 안의 세하를 지운 것이 아니었다. 옮긴 것이었다. 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세하는 그 구조를 펼쳐봤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쌓아온 것으로. 각색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이 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세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서 전부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박진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기억 안에 있었다. 믿고 있었던 것도. 어머니의 이름을 의뢰인 목록에서 발견했던 것도. 그리고 하율에게 말했던 것도.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었다.
“박진술 씨.” 세하가 말했다.
“네.”
“지금 바로 판단하지 않을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어젯밤에도 그렇게 말했어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런데 이건 말할게요.” 세하가 말했다. “어머니가 이것을 당신한테 맡긴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내가 스스로 읽어낼 거예요. 당신이 설명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박진술의 눈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계산이 아닌 것이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세하는 지금 이름 붙이지 않았다.
“알겠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두 개였다. 도현이 만든 것과 박진술이 들고 있던 것. 두 손에 하나씩 있었다.
세하는 박진술을 봤다.
“기억원 안에서 세하가 본 것들이요.” 세하가 말했다. “강서진 씨 기억도 돌아왔어요. 구민재 수석님이 하율 씨 기억도 복원했어요. 이제 여기 있는 사람들이 그때 있었던 것을 알아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것에 대해서는요.” 세하가 말했다. “오늘 여기서 전부 얘기해요.”
박진술이 처리실 안을 봤다. 구민재가 있었다. 정아로가 있었다. 하율이 있었다. 강서진이 있었다. 도현이 있었다.
박진술이 다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마지막으로 어떤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있었다.
“다 말할게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손 안의 두 캡슐을 느꼈다. 하나는 따뜻했다. 하율의 온기가 남은 것이었다. 하나는 아직 차가웠다.
세하는 차가운 캡슐을 안주머니에 넣었다.
지금 당장 재생하지 않을 것이었다. 박진술이 말하는 것을 먼저 들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기억이 돌아왔고, 어머니가 남긴 것도 읽었고, 하율의 기억도 복원됐고, 강서진의 것도 돌아왔다.
그 모든 것을 다 받고 나서 읽어낼 것이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세하가 처리실 안쪽으로 걸었다. 구민재가 있는 쪽이었다. 벽을 등지고 설 수 있는 자리였다.
“앉아요.” 세하가 박진술에게 말했다.
처리실 안에 의자가 하나 있었다. 강서진이 복원 전에 앉았던 것이었다.
박진술이 그 의자를 봤다. 그리고 앉았다.
처리실 안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있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세하를 봤다. 정아로가 벽 가까이에서 박진술을 봤다. 하율이 세하 옆에 있었다. 강서진과 도현이 처리실 한쪽에 있었다.
세하는 박진술을 봤다.
“시작해요.”
박진술이 의자에 앉았다. 낡은 외투가 그대로였다. 처리실 안의 조명이 낮았다. 어젯밤 골목에서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골목이 아니었다. 처리실이었다. 기억을 다루는 곳이었다. 세하는 그것이 이 장소에서 이 사람이 말해야 한다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박진술이 처리실 안을 한 번 봤다. 천천히였다. 구민재를 봤다. 정아로를 봤다. 하율을 봤다. 강서진을 봤다. 도현을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사람들 각각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를 재는 것이 있었다. 계산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말해야 할 것의 무게를 가늠하는 것이었다.
"기억원을 만든 건." 박진술이 말했다. "국가 연구소 명목이었어요. 그건 다 알고 있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처음부터 목적이 달랐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찾고 있던 것이 있었어요. 기억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덧씌워진 것인지 읽어내는 감각. 그건 기술이 아니에요. 사람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정아로가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말하지 않았다.
"하율 씨를 처음 찾아낸 게 언제예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하율 씨가 열두 살이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원을 만들기 전이에요. 내가 아직 연구소에 있을 때였어요. 우연이 아니었어요. 찾아다닌 거예요."
하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진술을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두 번째 층이 열린 뒤 돌아온 기억들이 지금 이 목소리와 겹쳐지고 있었다.
"그 나이에 이미 있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 감각이.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것 안에서 무엇이 진심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아이가 먼저 알았어요. 가르친 게 아니에요. 원래 있던 거예요."
"그래서 묻어뒀어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 감각이 나한테 향하면."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하는 일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하율 씨가 읽어낼 수 있으니까. 그게 무서웠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기계 소리만 낮게 깔렸다.
"그게 솔직한 이유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다른 말로 포장하지 않을게요."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박진술을 봤다. 오래 함께 일한 사람을 보는 눈이었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지금 최종적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세하한테 간 건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 씨 감각을 묻어두고 나서. 나한테 간 건 왜예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세나 어머니 때문이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어머니가 하율 씨한테 먼저 갔었어요. 내가 모르게. 나중에 알게 됐어요. 어머니가 그 아이한테 무언가를 맡겼다는 걸."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파일 안에서 읽었던 것들이 다시 움직였다. 어머니가 먼저 하율에게 갔다. 그리고 박진술이 그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어머니를 기억원에 오게 한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아니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어머니가 스스로 왔어요. 내가 세나한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온 거예요. 그건 어젯밤에 말한 대로예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그런데." 박진술이 말했다. "어머니가 왔을 때, 내가 이미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하율 씨한테 무언가를 남겼다는 것을. 그 파일이 하율 씨 기억 안에 있다는 것을."
정아로가 벽에서 박진술 쪽으로 한 걸음 나왔다.
"그래서 덮어씌운 거예요." 정아로가 말했다. "하율 씨 기억 안에. 어머니 파일 위에."
박진술이 정아로를 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일을 지우지 않은 건요." 세하가 말했.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지울 수 없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원 초창기 방식으로 넣어둔 거예요. 어머니가. 그 방식은 삭제가 안 돼요. 덮어씌우는 것만 가능해요."
세하는 그 말의 구조를 펼쳐봤다. 어머니가 그것을 알고 그 방식을 선택한 것이었다. 지워지지 않는 방식으로 남긴 것이었다.
강서진이 처리실 한쪽에서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기억원에서 봤던 것들이 지금 이 말들과 맞춰지고 있었다.
"세하 씨 어머니 기억에서 세하 씨를 꺼낸 것도요." 강서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처음으로 박진술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었다. "삭제가 아니었어요. 제가 봤어요. 옮긴 거잖아요."
박진술이 강서진을 봤다. 오래 본 것이었다.
"맞아요." 박진술이 말했다.
"왜요." 강서진이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박진술이 강서진에서 세하로 눈을 옮겼다.
"어머니가 요청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자신의 기억에서 세나가 지워지더라도, 세나에 대한 것들이 없어지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고. 그러니 어딘가에 보관해달라고."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안주머니 안에 있었다. 차갑게 있었다.
"그래서 당신한테 넣어뒀어요." 세하가 말했.
"내가 제안한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어머니한테. 내가 들고 있겠다고. 어머니가 잠깐 말이 없었어요. 그리고 허락했어요. 조건을 달고."
"스스로 찾아낼 때까지."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어머니가 세나를 알고 있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기 딸이니까."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두 박자를 벌었다. 판단하지 않았다. 그냥 받았다.
"기억원에서 세나한테 한 것들이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것에 대해서는." 박진술이 잠깐 멈췄다. "어머니 기억 안의 것을 돌려주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함께 있었던 시간과 그 이후의 것이 지금 같은 자리에 있었다.
"기억원 안에서." 세하가 말했다. "내가 봤던 것들이 있어요. 기억이 돌아오면서. 의뢰인 목록 안에서 어머니 이름을 찾은 것도. 그게 어떤 방식으로 거기 있게 된 건지."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피하는 것이 없었다.
"다 말할게요." 박진술이 말했다. "어머니가 기억원에 의뢰인으로 온 것이 아니에요. 그 이름이 목록에 들어간 건 내가 한 거예요. 어머니 기억을 처리한 이후에.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
세하가 박진술을 봤다.
"어머니한테 허락받은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안에 있는 것을 세하는 읽었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쌓아온 것으로. 각색이 아니었다. 그것이 부정하기 위한 침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니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하율이 세하 옆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하 쪽으로.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더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박진술을 봤다.
"기억원 안에서 한 것들을 전부 말해요." 세하가 말했다. "어머니 것만이 아니라. 하율 씨 것도. 강서진 씨 것도. 그리고 내가 기억원에 있던 동안 당신이 한 것들도."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오래.
처리실 안의 조명이 낮게 깔렸다. 기계 소리가 있었다. 세하의 안주머니 안에서 차가운 캡슐이 있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박진술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했다.
박진술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천히였다. 기억원이 만들어지기 전의 이야기부터였다. 세하는 그것을 들으면서 판단하려 하지 않았다. 먼저 다 받기로 했다. 어머니가 하율에게 남긴 파일 안에서 읽었던 것처럼. 그 아이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 지금 세하가 하려는 것이 그것이었다.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원은 처음부터 국가 연구소가 아니었다. 명목이 그랬을 뿐이었다. 박진술이 국가 기관 안에서 처음 이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목적은 단순했다. 기억 안에서 진짜와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술적 방법론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연구를 진행하면서 알게 됐다. 기술이 아닌 것이 있었다. 사람 안에 원래 있는 것이었다. 가르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찾기 시작했다.
“하율 씨를 찾아낸 건.” 박진술이 말했다. “학교 선생님한테서 얘기를 들었어요. 그 아이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직접 가서 봤어요. 열두 살이었어요.”
하율이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기억이 오고 있었다. 두 번째 층이 열린 뒤에도 아직 다 가라앉지 않은 것들이었다. 어린 시절의 것이었다.
“그때 뭐라고 했어요.” 하율이 말했다. 묻는 것이었는데 목소리가 평탄했다.
박진술이 하율을 봤다.
“연구소에서 일하지 않겠냐고 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아이한테. 지금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데 그때 나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물었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부모님이 거절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당연히. 그래서 그냥 나왔어요. 그런데 나오면서 알고 있었어요. 이 아이가 크면 그 감각을 쓰게 될 거라는 걸. 그리고 그게 나한테 향하면 안 된다는 걸.”
“그래서 기다렸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벽 가까이에서였다. “하율 씨가 기억원에 올 때까지.”
박진술이 정아로를 봤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기다린 게 아니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하율 씨가 스스로 왔을 때. 그때 처리한 거예요. 준비하고 있다가 한 게 아니에요. 왔을 때 한 거예요.”
“차이가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피하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답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나한테는 있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때는.”
처리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박진술이 말을 이었다. 하율의 기억을 처리한 것. 기억원 초창기 방식으로 덮어씌운 것. 하율이 기억원에 왔던 이유를, 그리고 박진술이 한 말들을 알 수 없도록 한 것. 그리고 강서진이었다.
“강서진 씨는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직접 채용했어요. 기억원 정식 직원으로. 정아로 씨를 통해서.”
정아로가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그 사실이 이 자리에서 말해지는 것을 오래 기다려온 것이 있었다.
“강서진 씨가 기억원에서 나가게 된 건.”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 어머니 기억을 처리하는 현장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내가 하는 것을 봤어요. 그리고 세나 어머니가 처리 직전에 강서진 씨한테 무언가를 말했어요. 나는 그게 무엇인지 들을 수 없었어요.”
강서진이 박진술을 봤다. 처리실 한쪽에서였다. 그 눈 안에서 기억이 돌아온 것과 지금 이 말이 맞닿고 있었다.
“그래서 내보낸 거예요.” 강서진이 말했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기억을 처리했어요.”
“네.” 박진술이 말했다.
도현이 강서진 옆에서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말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참고 있는 것이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세나한테 한 것들이요.” 박진술이 말했다. “기억원 안에서.”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이었다.
“세나한테 그 감각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박진술이 말했다. “하율 씨와는 달랐어요. 하율 씨는 내가 찾아간 거예요. 세나는 내가 만든 자리에 들어온 거예요. 어머니가 없어진 뒤에. 내가 먼저 접근한 거예요.”
세하의 손 안에 있던 캡슐이 따뜻했다. 하율의 온기가 남은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느끼면서 박진술의 말을 들었다.
“기억원 안에서 세나가 한 일들이 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의뢰인 기억을 읽는 것.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판별하는 것. 그게 기술 개발에 쓰인 거예요. 세나는 그것이 연구 업무라고 알고 있었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지금 소리로 나오는 것을 듣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가 읽어낸 것들이 기억원 외부로 나갔어요. 특정 의뢰인들의 기억 안에서 진짜인 것이 무엇인지. 그 정보가 어디에 쓰였는지를 세나는 알지 못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기억 안에서 되찾아온 것들을 움직였다. 기억원 복도. 판별 작업을 하던 방. 의뢰인들의 얼굴을 본 적 없이 캡슐로만 다뤘던 것. 결과가 어디로 가는지 물어본 적 없었던 것. 그것이 왜 그랬는지를 세하는 기억 안에서 찾을 수 없었다. 물어보지 않은 것인지, 물어봤는데 기억에서 지워진 것인지.
“내가 그것을 알게 된 게.” 세하가 말했다. “기억원에서 나오기 전이었어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네.” 박진술이 말했다. “도현 씨한테서 들었어요. 세나가.”
도현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 전 기억이 삭제되기 전에 알고 있던 것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맞춰지고 있었다. 그것이 이제야 오는 것이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지금 박진술의 말로 오고 있었다.
“도현이 어떻게 알았어요.” 세하가 말했. 도현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박진술을 보는 것이었다.
“내부 자료를 찾아낸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도현 씨가. 그리고 세나한테 가져갔어요. 강서진 씨도 그때 같이 있었어요.”
강서진이 아주 조금 숨을 고르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셋이 자료를 빼내려 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것이 기억원 밖으로 나가면 전체 구조가 드러나니까. 그걸 막으려고 내가 한 것들이 있어요. 세나 기억을 지운 것만이 아니에요.”
박진술이 잠깐 멈췄다.
“도현 씨 기억도요.” 박진술이 말했다. “강서진 씨 기억도. 세 사람이 같이 알고 있던 것을 전부 처리하려 했어요.”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도현이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년간 혼자 감지해온 공백이 지금 소리로 오는 것이 있었다. 격렬한 반응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주 조용히 무언가가 조여오는 것이었다.
“전부 처리하려 했다고요.” 도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세나가 먼저 의뢰하러 왔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그건 세나가 알고 있는 것이고. 도현 씨 것은 내가 강제로 한 거예요. 강서진 씨 것도. 세나가 막으려 했는데 늦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기억 안에서 그 장면이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하율에게 했던 말 직전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 있던 것은 기억 안에서도 아직 흐렸다. 복원된 기억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세하는 알고 있었다. 기억도 되찾더라도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고. 세하가 스스로 의심해온 것이었다.
“내가 막으려 했다는 것.” 세하가 말했다. “그게 기억 안에서 오지 않아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부분이 불완전하게 남은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가 의뢰한 것 이전의 시간. 내가 장담할 수 없어요. 내가 처리한 게 아니라 세나가 스스로 의뢰한 거니까.”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말했다.
“복원을 더 진행할 수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 기억에서. 오늘 아침에 마무리한 것보다 더 깊은 층이 있을 수 있어요.”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그게 필요한지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따뜻했다. 안주머니 안에 있는 차가운 캡슐도 있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박진술한테 맡겨뒀던 것이었다. 세하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한 가지만 더 말할게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하가 박진술을 봤다.
“기억원 자료가 외부로 나가면 안 됐던 이유가 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그것을 막으려 한 이유가 단순히 연구 기밀 때문이 아니에요.”
처리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기계 소리만 낮게 깔렸다.
“그 자료 안에.”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 어머니 이름만 있는 게 아니에요. 기억원이 처리한 사람들의 목록이 있어요.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지금도 자신의 기억이 처리됐다는 것을 모르고 있어요. 그 수가 세나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아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정아로가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이 이 말 이후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재고 있었다.
“그래서 자료를 세 사람이 꺼내려 한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나가 목록 안에서 그 사람들을 찾아낸 거예요. 그 감각으로. 숨겨진 것들을.”
세하는 기억 안에서 그 순간을 찾으려 했다. 의뢰인 목록. 세 번째 이름에서 신체 반응이 왔던 것. 강서진이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세하가 기억원 안에서 본 목록이 있었다. 그것이 기억 안에서 아직 흐렸다.
“그 목록이 지금 어디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리고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이번에는 캡슐이 아니었다.
접힌 종이였다. 얇지 않았다. 여러 장이 겹쳐진 것이었다. 박진술이 그것을 꺼내 세하 쪽으로 내밀었다.
“이 년 전 세나가 빼내려 했던 것이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막았어요. 그런데 오늘 가지고 왔어요.”
처리실 안의 모두가 그 종이를 봤다.
세하는 박진술의 손 위에 있는 것을 봤다. 그리고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계산이 없었다. 그러나 세하는 그것을 읽는 데 한 박자를 벌었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쌓아온 것으로. 지금 손을 뻗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하율이 세하 옆에서 말했다.
“세하 씨.”
세하가 하율을 봤다. 하율의 눈 안에서 지금 이 순간 박진술이 하는 것을 읽어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두 번째 층이 열리고 돌아온 감각이었다. 박진술이 묻어두려 했던 것이었다. 지금 그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하율이 세하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 안에 있는 것을 세하는 읽었다. 기술자로서 읽은 것이 아니었다. 그냥 봤다.
세하는 손을 뻗었다. 박진술이 내민 종이를 받았다.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냥 종이였다.
세하는 종이를 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이름들이 있었다. 빽빽했다. 세하는 천천히 훑었다. 삼 년간 의뢰인 목록을 읽어온 방식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숨겨진 것을 찾는 방식이었다. 기억원 안에서 했던 것이었다. 기억 안에서 아직 흐렸던 것이 지금 손 안의 종이와 맞닿으면서 어딘가에서 열리는 것 같았다.
세하의 손이 멈췄다.
목록 중간에 있는 이름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손 안에서 캡슐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쥐는 힘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손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아까 어머니 파일을 읽었을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세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이름을 봤다.
그리고 기억 안에서 흐렸던 것이 지금 막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세하는 그 이름을 봤다.
종이 위에 있었다. 다른 이름들과 같은 크기로, 같은 간격으로 적혀 있었다. 특별한 표시가 없었다. 그런데 세하의 손이 거기서 멈춰 있었다.
이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이름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 날짜가 있었다. 처리 일자였다. 그리고 그 옆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처리 방식이었다. 다른 이름들과 다른 표기가 거기 있었다.
자발적 의뢰가 아닌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읽었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쌓아온 것으로. 그런데 지금은 기술자의 방식이 아니었다.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세하는 알아챘다. 캡슐을 쥐는 힘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손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보고 있었다.
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구민재의 눈을 봤다. 그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있었다. 지금 세하가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하가 스스로 찾아낼 때까지 기다린 것이었다.
세하는 종이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이 이름이요.”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조여 있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알아요?” 박진술이 말했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기계 소리만 낮게 깔렸다. 하율이 세하 옆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지금 이 순간 세하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읽으려 하는 것이 있었다. 박진술이 묻어두려 했던 감각이었다. 지금 그것이 작동하고 있었다.
세하의 기억 안에서 흐렸던 것이 지금 윤곽을 잡기 시작했다.
기억원 안의 방이었다. 판별 작업을 하던 곳이었다. 세하가 캡슐을 다루던 자리였다. 그리고 그 자리 옆에 누군가가 있었던 것이 왔다. 얼굴이 오지 않았다. 있었다는 것만 왔다. 세하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을 읽어내는 사람이었다. 세하가 혼자 하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오고 있었다.
세하는 종이를 봤다.
그 이름 옆에 날짜가 있었다. 세하가 기억원에 들어온 시점보다 반 년 전이었다.
“이 사람이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원 안에 있었어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말했다.
“세나보다 먼저 들어온 사람이에요.”
처리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같은 감각이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달랐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하율 씨 것과 세나 것이 다른 것처럼. 같은 뿌리에서 오는 것인데 방식이 달랐어요. 그 사람은 기억 안에서 층을 읽는 게 아니었어요.”
세하가 박진술을 봤다.
“그럼요.”
“기억이 만들어지는 것을 봤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어떤 경험이 기억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거기서 읽어냈어요. 세나가 완성된 기억을 읽는 것과 달리, 그 사람은 기억이 형성되는 방향을 봤어요.”
정아로가 벽 가까이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이 말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의 마지막 층이었다.
“그래서 자발적 의뢰가 아닌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종이를 내려다보면서였다. “그 사람이 기억원을 나가려 했어요?”
박진술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안에 있는 것을 세하는 읽었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쌓아온 것으로. 각색이 아니었다. 답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답이 단순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가려 한 게 아니에요.” 박진술이 말했다. “내가 내보낸 거예요.”
세하가 고개를 들었다.
“그 감각이 세나 것과 같이 있으면.” 박진술이 말했다. “둘이 같은 방향을 보는 순간이 오면. 내가 기억원 안에서 한 것들의 전체 구조가 드러날 수 있었어요. 세나가 완성된 층을 읽고, 그 사람이 그것이 만들어진 방향을 읽으면. 둘이 합쳐지면 내가 숨겨놓은 것들이.”
박진술이 거기서 멈췄다.
“전부 나오니까.”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지금 마지막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세하가 아직 묻지 않은 것이 있었다. 구민재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 그 눈 안에 있었다.
“이 사람이 어디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에게 묻는 것이 아니었다.
구민재를 보는 것이었다.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오래였다. 그 눈 안에서 삼 년간 세하와 같은 공간에서 일해온 것이 있었다. 세하를 채용했을 때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 있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이었다.
“레테에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레테.
세하가 삼 년간 있던 곳이었다. 타인의 기억을 다루던 곳이었다. 기억 기술자들이 있는 곳이었다.
“지금도요?” 세하가 말했다.
“네.” 구민재가 말했다.
하율이 세하 옆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지금 이 말이 세하에게 어떻게 오고 있는지를 읽으려 하는 것이 있었다. 재촉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종이를 손 안에 쥐었다. 그리고 구민재를 봤다.
“그 사람이 자신의 기억이 처리됐다는 걸 알아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잠깐이었다.
“알고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다만.”
구민재가 잠깐 멈췄다.
“어느 부분이 처리됐는지를 모르고 있어요. 세하 씨와 기억원에서 같이 있었던 것이. 그 구간이 지워져 있어요.”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두 박자를 벌었다.
기억원 안에서 세하와 같이 있었던 사람. 세하가 완성된 기억을 읽고, 그 사람이 기억이 만들어지는 방향을 읽었던 것. 박진술이 그 둘이 합쳐지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 그리고 지금 레테에 있다는 것.
세하의 기억 안에서 흐렸던 것이 다시 움직였다. 방 안에 있었던 사람. 얼굴이 오지 않았다. 목소리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종이 위의 이름을 보면서 손 안에서 캡슐이 아닌 것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왔다. 기억이 아닌 방식의 것이었다.
“이 사람한테 말해야 해요.”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게 세나가 결정하는 거예요?” 박진술이 말했다.
“네.” 세하가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막지 못했던 것이 이번에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무거움이 없어진 자리의 것이었다.
도현이 세하를 봤다.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두 사람의 눈 안에서 이 년 전 같이 있었던 것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다음 방향을 찾고 있는 것이 있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피로한 것이 있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뒤의 피로였다. 그러나 그 피로 안에서 다음이 있다는 것도 있었다.
“세하 씨.”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그 사람한테 연락하는 것. 내가 할 수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오늘 안으로.”
세하는 잠깐 말이 없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민재가 단말기에서 손을 들었다. 핸드폰을 꺼냈다. 번호를 찾는 것이었다. 오래된 번호일 것이었다.
세하는 손 안의 종이를 봤다. 이름들이 빽빽했다. 그 안에서 세하가 멈췄던 이름이 있었다. 그 사람이 레테에 있었다. 삼 년 동안 세하와 같은 건물 안에 있었던 것이었다.
세하의 기억 안에서 그 얼굴이 오지 않았다. 목소리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손 안에서 종이를 쥐는 힘이 달라진 것을 세하는 알아챘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서 전부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세하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처음으로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이.
구민재가 핸드폰을 귀에 댔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기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세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하율을 봤다. 하율이 세하를 보고 있었다. 그 눈 안에서 세하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같이 있는 것이었다.
구민재의 목소리가 낮게 들렸다.
“나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지금 시간 돼요?”
전화 너머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목소리가 왔다.
세하는 그것을 들었다. 단어를 들은 것이 아니었다. 소리의 질감을 들은 것이었다. 낮지 않았다. 그리고 건조하지 않았다. 그것만을 세하는 지금 알 수 있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오겠다고 해요.” 구민재가 말했다. “삼십 분.”
처리실 안의 모두가 세하를 봤다.
세하는 손 안의 종이를 봤다. 그리고 안주머니 안의 차가운 캡슐을 느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박진술한테 맡겨뒀던 것이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캡슐을 꺼냈다. 차가웠다. 그러나 손 안에 쥐는 순간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세하는 느꼈다. 온기가 오는 것이었다. 세하의 것인지 더 오래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삼십 분이었다.
세하는 캡슐을 손 안에 쥔 채로 처리실 문 쪽을 봤다.
삼십 분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몸 안에서 재고 있었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랬다. 박진술이 왔을 때도. 강서진의 기억이 열릴 때도. 삼십 분이라는 것이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있었다.
구민재가 핸드폰을 내렸다.
처리실 안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있었다. 박진술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정아로가 벽 가까이에서 세하를 보고 있었다. 도현과 강서진이 처리실 한쪽에 있었다. 하율이 세하 옆에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차가웠다가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박진술한테 맡겨뒀던 것이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를 보는 것이었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지금 어떤 방식으로 나와야 하는지를 마지막으로 재는 것이 있었다.
“종이에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그런데 직접 말해줘요.”
구민재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오래된 것이었다. 삼 년 전 세하를 채용했을 때부터 들고 있던 것이었다.
“이준서예요.”
구민재가 말했다.
세하는 그 이름을 들었다.
기억 안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그런데 손 안의 캡슐이 갑자기 차가워졌다. 쥐는 힘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손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아까 파일을 읽었을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아챘다.
기억이 없는데 몸이 먼저 아는 것이었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면서 이 감각을 세하는 알고 있었다. 기억이 지워져도 감각은 남는다는 것을. 그것이 지금 세하 안에서 오고 있었다.
“레테 어디예요.”
세하가 말했다.
“기억 복원팀이에요.”
구민재가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기억 복원팀. 세하가 삼 년간 있던 정제팀 옆이었다. 같은 층이었다. 같은 복도를 썼다.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세하는 종이를 봤다. 이름 옆의 날짜를 봤다. 처리 일자였다. 세하가 기억원에 들어오기 반 년 전이었다. 그리고 그 옆의 표기를 봤다. 자발적 의뢰가 아닌 것이었다.
박진술이 내보낸 것이었다. 세하와 합쳐지면 자신이 숨겨놓은 것들이 전부 드러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을 보는 것이었다.
“기억원에서 나간 다음에 레테에 들어온 거예요?”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내가 레테에 연결해줬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박진술이 연결해줬다. 기억을 강제로 처리한 사람을. 그리고 레테로 보냈다.
“왜요.”
세하가 말했다.
“갈 곳이 없었으니까.”
박진술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원 밖에서 그 감각을 쓸 수 있는 곳이 없었어요. 그리고 내가 처리한 거니까. 책임이 있었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정아로가 박진술을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알고 있던 것이 이 말과 맞닿으면서 무언가가 최종적으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구민재 수석님이 알고 있었던 것도.”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박진술 씨한테서요?”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답이었다.
“그 사람이 자신의 기억에서 뭔가 잘려 있다는 걸 알면서.”
세하가 말했다. “삼 년 동안 같은 건물에서 일했어요.”
“네.”
구민재가 말했다.
“그리고 세하 씨도 그 자리에 있었어요. 세하 씨 기억에서도 그 구간이 지워져 있었고.”
세하는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 두 박자를 벌었다.
삼 년이었다. 세하가 레테에서 타인의 기억을 다루던 삼 년 동안. 같은 층에. 같은 복도에. 기억원에서 함께 있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 구간이 둘 다에서 지워진 채로.
하율이 세하 옆에서 아주 조금 움직였다. 세하 쪽으로.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더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처리실 문 쪽을 봤다.
삼십 분 중 얼마가 지났는지를 세하는 가늠했다. 절반쯤이었다.
“그 사람이 올 때.”
세하가 말했다. 처리실 안의 모두를 보는 것이었다.
“내가 먼저 말할 거예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계산이 아닌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름 붙이지 않았다. 나중이었다. 어머니 캡슐을 재생한 다음이었다. 박진술이 한 것들 전체를 다 받고 난 다음이었다.
강서진이 세하에게 왔다. 처리실 한쪽에서 걸어오는 것이었다. 세하 앞에 섰다.
“이준서.”
강서진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원에서 봤어요. 기억이 돌아오면서.”
세하가 강서진을 봤다.
“어떤 사람이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묻는 방식이었는데 평탄했다. 손 안의 캡슐을 쥐는 힘을 조절하면서 나온 것이었다.
강서진이 잠깐 말이 없었다.
“세하 씨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구간에서 그 사람이 있었어요.”
강서진이 말했다. “내 기억 안에서는 왔어요. 그런데 그게 세하 씨한테 어떻게 들려야 하는 건지를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것이 세하 씨가 기억하는 것과 다를 수 있으니까.”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강서진이 조심하는 것이었다. 기억이 돌아왔다고 해서 그것이 완전한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강서진도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세하가 말했다. “들을게요.”
강서진이 세하를 봤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세하 씨 옆에 있던 사람이었어요. 기억원에서. 판별 작업 할 때. 세하 씨가 캡슐을 읽어내면 그 사람이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를 봤어요. 두 사람이 같이 있어야 읽히는 게 있었어요.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
세하는 그 말을 들으면서 기억 안에서 흐렸던 것을 움직였다. 방 안에 있었던 사람. 얼굴이 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강서진이 말하는 것과 세하의 손 안에서 캡슐이 반응하는 것이 같은 방향에 있었다.
“기억원에서 마지막 날.”
강서진이 말했다. “박진술이 이준서를 내보내던 날. 세하 씨가 막으려 했어요. 그 자리에서. 그런데 박진술이 먼저 기억을 처리했어요. 세하 씨 것을.”
“순서가 그랬어요?”
세하가 말했다.
“네.”
강서진이 말했다. “세하 씨가 막으려 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예요. 그 직전에 처리됐으니까.”
박진술이 의자에서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피하는 것이 없었다. 강서진의 말이 자신의 것을 지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세하는 박진술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판단하지 않을 것이었다. 어젯밤부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것이 맞았다. 이준서가 오고 나서. 어머니 캡슐을 재생하고 나서. 그 모든 것을 다 받고 나서.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도현이 세하에게 왔다. 강서진 옆으로 와서 섰다.
“세하 씨.”
도현이 말했다.
세하가 도현을 봤다.
“이준서가 레테에 있는 동안.” 도현이 말했다. “나는 그 사람 기억에서 뭔가 잘려 있다는 걸 눈치챈 적 있었어요. 같은 층에서 일하니까. 그런데 물어보지 못했어요. 내 기억도 그 구간이 없었으니까. 뭘 물어야 할지를 몰랐어요.”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도현도 알아챘던 것이었다. 그러나 물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둘 다 같은 구간이 지워진 채로 같은 건물 안에 있었던 것이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이제 완전히 따뜻해져 있었다. 세하의 온기가 거기까지 간 것이었다. 아니면 더 오래된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지금 그것을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처리실 문이 열렸다.
세하는 고개를 들었다.
삼십 분이었다. 그것이 몸 안에서 딱 맞아 들어오는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처리실 안을 봤다. 사람이 많았다. 잠깐 멈췄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세하는 그 눈을 봤다.
기억이 오지 않았다. 얼굴을 본 적이 있다는 것이 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 오지 않았다.
그런데 손 안의 캡슐이 차가워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차가운 것이었다. 세하의 손이 차가워진 것이었다. 캡슐은 그대로였다.
세하는 그것을 알아챘다.
기억이 없는 곳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몸이 먼저 아는 방식이었다.
들어온 사람이 세하에게 걸어왔다. 멈추지 않았다. 처리실 안의 다른 사람들을 보지 않았다. 세하를 보면서 왔다.
그리고 세하 앞에 섰다.
세하보다 조금 키가 컸다. 목소리가 낮지 않았다. 건조하지도 않았다. 아까 전화 너머로 들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지금 여기 있었다.
“구민재한테 연락 받았어요.”
이준서가 말했다.
세하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기억 안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목소리가 닿는 순간 세하 안에서 무언가가 조여오는 것이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반가움도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아래에 있는 것이었다.
“이세하예요.”
세하가 말했다.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세하를 알아보는 것이 아니었다. 세하를 보면서 자신 안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하와 같은 방식이었다. 기억이 없는 곳에서 오는 것이었다.
“알아요.”
이준서가 말했다. “레테에서 같은 층이었으니까.”
“그것만이 아니에요.”
세하가 말했다.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기다리는 것이 있었다. 오래된 방식의 기다림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의 것이었다.
“기억원에서도 같이 있었어요.”
세하가 말했다. “그 구간이 지워진 채로 우리 둘 다 여기 있었어요. 삼 년 동안.”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오래였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찾으려 하는 것이 있었다. 기억이 없는 자리에서 오는 것이었다. 세하가 아까부터 느껴온 것과 같은 방식의 것이었다.
“박진술이요.”
이준서가 말했다. 묻는 것이었다.
“여기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이준서가 처리실 안을 봤다. 의자에 앉아 있는 박진술을 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박진술이 이준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있었다. 기억원 초창기부터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 눈 안에서 계산이 없었다. 처리실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 그랬다.
이준서가 박진술에게서 눈을 돌렸다. 세하를 봤다.
“기억 복원이요?”
이준서가 말했다.
“그것도요.”
세하가 말했다. “그런데 그전에. 당신이 기억원에서 한 일을 먼저 들어야 해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직 있어요.”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되고 있었다.
“나도요.”
이준서가 말했다.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기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따뜻했다. 그리고 안주머니 안에 있는 차가운 캡슐도 느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이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들이 지금 같은 자리에 있었다.
세하는 구민재를 봤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피로한 것이 있었다. 오래 들고 있던 것을 내려놓은 뒤의 피로였다. 그러나 그 피로 안에서 다음이 있다는 것도 있었다.
“복원 준비할게요.”
구민재가 말했다. “준비되면 말해줘요.”
세하는 이준서를 봤다.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기억이 없는 자리의 것이 아직 있었다. 세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의 것이었다. 둘이 같은 방향을 보는 순간이 오면 박진술이 숨겨놓은 것들이 전부 드러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이 지금 같은 처리실 안에 있었다.
세하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차가운 캡슐을 꺼냈다.
이준서가 세하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왔다. 알아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알아보는 것과 같은 방식의 반응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구민재를 봤다.
“이준서 씨 복원 먼저 해요.”
세하가 말했다. “내가 옆에 있을게요.”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잠깐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구민재가 단말기 쪽으로 걸었다. 손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이준서가 처리 의자 쪽으로 걸었다. 세하가 그 옆으로 따라 걸었다. 하율이 세하 뒤에서 따라왔다. 말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이준서가 처리 의자에 앉았다. 눕기 전에 세하를 한 번 봤다.
세하는 거기 있었다.
손 안에 두 개의 캡슐이 있었다. 하나는 따뜻했다. 하나는 차가웠다. 어느 쪽이 어느 것인지 세하는 지금 구별하지 않았다.
기계 소리가 다시 바뀌었다.
세하는 처리실 천장을 잠깐 봤다. 낮고 흰 천장이었다. 오늘 아침 세하가 누웠을 때도 같은 천장이었다. 그 아래에서 기억들이 돌아왔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기억원의 복도가. 하율에게 했던 말이.
그리고 이제 이준서가 그 아래에 누워 있었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쥐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이었다. 그것은 이준서의 기억이 돌아온 다음이었다. 둘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읽어내는 것이 맞다고 세하는 생각했다. 기억이 없는 채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민재가 말했다.
“시작할게요.”
기계 소리가 낮게 깔렸다.
세하는 이준서의 옆에 서 있었다. 이준서가 처리 의자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낮고 흰 천장이었다. 세하가 오늘 아침 누웠을 때와 같은 천장이었다. 이준서의 눈 안에서 긴장이 있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오래 비어 있던 자리가 열리기 직전의 것이었다.
구민재가 단말기 앞에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화면을 읽으면서 말했다.
“첫 번째 층부터 시작할게요.”
세하는 이준서의 손 가까이에 자신의 손을 뒀다.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오늘 하율에게 했던 것이었다. 아까 도현이 강서진에게 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이 처리실 안에서 반복되어온 방식이었다.
이준서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흘렀다.
구민재가 말했다. “레테 입사 이전 구간이 열렸어요.”
이준서의 눈썹이 아주 조금 좁혀졌다. 기억이 오는 방식으로 오는 반응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삼 년간 타인의 기억을 다루며 읽어온 반응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기술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보고 있는 것이었다.
박진술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처리실 안을 보고 있었다. 이준서가 처리 의자에 누운 것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오래된 방식으로 움직였다. 세하는 그것을 보면서 판단하지 않았다.
구민재가 말했다. “박진술이 처리한 구간 나왔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하율 씨 때랑 같은 방식이에요?” 세하가 말했다.
“아니에요.”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더 단단해요. 기억원 초창기보다 이후 방식이에요. 하율 씨 것보다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잠겨 있어요.”
정아로가 벽 가까이에서 구민재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다는 것이 있었다.
“박진술이 이준서 씨 기억을 처리한 게 하율 씨보다 나중이에요.” 정아로가 말했다. “그사이에 기술이 발전한 거예요.”
박진술이 정아로를 봤다. 부정하지 않았다.
“뚫을 수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구민재가 잠깐 말이 없었다. 화면을 봤다. 그리고 말했다. “이준서 씨가 이미 안에서 밀고 있어요.”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잠겨 있는데 안쪽에서 반응이 와요.” 구민재가 말했다. “기억이 스스로 열리려는 것이에요. 박진술 방식이 단단해도 안쪽 기억이 살아 있으면 이런 반응이 나와요.”
세하는 이준서를 봤다.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오래 잠겨 있던 것이 처음으로 방향을 찾는 것이었다.
이준서의 손이 의자 위에서 아주 조금 폈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그리고 손을 조금 더 가까이 뒀다. 잡지 않은 채로.
시간이 더 흘렀다.
구민재가 말했다. “열렸어요.”
기계 소리가 달라졌다. 더 깊은 곳을 읽는 소리였다. 세하는 삼 년간 그 소리의 차이를 알고 있었다. 지금 기계가 내는 소리는 오늘 중에서 가장 깊은 것이었다. 하율의 두 번째 층을 열 때보다도.
이준서의 얼굴에서 표정이 바뀌었다.
기억이 오는 것이었다.
세하는 이준서를 보면서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두 개였다. 하나는 따뜻했다. 하나는 차가웠다. 어느 쪽인지 지금은 구별하지 않았다. 그냥 쥐고 있었다.
정아로가 벽에서 나왔다. 세하 옆으로 왔다. 말이 없었다. 처리 의자 위의 이준서를 보는 것이었다.
세하가 정아로를 봤다.
“기억원에서 이준서 씨 알았어요?” 세하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정아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들고 있던 것이 이 질문과 맞닿는 것이 있었다.
“알았어요.” 정아로가 말했다. “기억원에서 세하 씨 들어오기 전부터요. 이준서 씨가 어떤 방식으로 읽는 사람인지도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나서 레테로 간 것도요.”
“네.”
“그래서 레테 감사팀으로 들어온 거예요.” 세하가 말했다. 묻는 것이 아니었다.
정아로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것이 답이었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세하 씨.”
세하가 구민재를 봤다.
“이준서 씨 기억 안에서 세하 씨가 나왔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기억원 안에서 같이 있었던 것이요. 박진술이 잠가뒀던 구간이에요.”
세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하 씨 얼굴이 있어요.” 구민재가 말했다. “이준서 씨 기억 안에. 세하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세하는 이준서를 봤다. 이준서의 눈꺼풀 아래에서 무언가가 오고 있었다. 빠르게. 한꺼번에가 아니었다. 하나씩이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잠겨 있던 것이 순서대로 열리는 것이었다.
이준서의 손이 세하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세하는 그것을 봤다. 기억이 없는 곳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세하 안에서도 같은 것이 오고 있었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슬픔이 아니었다. 반가움도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기억이 만들어지기 전에 있었던 것이었다.
세하는 손을 뻗었다.
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거기 있는 것이었다.
이준서의 손끝이 세하의 손에 닿았다. 아주 가볍게. 확인하는 것처럼. 기억이 오는 동안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세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기계 소리가 낮게 계속 깔렸다.
하율이 세하 뒤에서 세하를 보고 있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이준서의 기억이 열리는 것을 보면서, 세하가 그 옆에 있는 것을 보면서.
그때 구민재가 말했다.
“이준서 씨 기억 안에서 뭔가가 더 있어요.”
모두가 구민재를 봤다.
“박진술이 잠가뒀던 것 안에.” 구민재가 화면을 보면서 말했다. 목소리가 낮았다. “이준서 씨가 기억원에서 읽어낸 것들이 있어요. 기억이 만들어지는 방향. 박진술이 하는 일 안에서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아닌지. 그것들이 다 거기 있어요. 잠겨 있었던 거예요. 지워진 게 아니라.”
박진술이 단말기 화면 쪽을 봤다. 그 눈 안에서 계산이 없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오래 잠가뒀던 것이 열리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읽어낼 수 있어요?” 세하가 말했다.
“이준서 씨가 깨어난 다음에.” 구민재가 말했다. “기억이 다 돌아오고 나서. 세하 씨 기억이랑 같이 맞춰봐야 해요. 구민재가 말한 대로예요. 세하 씨가 완성된 층을 읽고 이준서 씨가 그것이 만들어진 방향을 읽으면 둘이 합쳐지는 것이 있어요.”
정아로가 박진술을 봤다. 박진술은 처리 의자 위의 이준서를 보고 있었다.
“박진술 씨.” 세하가 말했다.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이준서 씨 기억이 돌아오고 나면.” 세하가 말했다. “그때 당신한테 남은 질문들을 할 거예요.”
박진술이 세하를 오래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계산이 아닌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 이름 붙이지 않았다. 아직이었다. 어머니 캡슐을 재생하기 전이었다.
“알겠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기계 소리가 달라졌다.
구민재가 화면에서 눈을 들었다. “복원 마무리됐어요.”
이준서가 눈을 떴다.
천천히였다. 천장을 봤다. 낮고 흰 천장. 그것을 보는 눈 안에서 무언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억이 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기억이 막 도착한 것의 혼란이 아니었다. 오래 잠겨 있던 것이 열리고 나서 그것이 이미 거기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방식이었다.
이준서가 고개를 돌렸다. 세하를 봤다.
세하는 그 눈을 봤다.
기억이 오지 않았다. 여전히. 얼굴이 낯설었다. 그런데 그 눈 안에 있는 것이 낯설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왔어요?” 세하가 말했다.
이준서가 잠깐 말이 없었다.
“기억원이 왔어요.” 이준서가 말했다. 목소리가 낮지 않았다. 건조하지도 않았다. “판별 작업 하던 방이. 세하 씨 옆에 있던 것이.”
세하는 그 말을 들었다.
“내 기억에는 아직 없어요.” 세하가 말했다. “그 방이. 당신이.”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멈칫했다.
“있었어요.” 이준서가 말했다. “세하 씨는 기억 안에서 층을 읽었어요. 완성된 것들을. 나는 그게 어디서 왔는지를 봤어요. 두 개가 같이 있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었어요. 우리 둘 다 혼자서는 안 되는 것이.”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박진술이 그게 무서웠던 거예요.” 이준서가 말했다. 이번에는 박진술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세하를 보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세하 씨 기억 안에 있는 것과 내가 읽어낸 방향이 합쳐지면. 기억원 안에서 박진술이 덧씌운 것들의 전체 구조가.”
“드러나니까.” 세하가 말했다.
이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느꼈다. 두 개였다. 하나는 따뜻했다. 하나는 이제 손 안에서 조금씩 따뜻해지고 있었다. 어머니가 남긴 것이었다. 아직 재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세하는 그것을 꺼냈다.
처리실 안의 모두가 세하의 손을 봤다.
세하가 이준서를 봤다.
“이걸 같이 재생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세하가 말했다. “당신 기억이 돌아온 다음에. 여기서.”
이준서가 세하의 손 안에 있는 캡슐을 봤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왔다. 알아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알아보는 것과 같은 방식의 반응이었다. 세하가 처리실에 들어왔을 때 이준서의 눈 안에서 왔던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어머니 거예요?” 이준서가 말했다.
세하는 이준서를 봤다. 기억 안에서 아무것도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서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지금 세하 안에서 무언가를 움직였다.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어떻게 알아요.” 세하가 말했다. 묻는 것이었다.
이준서가 잠깐 말이 없었다.
“기억 안에서요.” 이준서가 말했다. “방금 돌아온 것 안에. 세하 씨 어머니가 있어요. 기억원에서. 기억이 처리되던 날.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요. 박진술 옆에서가 아니에요.”
처리실 안이 완전히 조용해졌다.
강서진이 이준서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같은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지금 확인되는 것이 있었다.
“세하 씨 어머니 쪽이었어요.” 이준서가 말했다. “박진술이 작업하는 동안. 어머니가 저한테 말했어요. 세하 씨 이름으로. 세나라고 하지 않고. 세하라고.”
세하의 손이 차가워졌다. 캡슐을 쥐는 힘이 달라진 것이 아니었다. 손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아까부터 반복되어온 방식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달랐다. 눈물이 오려는 것과 같은 방식의 것이 그 아래에 있었다. 세하는 그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누르지 않았다.
“뭐라고 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무언가가 조여 있었다.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 잠겨 있던 것이 지금 처음으로 소리가 되는 것이 있었다.
“내 딸이 올 거다.” 이준서가 말했다. “그때 혼자 두지 말아줘. 그것만 부탁했어요.”
처리실 안이 조용했다.
기계 소리만 낮게 깔렸다.
세하는 손 안의 캡슐을 봤다. 따뜻했다. 완전히 따뜻해져 있었다. 세하의 온기인지 더 오래된 것인지를 지금 세하는 구별하려 하지 않았다.
하율이 세하 뒤에서 세하 쪽으로 한 걸음 왔다. 말이 없었다. 그냥 더 가까이 있는 것이었다.
세하는 이준서를 봤다. 이준서가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기억이 돌아온 것과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겹쳐지고 있었다. 기억원에서 같이 있었던 것이. 박진술이 잠가뒀던 것이. 그리고 어머니가 남긴 말이.
세하가 캡슐을 단말기 쪽으로 가지고 갔다.
구민재가 세하를 봤다. “재생할게요.”
“잠깐요.”
세하가 처리실 안을 한 번 봤다. 구민재가 있었다. 정아로가 있었다. 하율이 있었다. 강서진이 있었다. 도현이 있었다. 박진술이 있었다. 이준서가 처리 의자에서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세하는 박진술을 봤다.
“박진술 씨.”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어머니가 이준서 씨한테도 부탁했어요.” 세하가 말했다. “하율 씨한테 한 것처럼. 당신한테 한 것처럼.”
박진술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최종적으로 자리를 정리했다.
“어머니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세하가 말했다. “혼자 오면 놓치는 게 생긴다고 했어요. 그래서 여러 곳에 남긴 거예요. 하율 씨한테. 당신한테. 이준서 씨한테.”
박진술이 세하를 봤다. 그 눈 안에서 오래된 것이 있었다. 세하를 세나라고 처음 불렀던 것보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어머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것이었다.
“어머니가 나를 믿었어요.” 박진술이 말했다. “끝까지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어떤 부분에서는.”
“그 부분이 뭔지는.” 세하가 말했다. “이걸 재생하고 나서 알게 될 것 같아요.”
세하는 캡슐을 단말기에 연결했다.
구민재가 화면을 봤다. 그리고 세하를 봤다. “준비됐어요?”
세하는 뒤를 돌아봤다. 이준서가 처리 의자에서 내려서 세하 옆으로 오고 있었다. 하율이 세하의 다른 쪽에 있었다. 둘 다 말이 없었다. 그냥 거기 있었다.
세하는 앞을 봤다.
“해요.”
구민재가 화면을 눌렀다.
처리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캡슐 안에서 무언가가 열리기 시작했다.
첫 번째 이야기가 곧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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